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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세계를 스칠 때 - 정바비 산문집
정바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여름이다. 날이 갈수록 열기는 더해지고 끈적거리며, 몸과 정신은 한 없이 늘어지는 그런 시기. 

호흡 긴 장편소설에 푹 빠져 시간 보내는 것도 좋지만 이번엔 에세이다. 비교적 호흡이 짧고 언제 어디서나 쉽게 '끊어 읽기' 신공이 가능하단 장점이 아주 매력적인.

살던 곳을 훌쩍 떠나 타지에서의 새로운 환경과 맞닥뜨린 이후 속내를 읊던 여행 에세이와는 또다른 맛이었다. 

 

엠피에 언니네 이발관과 가을방학의 노래 몇 곡을 두고 종종 들으면서도 저자인 정바비, 그에 대해선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뮤지션이고 글을 쓴다' 정도. 그리고선 읽기 시작.

 

읽고나서 처음으로 드는 생각은, 위트와 재치가 있다는 것.

굳이 꼽자면 '생일과 하이힐'이나 '불편의점의 점장이 되고 싶다'와 같은 부분이다. 분명 말하고 싶은 내용이 있는데, 글로 써내려면 이상하리만치 풀리지 않는 경험이 있을 거다. 이런 식으로, 비슷한 식의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센스 있게 말로 풀어내지 못하던 감성과 이성, 그 어딘가의 것들을 참 흥미롭게 '잘' 풀어냈다.

우리 대부분은 위트와 재치를 사랑하고, 보다 꾸밈 적은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는가. 이 짧지만 속마다 나름의 뼈 있는 여러개의 글들이 마음에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 중 '루비치 터치'를 두고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에른스트 루비치의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특유의 아우라를 뜻한단다.

혹자가 이를 두고 '겉은 바삭하지만 씹으면 보드랍고 달콤한 슈크림빵'에 비유했다는데, 읽다 무릎을 탁 칠 정도로 끝내주는 표현이었다. 그리고선 드는 생각이,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그의 글 또한 루비치 터치같은, 정바비식 터치가 존재하며 비슷한 느낌으로 저만의 아우라가 있다는 거다. 

돌직구처럼 느껴질 만큼 숨김 없지만 그 속에 고뇌 또한 존재하는 그의 문장들. 게다가 제 나름의 로맨틱도 존재하고.

그의 글들 또한 분명 '슈크림빵'과 닮아 있었다.

 

이 외에 가장 몰입도가 높았던 부분은 역시 이성, 사랑, 성과 같은 이야기를 다뤘던 부분이다.

이성간의 감정적 연계, 차이는 물론이고 섹슈얼한 방면에서 나름의 고찰까지 담겨 있다. 사람에 따라 '야한 이야기'로도 분류될 수 있는 이 솔직 담백한 구절들이 어찌 흥미롭지 않을 수 있을까. 개인적으론 이런 주제가 대화중 '금기'로 치부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툭 까놓고 아무때나 논할 수 있을 정도로 가볍지만도 않은지라 거침없는 그의 문장을 읽을 때 참 신선했다.

 

그의 글은 온전히 동감하지 못하고, 아닌 것 같은 때에도 묘하게 수긍하게끔 하는 힘이 있다. 흔히들 '말려든다'고 표현하기도 하는 식의 과정이 읽는 내내 몇 번이고 반복되는 것이다. 침 튀기며 열변을 토하진 않지만 스스럼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재주 또한 큰 매력이다. 

이 점들이 에세이의 (개인적으론) 최대 장점인 끊어 읽기 신공마저 무너뜨리고 줄기차게 읽게끔 한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그의 생각과 감성에 동의하는 건 그다지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저 이야기하고, 나는 듣는 척 읽었다. 굳이 상대와 동화되지 않아도 충분히, 아니면 적당히 즐길 수 있는 게 에세이를 읽는다는 행위의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적당한 온도와 제 특유의 속도로 쏟아지는 그의 생각과 말들은 '낯선 이와의 부담없는 진솔한 생각나눔'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 싶다.

