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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속의 산
레이 네일러 지음, 김항나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무더운 여름, 한 권의 책이 시원한 바닷바람을 선사했습니다.
레이 네일러의 데뷔작 <바닷속의 산>은 오랜만에 지적 갈증을 해소해준 작품입니다.
로커스 최우수 신인 소설상 수상과 네뷸러상, 아서 C. 클라크상 최종 후보에 오른 이력이 말해주듯, 이 신예 작가는 단숨에 SF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책의 중심축은 인간과 문어 간의 교감입니다.
하 박사가 문어의 언어를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을 지켜보며,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가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테드 창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그 영화처럼, 레이 네일러 역시 서로 다른 존재 간의 소통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룹니다.
흥미롭게도 책배에 그려진 신비로운 그림이 바로 문어의 언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반전은 작은 감동이었습니다.
문어와의 대화 장면들은 이 소설의 백미입니다.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지성체의 관점을 상상해보게 하는 대목들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문어와의 대화가 조금 더 길게 펼쳐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소설은 문어와 인간의 만남과 평행하게 몇 개의 이야기를 더 펼쳐놓습니다.
해커 러스템과 AI 시스템이 지배하는 어선에 잡혀간 에이코의 이야기, 그리고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 에브림과 하 박사의 관계가 그것입니다.
이 세 갈래의 이야기는 모두 '타자와의 관계'라는 하나의 주제로 수렴합니다.
인간과 문어, 인간과 안드로이드,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과 공감.
각각의 관계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소통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특히 역전된 권력관계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은 우리가 당연시해온 인간성의 개념을 재고하게 만듭니다.
<바닷속의 산>의 가장 큰 매력은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와 장르적 재미를 동시에 잡았다는 점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다루면서도 끝까지 흥미진진한 서사를 유지합니다.
SF라는 외피 안에 담긴 것은 의식과 소통, 공감과 이해에 대한 치밀한 탐구입니다.
작가는 미래적 설정을 통해 현재의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을 예리하게 조명합니다.
인공지능과의 공존, 환경 파괴, 그리고 타자에 대한 이해라는 시대적 과제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바닷속 세상으로의 여행을 원한다면 이 책을 권해 드립니다.
레이 네일러는 우리를 물리적인 바닷속뿐만 아니라 사유의 깊은 바다로도 안내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소통의 새로운 가능성과 인간성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테드 창의 계보를 잇는 차세대 SF 작가의 탄생을 목격하는 기쁨도 덤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