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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하일지 지음 / 민음사 / 2012년 9월
평점 :
<경마장 가는 길>이라는 소설로 유명한 하일지 작가이다. 잘 모르고 제목만 들어본 소설이었는데, 작가의 작품 중 '경마장'을 제목에 넣은 작품이 5개나 된다. 경마장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나 사연이 있나? 경마장의 분위기에서 작가만의 특별한 것을 찾아내는 것인가.. 하고 처음엔 궁금했는데 왠지 이 책을 다 읽어본 후엔 경마장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알 것만 같았다. 이 작품으로 추측건대, 작가는 풍자와 해학에 일가견이 있는데 아마도 그는 경마장에서 말에 돈을 걸고 웃고 울고, 서로 계략에 빠뜨리고 음모에 빠지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우스웠지 않았나 싶다. 그런 것을 경마장이라는 장소가 잘 보여주고 있으리라.
이 책은 시골의 한 작은 마을에 중절모를 쓴 이름모를 중년의 신사가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폐결핵에 걸려 마을 앞 어귀 나무 아래에서 사람들을 구경하며 몰래 지렁이를 잡아 입에 넣어먹는 허도라는 인물은 신사를 처음 본 사람이다. 그가 참 이상하게도 자신의 누이인 허순을 찾고 있는 것을 알고 얼떨결에 그를 누이의 집으로 데려가게 되는 인물이다. 이 인물은 가족인 누이 허순, 그리고 형인 허표, 그의 아내, 허순의 자식들에게까지 업신여김 받으며 곧 죽어갈 병자 취급을 받지만 양심이 살아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그가 허순을 찾아온 이유는 서울에서 학생들과 함께 춤 경연대회에 참가했던 인연으로였다. 그 수많은 참가자들 중에 유독 그녀가 그의 눈에 들어왔던 것은 무엇일까? 이유가 어찌됐건 그는 산골마을까지 그녀를 찾아왔고, 그녀의 남편과 다섯명의 여학생들과도 반갑게 재회하게 된다. 발렌타인 30년산이라는 비싼 술을 선물로 사온 그는 슈 아저씨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사람으로 거듭난다. 영어를 한다는 것과 돈이 많다는 것으로 그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 소녀들을 보며 과거 미군부대 사람들을 동경했던 한국의 처자들이 생각났다. 그가 한국말을 잘 했다면 이렇게 동경하진 않았을텐데 말이다.
글을 읽는 내내 그가 무슨 목적으로 찾아왔을까? 라는 상상을 했다. 그는 사람들이 처음엔 미안하게 그리고 결국 치욕스러울 정도로 금전을 요구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다 좋다고 말했고, 개고기며 마트에서 맥주며 호텔 스위트룸이며 다 계산해주었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도둑질을 하려던 허순의 아들은 '없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절박함을 느끼게 했고, 허순의 남편은 그에게 자격지심을 느끼면서도 그에게 어떻게든 뜯어내고자 사기를 치려고까지 한다. 처음엔 반가운 손님이었을 뿐인 그 사람이 어느새 '너 같이 잘나고 돈 많은 놈은 어디 한 번 혼 좀 나봐라'라는 마녀사냥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으로 흘러간다. 점점 드러나는 사람들의 본성이 무서웠고, 그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는 채령이와 허도의 행동이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사람은 많이 가지지 않았다고 자신의 긍지를 지킬 수 없지 않다. 폐결핵에 걸려 아무도 상대를 안 해줘서 혼자 지렁이를 파 먹으며 노는 '다 죽어가는' 허도도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았다. 어쨌건 허순은 돈은 적게 벌 지언정 학교의 무용선생님이었고, 그녀의 남편도 택시 운전을 할 지언정 굶을 지경의 사람은 아니었다. 부유하지 않지만 일상을 살아가던 평범한 그들이 많은 재물 앞에서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 재물을 이 사람이 왜 쓰는지도 궁금해하지 않는 그들의 변해가는 태도가 사람의 가장 추악한 면, 바닥까지 들여다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