 

읽는 내내 그와 한껏 대화한 기분으로 마무리했지만 조만간 다시 또 읽게 될 것 같다.

손 닿는대로 아무 장이나 펼치고 이번엔 '끊어 읽기' 신공 또한 잊지 않으며 천천히 다시 볼 생각이다.

여름 휴가로 여행할 지인들한테 추천해줘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방금 들었다. 

 

*그가 활동하는 그룹, 음악의 색깔을 기대하고 보기보단 그저 한 사람으로서의 '정바비'를 기대하고 보는 게 더 많은 만족과 재미를 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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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앤 위저드 1 - 어둠을 불태우는 불꽃 위치 앤 위저드 1
제임스 패터슨.가브리엘 샤보네트 지음, 최필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여느 또래들과 다름없이 평범하게 성장해오던 위스티와 위트. 그러던 어느 날 밤, 생각치도 못했던 재앙같은 사건들이 한꺼번에 몰아닥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밤중에 집안으로 들이닥친 군홧발을 한 사람들은 자유와 예술 등을 억압하는 신 체제 뉴 오더(N.O.)의 사람들로, 영문도 모르는 남매를 체제에 반한 범죄자로 지목하고 무작정 끌고 가려 한다. 뉴 오더 사람들과 끌려가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남매간의 몸싸움이 일어나다, 위스티가 자신도 모르는 새 몸에서 불길을 내뿜는 마법을 쓰게 된다. 꼼짝없이 마녀와 마법사로 몰린 남매는 결국 같은 처지의 수감자들이 갇혀 있는 교도소로 끌려가고 만다.

 '죄는 없고 처벌만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도 아이들의 절규를 들어주는 어른은 아무도 없는 현실.

 인권은 물론이고 최소한의 인간 대우조차 해주지 않는 지옥같은 교도소에서의 수감 생활은 위스티와 위트를 지치고 무력하게 만든다. 

 집에서 끌려나올 당시 부모님이 남매에게 주었던 북채와 서적에 대한 쓸모를 뒤늦게 발견한 아이들은 그 물건들을 통해 자신들에게 숨어있던 진정한 힘과 모습을 찾게 되고, 그 힘을 이용해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다. 그 성공엔 실종됐던 위트의 여자친구 실리아의 도움이 컸지만, 그녀는 이미 실체를 잃은 하프라이트(영혼)이 된 상황. 그녀의 죽음 또한 뉴 오더와 관련돼 있음을 안 위트와 위스티는 그들과 맞서 싸워야 함에 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후, 탈출에 성공한 남매는 오버월드(현실세계)를 넘어 언더월드-섀도랜드와 같이 영혼들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머무는 곳은 물론이요, 프리랜드와 아이들의 요새인 가펑클스 등을 넘나드는 여정을 하게 된다. 동시대의 공간이지만 전혀 알지도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헤쳐나가며 그 곳에서 만나는 주변인들과 영혼들, 커브, 길 잃은 자들 또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하며 조미료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여러 요소와 용어가 등장해 복잡할 법 하지만, 책 중간에 지도 삽화를 넣어 개념을 정리할 수 있게끔 한 부분은 독자에게 작지만 큰 배려같아 마음에 든다)

 같은 처지에 놓인 아이들을 만나 뉴 오더에 대항하고, 부모님을 되찾기 위해 다시금 위험전선으로 뛰어드는 부분이 1권 <어둠을 태우는 불꽃>의 하이트라이트인데, 역시 그 부분이 가장 스피디하게 읽히며 재미있다.

 하나의 사건을 뛰어넘은 후 위트와 위스티는 '굳이 그래야 하나' 라는 초기의 의문스러운 동기를 깨고 진정으로 자신들이 싸우고 저항해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게 된다.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기대되는 점 중의 하나도 바로 이 부분 때문이다. 이유도 모르고 어물쩡거리는 주인공보단, 확실한 목표를 두고 헤쳐나가는 주인공의 모험이 더 재밌고 몰입력이 뛰어나니 말이다.

