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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없는 건축 - 한국의 레거시 플레이스
황두진 지음 / 시티폴리오 / 2025년 9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유럽 여행을 갔을 때, 매번 길을 걷다가 멈춰 서곤 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그곳의 건물들이 말 그대로 ‘시간을 입은 존재들’이었기 때문이죠.
수백 년 전의 돌과 벽돌이 지금도 현역으로 쓰이고, 그 안에서 여전히 사람이 살고, 커피를 마시고, 기도하는 풍경이 너무도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오면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낡은 건물은 금세 철거되고, 그 자리에 네모반듯한 회색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섭니다.
물론 편리하고 깨끗하지만, 마음 한켠이 허전한 건 어쩔 수 없더군요.
"우리도 저렇게 오랜 이야기를 품은 건축물을 가질 수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늘 있었습니다.
그래서 황두진 건축가의 <은퇴 없는 건축>을 만났을 때, 반가움이 밀려왔습니다.
이 책은 ‘레거시 플레이스(Legacy Place)’라는 다소 생소한 개념을 중심으로 54곳의 건축물을 소개합니다.
말 그대로 ‘유산으로 남길 만한 장소’이지요.
저자는 다음 네 가지 기준으로 이들을 선정했다고 합니다.
1. 충분히 나이를 먹은 건축물일 것 (최소 30년 이상)
2. 건물이 애초의 용도를 유지하고 있을 것
3. 원형에 대한 존중이 있을 것
4. 공공성을 지닐 것
이 네 가지 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책을 읽다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단순히 오래되었다고 ‘레거시’가 되는 게 아니더군요.
사람의 손을 덜 타고, 시대의 변화를 견디며,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는 ‘품격 있는 노년’의 건물만이 이 반열에 오를 수 있습니다.
책에 실린 건물들의 사진만 봐도 그 아우라가 느껴집니다.
건물은 말이 없지만, 그 대신 그림자와 벽, 창문 사이로 이야기를 전합니다.
“나는 여전히 여기 있다.” 라는 식으로요.
그 건물들이 여전히 새로운 사람을 맞이하고, 다른 시대의 이야기를 품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참 경이로웠습니다.
이래서 ‘은퇴 없는 건축’이구나 싶었습니다.

어릴 적 서울을 생각하면 제 머릿속엔 늘 63빌딩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던 한강변의 그 건물은 어린 마음에 서울의 상징이자, ‘성공’의 아이콘처럼 느껴졌습니다.
지금은 더 높은 빌딩들이 즐비하지만, 제 기억 속 63빌딩은 여전히 대한민국 최고층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그 건물의 존재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높은 건물이 아니라, 한 시대의 자부심과 기술력, 그리고 꿈이 응축된 하나의 ‘기념비’였던 거죠.
그리고 서울시청 근처를 지날 때마다 들르게 되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언제 봐도 고요하고 아늑한 이 성당이 사실은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초기 설계를 맡았던 영국인 주교 마크 트롤로프는 자금 부족으로 성당을 축소해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언젠가 한국인들이 이 성당을 완성할 것이다.”
그리고 그 예언처럼 훗날 한국 건축가 김원이 원래의 설계를 완성해냈습니다.
이 이야기를 알고 나니, 성당의 돌 하나하나가 전혀 다르게 보이더군요.
그곳에는 단순한 종교 건물이 아닌 ‘세대 간 협업의 건축사’가 담겨 있었습니다.
책에는 황두진 건축가 자신의 공간, 목련원도 소개됩니다.
이 공간은 단순한 사무실이 아니라, 건축가로서의 철학과 사유가 녹아 있는 장소입니다.
‘레거시 플레이스’란 결국 자신이 평생을 바쳐 만든 결과물이 세월의 풍화 속에서도 버티는 것일 텐데요, 그런 점에서 그는 ‘은퇴 없는 건축’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건축은 결국 ‘사람의 이야기’를 담는 그릇입니다.
한 건물이 오래 살아남는 이유는 콘크리트의 강도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서 펼쳐지는 삶의 밀도 때문 아닐까요.
이 책을 읽으며 문득, 건축이 ESG와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환경과 공존하고, 사람을 배려하며, 시대의 책임을 다하는 건축.
그것이 바로 황두진이 말하는 '은퇴 없는 건축'의 진짜 의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레거시 플레이스: 은퇴 없는 건축>은 단순히 오래된 건물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우리는 어떤 공간에서 어떤 이야기를 남기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네요.
언젠가 우리 주변의 건물들도 누군가의 기억 속 ‘레거시 플레이스’로 남을 수 있을까요?
그 가능성을 꿈꾸게 만드는 이 책은, 건축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공간’과 ‘기억’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