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에, 당신 - 알츠하이머와 함께한 어느 노부부의 아름다운 마무리
올리비아 에임스 호블리젤 지음, 김정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9월
평점 :
품절


행복하고도 온화한 나날을 보내던 노부부, 올리비아와 홉. 삶이 늘 그렇듯이 두 사람의 앞날에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난다.
홉이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것이다. 이 병의 진단을 받은 후 홉과 올리비아는 슬픔과 절망을 밀어내고 최대한 담담하게 그것을 마주하며 이겨낼 다짐을 한다. 이렇게 홉의 알츠하이머 진단을 서문으로 시작한 이 책은, 이후 홉이 병을 앓고 삶의 마지막장을 정리했던 지난 6년 간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이다. 

같은 병으로 어머니를 잃었던 올리비아는 어머니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 모두가 병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터라 서로가 힘들어했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사랑하는 홉이 그와 같은 아픔과 상처는 겪지 않도록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진단을 받은 후에도 전과 같이 재치있고 유머러스하게 대처해나가는 그를 보며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의지하고 도움이 되고자 마음 먹는다. 두 사람의 마음가짐과 태도 때문인지 그래도 다른 케이스보다는 잘 풀려나갈 것 같던 이들의 앞날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먹구름이 드리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지적인 능력에 대한 애정이 깊은 홉은 학생들을 가르치며 언어유희도 즐기던 사람이다. 하지만 알츠하이머의 증상이 조금씩 나타나면서 늘 외우고 다니던 시나 구절이 떠오르지 않는다든지, 늘상 오가던 길에서 헤맨다든지 하는 '잊혀지고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경험'은 유쾌한 그마저도 힘들게 만든다.
점점 빛을 잃어가는 듯한 그를 보며 더불어 힘겨워하던 올리비아는 자신의 스승이자 친구인 티벳 승려 티티를 찾아가 이에 대한 조언을 받는다. 그러자 티티는 이 모든 것이 행복이자 축복이며 수련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 부분을 보면서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어 의문을 갖기도 했다. 과연 이 과정이 행복이자 축복인 걸까?
아직 삶의 아주 쓴맛이나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 라는 고민도 잠시 해봤다. 
삶의 끝자락을 접어가고 있는 홉과 그를 지켜보고 있는 올리비아에겐 티티의 조언이 힘이 된 모양이다. 

젊은 혈기와 젊은이들이 주도해 이끌어 나가는 요즘같은 시대에선 무언가를 끝맺는다는 일과 죽음에 대해 한 없이 부정적이고 생각하는 것조차 꺼려한다. 홉과 올리비아는 이 부분을 지적하며 끝이 마냥 나쁘기만한 것은 아니며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지나치게 부정적이기만 한 태도는 도움이 되지 않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분명히 얻는 바와 수련되는 것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티티의 조언과 두 사람의 생각이 비슷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며 삶과 예기치 않은 사건에 대해 보다 담담하게 이겨내는 이들에겐 필요한 태도 방식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이야기를 읽다보면 책 내용 중에 불교와 관련된 소재와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이 부분들이 읽는 독자로 하여금 불교적인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식의 강요나 강압적인 서술은 없다. 책 자체가 에세이, 두 사람이 겪었던 일을 담아놓은 것이라는 걸 떠올리면 된다. 홉과 올리비아가 명상과 수련을 해왔던 사람들이고 불교적인 측면에서 도움을 받았기에 그저 있는 그대로를 서술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불교를 믿지 않더라도 불편하지 않다. 알츠하이머라는 파도같은 고난 속에서 이런 방식으로, 이런 부분에서도 도움을 얻을 수 있고 이런 방향으로 견뎌낼 수도 있구나 하는 하나의 케이스를 보는 정도일 뿐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엔, 종교적인 부분이 그 자체로서 엄청난 마법같은 힘을 발휘해 두 사람에게 도움을 줬다기 보단(어쩌면 그 부분도 작용했을지 모르겠지만) 마음가짐과 정신적인 부분의 차이에서 오는 효과가 아니였을까 한다. 
엄청난 태풍이 불어오는 때에 항구에 정박중인 배를 묶어두지 않으면 거센 바람과 성난 파도에 밀려나 저 멀리 떠내려갈 것이다. 홉과 올리비아의 상황도 마찬가지. 지난 6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그들이 포기하거나 절망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에 휩쓸려 내려가지 않도록 두 사람이 의지하고 묶어두어야 할 것이 필요했을텐데, 그 밧줄과 말뚝같은 것이 바로 불교의 교리와 명상, 수련 같은 것이 아니였을까.
정신적, 심적으로 그들이 힘을 얻을 수 있는 믿음과 같은 것들이 존재했기에 그들이 중도포기하지 않고 삶의 마지막장이 자연스럽게 그 스스로 덮일 때까지 버텨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수월하게 2년을 보낸 후, 본격적으로 병의 증세가 보이기 시작한 4년간의 시간은 홉과 올리비아 모두에게 큰 고난과 위기의 시간이였다. 하지만 넘어져 다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낙담하진 않았고, 잠시 슬퍼하더라도 다시금 웃으며 그저 이 모든 것이 자연스레 흘러갈 수 있도록 오늘을 살았다. 