 

 단순 줄거리 외의 점을 짚어보자면, 글의 서술 방식이 독특하다는 것. 글의 시점이 위스티와 위트, 두 사람을 오가며 서술되는데 개인적으로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글을 선호하지만, 보다 짧고 빠르게 전개되었던 이 이야기에선 이 방식도 나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각자의 위기에 처했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을 오가며 서술한 형식이 긴장감을 더 높이고 다음 전개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는 데에 큰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

또, 영어덜트 분야의 소설답게 글이 어렵지 않고 문장 호흡이 빨라 대체적으로 빠르게 읽히는 편이기도 하다. 때문에 수려하고 묘사가 세세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머리 아프지 않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라면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등장하는 뉴 오더는 가상의 것이지만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겉모습과 이름만 달리할 뿐이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서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마법, 마녀와 마법사 등 자칫하면 유치해질 수도 있는 소재에 독재 시대와 탄압이라는 배경 요소를 적절히 짜임새 있게 섞어 좋은 효과를 낸 것 같다. 연관 없을 법한 두 요소가 예상 외로 잘 어우러져 재미 면에서도 상당히 흥미롭기도 하고. 여러모로 시리즈물의 첫 스타트를 나쁘지 않게 끊었다는 평을 주고 싶다.

 

 위트와 위스티는 이제 겨우 자신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깨달았다. 앞으로 쏟아질 이야기에서 겨우 포문을 연 셈이다.

후에 이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혹독한 시대에서  어떻게 성장할지, 예언에 어떻게 맞서나갈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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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에, 당신 - 알츠하이머와 함께한 어느 노부부의 아름다운 마무리
올리비아 에임스 호블리젤 지음, 김정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9월
평점 :
품절


행복하고도 온화한 나날을 보내던 노부부, 올리비아와 홉. 삶이 늘 그렇듯이 두 사람의 앞날에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난다.
홉이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것이다. 이 병의 진단을 받은 후 홉과 올리비아는 슬픔과 절망을 밀어내고 최대한 담담하게 그것을 마주하며 이겨낼 다짐을 한다. 이렇게 홉의 알츠하이머 진단을 서문으로 시작한 이 책은, 이후 홉이 병을 앓고 삶의 마지막장을 정리했던 지난 6년 간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이다. 

같은 병으로 어머니를 잃었던 올리비아는 어머니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 모두가 병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터라 서로가 힘들어했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사랑하는 홉이 그와 같은 아픔과 상처는 겪지 않도록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진단을 받은 후에도 전과 같이 재치있고 유머러스하게 대처해나가는 그를 보며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의지하고 도움이 되고자 마음 먹는다. 두 사람의 마음가짐과 태도 때문인지 그래도 다른 케이스보다는 잘 풀려나갈 것 같던 이들의 앞날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먹구름이 드리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지적인 능력에 대한 애정이 깊은 홉은 학생들을 가르치며 언어유희도 즐기던 사람이다. 하지만 알츠하이머의 증상이 조금씩 나타나면서 늘 외우고 다니던 시나 구절이 떠오르지 않는다든지, 늘상 오가던 길에서 헤맨다든지 하는 '잊혀지고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경험'은 유쾌한 그마저도 힘들게 만든다.
점점 빛을 잃어가는 듯한 그를 보며 더불어 힘겨워하던 올리비아는 자신의 스승이자 친구인 티벳 승려 티티를 찾아가 이에 대한 조언을 받는다. 그러자 티티는 이 모든 것이 행복이자 축복이며 수련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 부분을 보면서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어 의문을 갖기도 했다. 과연 이 과정이 행복이자 축복인 걸까?
아직 삶의 아주 쓴맛이나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 라는 고민도 잠시 해봤다. 
삶의 끝자락을 접어가고 있는 홉과 그를 지켜보고 있는 올리비아에겐 티티의 조언이 힘이 된 모양이다. 

