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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까지 다섯 걸음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8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장강명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새 책이 나올 때마다 “이번엔 또 어떤 주제를 파고들었을까?” 하는 기대가 큽니다.
이미 작가님의 대표작으로는 사회파 추리소설인 <재수사>, 청년 세대의 불안과 현실을 담은 <한국이 싫어서>, 한국 사회의 계급과 구조를 파헤친 <당선, 합격, 계급>, 북한의 생생한 현실을 탈북자의 증언으로 그린 <팔과 다리의 가격>, 그리고 최근작 AI 시대의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인 <먼저 온 미래>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를 오가며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를 두고 스스로를 '월급사실주의 소설가, 단행본 저술업자, 문단차력사' 라고 소개한 대목은 참 유쾌합니다.
덕분에 독자들은 매번 다른 무대 위에서 작가님이 펼치는 차력쇼(?)를 즐기듯, 새로운 세계를 맛볼 수 있습니다.
이번 신작 <종말까지 다섯 걸음>은 20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부정, 절망, 타협, 수용, 사랑’이라는 다섯 단계로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종말을 맞이했을 때 밟게 되는 마음의 다섯 걸음을 문학적으로 풀어낸 셈이지요.
각 파트의 첫 작품은 모두 ‘소행성 충돌’이라는 동일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지만, 인물들의 반응은 각기 다릅니다.
어떤 이는 끝까지 부정을 고집하고, 어떤 이는 절망 속에 무너지고, 누군가는 작은 타협점을 찾아보려 하고, 또 다른 이는 담담히 받아들이며, 결국에는 사랑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각각의 극한 상황에서 펼쳐지는 인간들의 모습은 블랙코미디를 보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과연 내가 저 상황이라면 다섯 걸음 중 어디쯤 서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대목이지요.

표제작 외에도 단편집에는 개성 강한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백조로 변한 오빠를 위해 쐐기풀로 스웨터를 짓는 엘리제의 이야기는 전래 동화를 뒤집은 듯한 판타지적 매력이 있었습니다.
흥미로웠던 점은 동생의 관점이 아니라 오빠의 시선에서 쓰여졌다는 점입니다.
인간 세계의 갈등이나 다툼보다, 저 푸른 하늘을 훨훨 날며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읽고 나니 ‘나라도 그 자리에선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동화 속 희생과 구원이 아닌, 자유와 선택의 문제를 묻는 이야기로 읽히니 여운이 훨씬 길게 남았습니다.
‘은혜 갚은 까치’는 어린 시절 누구나 들어봤을 전래 동화를 변주했는데, 이번에는 까치의 은혜가 아니라 엄마를 잃은 자식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익숙한 이야기 틀에 낯선 감정을 끼워 넣으니 더 강렬하게 다가오더군요.
또 하나 재미있었던 이야기는 ‘뇌의 비아그라’라 불리는 약물이 등장하는 단편입니다.
사랑의 감정을 약물로 지속시킬 수 있다면, 그건 축복일까요, 아니면 인간 감정의 모독일까요?
읽으면서 웃음도 나고, 동시에 섬뜩한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특히 몇몇 작품은 분량만 보면 중편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이야기가 단단했습니다.
작가님 특유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발랄한 상상력이 버무려져 있어, 짧게 읽히지만 여운은 길게 남습니다.
이 책은 한 편 한 편 짧아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고, 동시에 내용은 기발해 머릿속이 환기되는 느낌을 줍니다.
‘종말’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작가님의 손을 거치니 오히려 상상하는 재미와 묘한 유머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물론 종말은 누구도 맞이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지만, 상상 속에서만큼은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지요.
아마도 독자분들도 책장을 덮고 나면, “나에게 종말이 온다면 나는 어떤 다섯 걸음을 걸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실 겁니다.
<종말까지 다섯 걸음>은 단순히 ‘세상의 끝’을 상상하는 책이 아니라, 종말이라는 사건을 통해 인간의 마음과 감정, 그리고 삶의 태도를 한 번쯤 생각하게 하는 단편집입니다.
무겁고 진지한 주제와 발랄하고 기발한 상상력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독자로 하여금 생각도 하고 웃음도 짓게 만듭니다.
끝으로, 작품의 재미와는 별개로 작가님의 아내분인 김새섬 대표님의 쾌유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장강명 작가님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우리 곁에서 빛나기를 바라면서, 이번 신작을 많은 분들께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