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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심 - 상 - 파리의 조선 궁녀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김탁환의 역사 소설은 진짜 같다.
연구를 열심히 해서 쓰시니 그런 것일 테지만,
역사적으로 실재했는지를 알 수 없는 사건도 그가 쓴 것은 진짜일 것 같다.
심지어, '부여현감 귀신 체포기'도 진짜일것 같다.
어쨌건,
이번에 읽은건, '역사에 걷어차인' 여자,
파리의 조선 궁녀, 리심.
야소교도 어미가 야반도주한 지방의 동기(童妓)에서,
국왕에게 사랑받는 아름다운 궁녀로,
프랑스 공사와 결혼하여 양이복을 입고 조선을 떠나, 처음으로 유럽에 간 조선 여자로,
파리에선 인종차별에 상처받은 황인종으로,
사하라에선 아픔을 넘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진 '깨인 여자'로,
하지만, 돌아온 조선에선 역사의 여울에 휘말려, 춤을 추다 자살하게 된 불행한 무희로.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녀는 총명했고, 재능도 있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이 정도라면 당시 현실에서 약간의 제약은 있었을지언정 크게 성공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급격하게 흘러가는 역사에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다 결국 죽었다.
아마 리심이 프랑스로 가지 않고 조선에 남아있었다고 해도 행복해지지는 못했을 것 같다.
리심은 마치 '조선' 같다.
팽창하는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이리 저리 차이다가 멸망한 조선.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배우려고 노력하고, 변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한.
리심이 그 재능과 미모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죽어야만 했던 것처럼,
조선도 아무리 노력을 했다해도 열강에 눌려 멸망했을 것 같다.
사람을 믿는 것은 리심의 병이었다. 그녀에게 깊이 패인 흉터만 남기는, 무시무시한 병.
엄마는 날 버리지 않을거라고 믿었지만 그렇지 않았고,
빅토르 콜랭이 자신을 사랑해서 법적으로 혼인했다고 믿었지만 그렇지 않았고,
쥘리에트가 낯선 황인종인 자신에게 기댈 수 있는 좋은 친구가 됐다고 믿었지만 그렇지 않았고,
약방 동기인 영은과 지월은 진심으로 자길 생각해 준다고 믿었지만 그렇지 않았고,
동병상련을 느꼈던 홍종우도 가족같이 여겼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리심을 죽음으로 밀어낸 것은 저 쌓이고 쌓인 배신이었을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을 믿은 병.
그녀를 끝내 배신하지 않은 사람은 죽은 사람 뿐이니.
빅토르 콜랭은 왜 리심과의 서류 관계를 분명히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녀가 상처받을 일도, 자살할 일도 없었을텐데.
고종이 그녀를 납치해서 자신과의 거래를 하려했을때 정식으로 찾아올 수 있지 않았겠는가.
고종은 왜 또 하필이면 프랑스 공사인 빅토르 콜랭의 힘을 얻으려고 했을까.
그렇지 않았으면 리심을 납치할 일도 없었을 텐데.
리심은 나라'만' 생각한 남자들한테도 걷어차인것 같다.
안쓰럽다는 말도 못할 정도로 불쌍하긴 하다.
역사의 물살에서 그녀를 건질 수 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나.
애초에 어머니가 야소교를 믿지 않았다면,
아니, 약방 기생만 되지 않았어도,
아니, 고종과 빅토르 콜랭의 눈에만 띄지 않았어도,
아니, 프랑스로 가지만 않았어도,
아니, 조선으로 돌아오지만 않았어도,
아니, 아니, 아니, 그녀가 그렇게 총명하고 아름답지만 않았어도......................
2007.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