젊은 혈기와 젊은이들이 주도해 이끌어 나가는 요즘같은 시대에선 무언가를 끝맺는다는 일과 죽음에 대해 한 없이 부정적이고 생각하는 것조차 꺼려한다. 홉과 올리비아는 이 부분을 지적하며 끝이 마냥 나쁘기만한 것은 아니며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지나치게 부정적이기만 한 태도는 도움이 되지 않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분명히 얻는 바와 수련되는 것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티티의 조언과 두 사람의 생각이 비슷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며 삶과 예기치 않은 사건에 대해 보다 담담하게 이겨내는 이들에겐 필요한 태도 방식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이야기를 읽다보면 책 내용 중에 불교와 관련된 소재와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이 부분들이 읽는 독자로 하여금 불교적인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식의 강요나 강압적인 서술은 없다. 책 자체가 에세이, 두 사람이 겪었던 일을 담아놓은 것이라는 걸 떠올리면 된다. 홉과 올리비아가 명상과 수련을 해왔던 사람들이고 불교적인 측면에서 도움을 받았기에 그저 있는 그대로를 서술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불교를 믿지 않더라도 불편하지 않다. 알츠하이머라는 파도같은 고난 속에서 이런 방식으로, 이런 부분에서도 도움을 얻을 수 있고 이런 방향으로 견뎌낼 수도 있구나 하는 하나의 케이스를 보는 정도일 뿐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엔, 종교적인 부분이 그 자체로서 엄청난 마법같은 힘을 발휘해 두 사람에게 도움을 줬다기 보단(어쩌면 그 부분도 작용했을지 모르겠지만) 마음가짐과 정신적인 부분의 차이에서 오는 효과가 아니였을까 한다. 
엄청난 태풍이 불어오는 때에 항구에 정박중인 배를 묶어두지 않으면 거센 바람과 성난 파도에 밀려나 저 멀리 떠내려갈 것이다. 홉과 올리비아의 상황도 마찬가지. 지난 6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그들이 포기하거나 절망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에 휩쓸려 내려가지 않도록 두 사람이 의지하고 묶어두어야 할 것이 필요했을텐데, 그 밧줄과 말뚝같은 것이 바로 불교의 교리와 명상, 수련 같은 것이 아니였을까.
정신적, 심적으로 그들이 힘을 얻을 수 있는 믿음과 같은 것들이 존재했기에 그들이 중도포기하지 않고 삶의 마지막장이 자연스럽게 그 스스로 덮일 때까지 버텨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수월하게 2년을 보낸 후, 본격적으로 병의 증세가 보이기 시작한 4년간의 시간은 홉과 올리비아 모두에게 큰 고난과 위기의 시간이였다. 하지만 넘어져 다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낙담하진 않았고, 잠시 슬퍼하더라도 다시금 웃으며 그저 이 모든 것이 자연스레 흘러갈 수 있도록 오늘을 살았다. 

"삶의 모든 것이 질서 잡힌, 오늘은 죽기 좋은 날."

추수감사절을 하루 앞둔 올리비아는 원주민들이 썼다는 이 말을 조용히 되뇌인다. 힘들었지만 어느 새 하나 둘 정돈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슬픔과 끝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고 그를 통해 수련하고 행복과 축복을 얻을 수도 있다는 그녀의 마음이 느껴지는 부분이였다.
날이 제법 쌀쌀하던 가을의 어느 날, 홉은 6년의 시간 동안 그가 최대한 담담히, 유쾌하게 가고자 했던 곳을 지나쳐 삶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와 있었던 시간들과 그의 의연하고도 강했던 대처 방식을 떠올리며 올리비아는 책을 쓰기로 다짐한다.
그 결과, 바다 건너 멀리에 있는 우리도 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된 거다.