"삶의 모든 것이 질서 잡힌, 오늘은 죽기 좋은 날."

추수감사절을 하루 앞둔 올리비아는 원주민들이 썼다는 이 말을 조용히 되뇌인다. 힘들었지만 어느 새 하나 둘 정돈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슬픔과 끝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고 그를 통해 수련하고 행복과 축복을 얻을 수도 있다는 그녀의 마음이 느껴지는 부분이였다.
날이 제법 쌀쌀하던 가을의 어느 날, 홉은 6년의 시간 동안 그가 최대한 담담히, 유쾌하게 가고자 했던 곳을 지나쳐 삶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와 있었던 시간들과 그의 의연하고도 강했던 대처 방식을 떠올리며 올리비아는 책을 쓰기로 다짐한다.
그 결과, 바다 건너 멀리에 있는 우리도 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된 거다.

참 이상하게도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나의 할머니가 생각났다.
그녀는 홉과 마찬가지로 알츠하이머를 진단받고 삶의 한자락을 걷고 있는 중이다.
나는 치매, 그러니까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두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잊고', '바보가 되어가는' 과 같이 표현하고 싶지 않다. 많이는 아니지만 짧게나마 지켜본 결과 이 병은 인간 본연의 그 무언가, 그 사람의 중요한 본질 한두가지 만을 남겨놓고 모든 걸 씻어내려가는 과정과도 같았다.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평생을 해온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는 병을 앓는 그녀에게서 어쩌면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보다 더한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온갖 것들로 점철되어 어지럽게 살고 있는 우리가, 그저 하나 둘 정리해나가고 있을 뿐인 그녀에게 안타깝다고 말할 처지가 되는 걸까 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물론 병을 앓는 것이 이 책에서 나오는 티티의 조언처럼 행복이고 수련의 기회가 될 거라는 것에 온전히 이해하는 바는 아니지만, 세상이 끝나고 모든 불행이 우리에게 온 것처럼 울고 있지만은 않고 싶다는 의미이다.
흘러가는 대로 두고 그 안에서 부지런히 발을 구르며 유영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이 책은 다행히도 비슷한 류의 가르침을 주었다.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날지라도 너무 낙담하지 말고 그 안에서 최대한 담담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것. (그게 올리비아에게는 묵묵히 홉의 곁을 지키고, 홉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마지막장을 평생 그가 해왔던 것처럼 재치있고 유머러스하게 마무리하는 일이였을 것이다) 책을 읽고나니, 누군가와 나란히 마주하고 앉아 차 한잔 하며 그 분의 이야기를 듣고 난 것 같은 기분이다. 부담스럽지 않고 묵묵히 들으며 가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살다보면 꼭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한번쯤은 들어두어도 좋을만한 이야기들이 있지 않은가. 마음에 드는 이야기인지라 많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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