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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평점 :
평범한 사람이면 그렇듯이, 나 또한 '데미안'은 이런 경우였다. 어렸을 때, 의무적으로 주어진 세계명작을 읽어야겠다 하는 생각으로 덤벼들었다가 그 어려움에 손을 놓고 몇 년동안 버려둔 후, 이제 아이와 성인의 어중간한 시기에서 다시 눈에 띄어 읽는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 싱클레어의 생각과 경험에 공감을 얻고, 생각을 확장해나가는 재발견의 과정. 이런 경우는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도 그랬다.
얼마 전 결성한 독서토론 모임에서 정한 첫 책이 데미안이었다. 책이 생각보다 빨리 읽어지지가 않았다. 좀 조급한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독서토론 때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털어놓았던 것 같이, 싱클레어와 비슷한 경험으로 공감을 얻고 있었고, 동일시되는 부분도 적지 않아서 지루하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헤세의 다른 작품에도 그렇듯이 이 데미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기구현, 자아실현이다. 서문에서도 '나는 나에게서 우러나오는 그것을 살아보려고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식으로 나온다.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 나니 나는 소설 속의 사건이나 인물들도 이런 커다란 주제 안에 긴밀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고 보여졌다. 피스토리우스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자기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아무아무개씨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 있는 일종의 수치스러운 면이 그 사람을 통해 느껴지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프란츠 크로머라는 인물에게도 연관시켜서 생각했다. 싱클레어에게는 자신을 위협하고 압박하는 크로머가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다. 그가 등장함으로서 싱클레어는 환한 세계와 대조되는 어두운 세계를 더 느끼고 죄책감을 갖게 된다. 이 때 크로머라는 존재는 단지 불량소년이 아니다. 싱클레어에게도 있던 어두운 세계의 상징, '그림자'인 것이다. 심리학자 융은 자기구현을 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자신에게 있는 '그림자'를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의식적인 면 뿐 아니라 무의식적인 면도 함께 생각하고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자기구현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싱클레어는 그 어려운 과정을 데미안과 피스토리우스, 에바부인의 도움으로 헤쳐나간다.
그리고 여기에는 압락사스란 신이 나오는데, 처음에 나는 이 신이 성경이나 신학에서도 등장하는 신인 줄 알았다. (참고로 나는 크리스천이 아니다.) 그런데 알아보니, 신비주의자들이 신봉하는 신이라는 것이었다. 기독교에서 선만을 드러내고 권장하는데 반해, 압락사스는 선과 악, 밝음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양성적인 신이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친구에게 물어본 결과, 기독교에서는 그런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무교인 또다른 친구에게 견해를 물어보니, 자신의 입장에서는 압락사스라는 성격의 신이 더 완벽하게 느껴진다는 말을 했다. 나는 아직 신에 대한 개념이 그다지 있지 않아서 견해를 말하지는 못하겠다. 단지, 이런 생각이 든다. 신은 인간의 상상이 빚어낸 존재가 아니냐는. 그러면서 신이 어렴풋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신은 죽었다라고 헤세는 사형선고를 내렸다고도 했다.
데미안에서 드러난 헤세의 세계관과 종교관, 가치관을 알아보는 것도 즐거웠고, 헤세의 다른 작품과 그가 살아온 배경을 둘러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그러나 데미안은 그런 배경지식 필요없이 싱클레어와 자신과의 유사한 경험을 발견하면서 그 과정을 간접체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책이다. 그리고 정말, 10대가 가기 전에는 읽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과의례같이 읽혀진다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은밀하면서도 정확하게 찌르는 그 무엇. 그리고 중간중간에 눈에 확 띄는 그 문장, 구절들.
데미안을 읽고, 그리고 더 공부하고 난 후 모호했던 여러 생각이 많이 명료해졌다. 무언가를 얻은 것 같고, 나를 좀더 생각하게 해 주었다. 다른 비판적인 칼을 들이댈 꺼리도 있었지만, 이 책의 장점을 알고 얘기하고 체화시키는데 그 시간을 쓰는 것이 더 나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