참 이상하게도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나의 할머니가 생각났다.
그녀는 홉과 마찬가지로 알츠하이머를 진단받고 삶의 한자락을 걷고 있는 중이다.
나는 치매, 그러니까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두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잊고', '바보가 되어가는' 과 같이 표현하고 싶지 않다. 많이는 아니지만 짧게나마 지켜본 결과 이 병은 인간 본연의 그 무언가, 그 사람의 중요한 본질 한두가지 만을 남겨놓고 모든 걸 씻어내려가는 과정과도 같았다.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평생을 해온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는 병을 앓는 그녀에게서 어쩌면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보다 더한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온갖 것들로 점철되어 어지럽게 살고 있는 우리가, 그저 하나 둘 정리해나가고 있을 뿐인 그녀에게 안타깝다고 말할 처지가 되는 걸까 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물론 병을 앓는 것이 이 책에서 나오는 티티의 조언처럼 행복이고 수련의 기회가 될 거라는 것에 온전히 이해하는 바는 아니지만, 세상이 끝나고 모든 불행이 우리에게 온 것처럼 울고 있지만은 않고 싶다는 의미이다.
흘러가는 대로 두고 그 안에서 부지런히 발을 구르며 유영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이 책은 다행히도 비슷한 류의 가르침을 주었다.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날지라도 너무 낙담하지 말고 그 안에서 최대한 담담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것. (그게 올리비아에게는 묵묵히 홉의 곁을 지키고, 홉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마지막장을 평생 그가 해왔던 것처럼 재치있고 유머러스하게 마무리하는 일이였을 것이다) 책을 읽고나니, 누군가와 나란히 마주하고 앉아 차 한잔 하며 그 분의 이야기를 듣고 난 것 같은 기분이다. 부담스럽지 않고 묵묵히 들으며 가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살다보면 꼭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한번쯤은 들어두어도 좋을만한 이야기들이 있지 않은가. 마음에 드는 이야기인지라 많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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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와 미카의 비밀 시크릿 시리즈
제시카 소런슨 지음, 정미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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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 전 그날 밤, 자신이 알던 모든 이들을 두고 도망치듯이 고향을 떠났던 엘라. 그간 모두와 연락을 끊고 지낸 것은 물론이요, 본래 자신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청순하고 여성스러운 외모로 치장하며 지내고 있다. 외모 뿐만이 아니라 열정적이고 불같던 내면적인 모습마저 꼭꼭 숨긴 채로. 그러던 와중에 여름 방학을 맞게 된 엘라는 룸메이트인 라일라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고, 그간 그녀 스스로가 외면해왔던 모든 것들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엘라 자신의 가장 친한 베스트 프렌드이자 이제는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미카. 엘라가 사라졌던 8개월간 미치도록 괴로워하며 그녀를 찾아다녔던 그 또한 엘라를 그저 친구의 감정만으로 보진 않는다. 두 사람 사이에서 피어난 새로운 감정은 꽤나 오래된 것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부담이 될까봐, 혹은 다른 이유로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15년에 가까운 오랜 시간 동안 서로에게 최고의 친구이자 안식처였던 두 사람은 각자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엘라는 과거 자신의 실수로 인해 엄마가 죽게 되었다는 죄책감과 알콜중독인 아버지, 그리고 이런 집과 가족에 질려 벗어나려고만 드는 오빠로 인해 늘 무거운 마음의 짐에 짓눌려 산다. 

늘 자신만만하고 웃음 넘치는 미카 또한 마음 속에 상처와 외로움이 가득하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아도 어린 시절 자신과 어머니를 떠난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미카. 6살 꼬마가 성인이 다되어 만난 아버지는 너무나도 정상적으로 새로운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잘 지낸다는 사실에 상처를 받는다. 게다가 자신이 그동안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것과는 달리 아버지가 자신에게 갖는 감정은 그리 따뜻하지도, 무게 있지도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다시 한번 마음앓이를 한다.

 

과거의 아픔을 제대로 치유하거나 대응하지 못한 상태에서 성장의 시기를 맞은 두 사람은 내적으로 전쟁과 같은 괴로움과 시련을 겪는다.

