80소년 떠돌이의 시 - 한국의 서정시
서정주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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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80소년 떠돌이의 시(詩)

올해 2월 1일은 정말 바람이 많이 불던 날이었다. 건조하고 투명한 시베리아의 머리카락이 갈기갈기 풀어헤쳐진 채 내 몸 -뺨, 이마, 다리-을 사정없이 휘감아댔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곤 저 멀리 동산과 어디 나무 하나, 건물-바람을 막아 줄 만한 것- 하나 없이 논밭이 펼쳐져 있는 것. 주위에 농가로 보이는 집들이 흩어져 있는 풍경이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묻힌 곳을 찾아간다기에 무작정 데려가라 하고 따라나선 나였다. 선배들도 지리를 전혀 모르고 예전에 TV뉴스에서 보았다면서 어렴풋이 그곳의 지명을 기억하고 나를 데려온 것이었다. (아마 전북 고창군 선운리 혹은 심원이었을 것..)

버스에서 내려 그 추운데서 한 시간 가량 헤맸다. 이윽고 어느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마지막으로 시도하는 거다'하고 올라간 곳. 양지바른 동산 중턱. 멀리서 보면 키가 큰 나무 한 그루만이 보이는 아담한 곳에 그 분의 무덤이 있었다. 그런데 믿을 수가 없었다. 확신할 수가 없었다. 무덤 봉분이 2개 나란히 있었는데 그곳에는 비석 하나 없었던 것이다. 초라하기도 했다. 아마 장사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가보았다.

절을 올리고 예를 갖추고 나서, 추웠던 터라 무덤 위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곳에는 신기하게도 바람이 세지가 않았다. 그곳에서 미당에 대해서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 후 미당에 유독 관심있어해서 책을 샀던 선배에게서 '80소년 떠돌이의 시'라는 시집을 빌렸다. 미당의 얼굴이 은은하게 명암처리가 되어있는 표지. 그 시인의 마지막 시집이라 했다.

그의 노년기 때의 모습이 많이 녹아들어 있었다. 시의 소재들은 거의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 정겨운 것들이 많았다. 주로 그의 생활과 생각에 관한 시들이었다. 특히, 아내와 단 둘이 지내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자연스레 연상되었다. 겨울 어느 청명한 날, 아내가 창 밖을 내다보며 오늘은 관악산이 웃는다고 감탄하자, 시인은 아내에게 맞장구치며 아내더러 자기보다 더 시인이라고 한다. 자신은 대서쟁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미당은 아내의 손톱에 떠오르는 초사흘 달을 보고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늙어 가는 슬픔에 대해서 위로를 받는다는 것일까. 나는 그 말을 보고 내 손톱을 빤히 바라보기도 했다. 내 손톱에는 초사흘 달이 뜨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그리도 달을 바라보며 왠지 좋아했던 것일까. 시인의 소박한 행복이 나와 비교되면서 잠시 비애감에 젖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창 선운사와 그의 고향 질마재에 관한 시도 있었다. 선운사의 동백꽃 제사 모습을 묘사한 것, 그의 그리운 생가 모습. 그것이 잔잔하게 시로 형상화되어 있었다.
이런 농촌적이고 향토적인 시뿐만 아니라 서양 문물에 관한 시도 있었다. 좀 어색한 감이 없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색한 영어 발음, 이국적인 사물과 지명들.. 이질적인 대상에 관한 시보다는 향토적이고 정갈한 시가 읽기도 좋고 나의 마음에 들었다.

詩人, 미당 서정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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