우정을 넘어선 그 무엇, 그러니까 흔히들 말하는 우정에서 발전한 사랑만으로도 복잡한데 외면해왔던 트라우마와 상처까지 동시에 그들을 찾아온 격이니 그럴 만도 하다. "엘라와 미카의 비밀"은 바로 이 두 사람이 여름 동안 겪고 마주하게 되는 것들과 그로인해 그들이 변모하고 성장해가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남녀 주인공인 엘라와 미카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긴 하지만 그 외의 많은 인물들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인물들 모두 어두운 부분과 슬픔을 지니고 있다. 겉으로 별 문제 없어보이는 부잣집 딸 라일라까지도 그렇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참 마음에 들었다. 마냥 행복하거나 밝지만은 않은, 사람과 삶에 대해 있는 그대로 표현한 느낌이 들어서. 이런 부분이 이 소설이 그저 로맨스 소설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 트라우마와 내면적 상처를 이겨내고 성장해가는 내용을 담은 성장소설이라는 정체성 또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미카와 엘라는 서로의 보살핌과 애정 속에서 성장하고 치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떠한 문제 앞에선 엘라와 비슷한 대응방식을 보였던 나로선 마음을 건들이는 부분이 많았다. 두렵다고 해서 외면하거나 도망치는 행동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상대에게 솔직하고 자신도 이미 알고있는 아픈 진실도 때로는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성장하고 성숙해진다는 것이 괴롭지만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가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읽는 내내 뉴어덜트 소설이라는 장르에 잘 부합하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월하게 잘 읽히는 문장들과 아주 무겁지도, 그렇다고 아주 가볍지도 않은 적당한 무게감으로 내용 전개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점수를 주고 싶다. 무게감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다보면 읽는 독자로 하여금 버겁게 느끼거나 흥미가 생기지 않아 놓아버리기 쉬운데 적어도 이 책은 그렇진 않다. 독자의 집중력을 무난히 잘 끌고가는 재미요소와 힘을 가졌다. 

한가지 더 장점이자 독특한 점을 꼽자면, 이 책은 우리가 쉽게 접하는 소설의 형식과는 달리 엘라와 미카 두 사람의 시점을 오고가며 서술한다는 점이다. 엘라와 미카의 시점을 자연스레 오고가며 두 사람의 생각과 심리상태를 번갈아가며 독자에게 보여주는 셈인데 이 부분이 참 매력적이다. 이런 전개방식 덕분에 청춘남녀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속내를 속속들이 관찰하는 듯한 재미 또한 느낄 수 있다. 

 엘라와 미카의 비밀이 단권이 아니고 3부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후에 어떤 이야기를 할 지 궁금하다. 엘라와 아버지, 그리고 오빠와의 관계도 남아있고 에단과 라일라의 이야기를 더 할 수도 있을 거다. 라일라와 엘라 사이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 또한 기대해 볼만한 부분이고.

시리즈 2권인 'the forever of ella and micha'의 출간소식을 기대하고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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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에 포위된 아이들 - 내 아이를 위협하는 나쁜 기업에 관한 보고서
조엘 바칸 지음, 이창신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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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점 진열대에 놓인 수 많은 책들 중에서 어떠한 책이 독자의 시선을 잡는 첫 요인은 아무래도 책의 디자인과 제목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제목부터 상당히 경쟁적이고 인상적이여서 내 시선을 잡기 충분했다.
사실 소설과 에세이만 주로 읽는 내게 이런 분야의 책은 소위 '각 잡고' 봐야 되는 책들 중 하나였다. 주로 읽던 분야의 책이 아닌 것을 접하기는 참으로 오랜만인지라 첫장을 넘기면서 긴장한 건 사실이지만 읽고 난 후의 감상을 먼저 얘기하자면 '이런 수준의, 이런 이야기라면 언제든지 괜찮아'가 될 거 같다. 머릿속 복잡해지는 어려운 전문용어를 남발하거나 한 줄로 충분한 이야기를 괜히 몇 줄로 배배 꼬아놓은 류의 책은 분명히 아니다. 게다가 원하는 이야기를 보다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책의 뒷부분엔 ㄱ,ㄴ순으로 찾아보기와 주석이 있어 상당히 친절한 책이니, 부담덜고 읽어도 좋겠다라는 이야기도 덧붙여 적어두고 싶다. 
작가가 털어놓은 어린 시절의 추억부터 시작한 이야기는 제목인 '기업에 포위된 아이들'에 딱 맞아 떨어지는 요즘의 세태를 설명하기 위해 내용을 여러 항목으로 나누고, 항목에 맞게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는 물론 독자인 우리도 알고 있는친근한 예시들을 들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풀어나가고 있다. 
실로 이 책을 읽으면서 고개를 자주 끄덕였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내용이 나 또한 겪었던 일이고 무수히 공감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어린 시절 간섭과 관심을 두는 부모님을 두고 내심 그들을 잔소리꾼에 과잉보호를 하는 촌스러운 사람이라며 질색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거다. 하지만 참 재밌게도 그와 동시에 부모님이 우리에게 간섭과 관심을 넘나드는 그 특유의 애정을 보여주지 않으면 불쑥 고개드는 서운함 또한 모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가 겪어 알고 있듯이, 아이들이 어른들의 애정과 보호에 질색하는 표정을 지어도 아이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 보살핌을 원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사실만으로도 어른이 되어가고 있거나 어른이 된 우리가 이 이야기와 접해야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전에 인터넷을 하던 와중에 이런 내용의 게시물을 본 적이 있다.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간 환자에게 처방하는 약의 정도에 따른 국가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이야기였는데 결과는 상당히 충격적이였다. 다른 나라에서는 환자에게 간단히 한 두알의 약을 처방하거나 그마저도 굳이 필요하지 
않다며 집에서 충분히 쉴 것을 권장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휴식을 취한 뒤에 나을 법한 경미한 감기에도 꽤 많은 양의 약을 처방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였던 챕터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겨우 18개월된 아이가 확실치 않은 진단과 과다 처방한 약에 의해 되려 더한 이상작용을 보였다가 약을 멀리하자 밝고 건강한 아이로 돌아오는가 하면, 4살의 어린 아이가 과다복용한 약에 의해 사망하는 일 또한 발생하고 만다.(이 아이의 경우에는 부모의 무관심과 방치또한 큰 작용을 했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쉽게 남용되는 약과 과한 처방 때문에 어른들인 우리 뿐만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마저 대단히 위험한 현실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정도를 넘어선 자본주의와 이익을 따라가는 현 세태는 의약, 의료 시장 뿐만이 아니라 아이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티비며, 게임 심지어 교육 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기업에 포위된 아이들'은 이와 관련된 사례를 소개하여 읽는 독자로 하여금 이 현실이 결코 사회 일부분의 현상만은 아니라는 것을 깊게 각인시켜 주는 역할 또한 잊지 않는다.  
책의 첫 챕터가 시작하기 전에 쓰여있는 문장이다. 

"사회가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만큼 그 사회의 정신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없다." - 넬슨 만델라

읽기 전엔 시선을 집중시키고, 다 읽은 후엔 마음에 긴 여운을 남긴 문구. 이 한 문장만으로도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지 않는가.
뉴스와 신문을 보며 혀를 끌끌 차는 세상이다. 넬슨 만델라의 말대로라면 그 누가 봐도 지금 시대는 건강하지 못하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을 가더라도 100퍼센트의 안전과 행복이 존재하는 곳은 없을 테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오늘날의 많은 일들이 속상하고 가슴 아프다. 특히나 유약하고 여려 어른들의 보호가 절실히 필요한 아이들과 관련된 이야기는 더더욱 그렇다. 
이 책은 무뎌진 보호자들, 그러니까 부모와 부모가 아닌 우리 시대 모든 어른들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누구나 수월하게 부담없이 읽을 법한 수준의 책이여서 가족들에게도 권할 생각이다. 내 글을 읽은 다른 독자들은 물론이고 많은 어른들이
접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평을 마치고자 한다.
무뎌진 어른들이 빛나는 시선으로 아이들을 보고, 간섭과 관심을 넘나드는 독특한 애정을 발하며 사회 정신이 건강한 시대가 도래하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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