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선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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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의 두께에서 보듯이 아주 길고 긴 이야기다. 이 책의 주인공 닉 게스트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영문학을 전공,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박사과정에 진학한 20대 젊은 청년으로, 그는 옥스퍼드에서 만난 상류층 자제 토비 페든과 친구로 지내다 그의 권유로 그의 가족이 사는 저택에 임시로 머물게 된다. 전도유망한 하원의원인 토비의 아버지 제럴드 페든과 그의 아내 레이철, 그리고 조울증을 겪고 있는 토비의 여동생 캐서린까지. 그렇게 함께 지내는 동안 여러 상류층 사교모임과 파티에 참석하며 그들만의 세계로 조금씩 융화되어 간다. 가족처럼 지내다가도 어느 선에 있어선 결코 가족으로 인정될 수는 없는 거리감을 느끼며 언젠가는 깨질지도 모를 지금의 위치에 불안을 느끼기도 하며 그들의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처음으로 사귀게 된 연인 리오와 두 번째 연인인 대재벌 아들 와니와 함께 닉의 사랑은 더 짙어지고, 술과 마약, 섹스가 주는 쾌락과 부와 권력이 주는 상류계층의 재미를 한껏 누리며 그것이 주는 아름다움과 세련됨에 점차 매혹돼간다. 그러다 후반부에 나오는 제럴드의 또 다른 모습과 연이어 터지는 스캔들, 그리고 동성애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이 낱낱이 공개되며 또 다른 스캔들 속에서 이용당하고 비난받는 그의 모습은 이 모든 이야기를 긴장과 경악의 절정에 다다르게 한다. 그나마 자신을 조금이나마 변호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던 페든 가족마저 그를 외면하고 비난하면서 닉은 그들의 참모습을 차갑게 깨달으며 경멸과 환멸을 느낀다.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외면하고자 했던 한 사건은 그렇게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많은 관계를 무너뜨렸고, 거리에 홀로 남은 닉의 모습으로 이 이야기는 쓸쓸하게 끝을 맺는다. ​​

 

진실을 털어놓고 싶은 욕구와 주변 상황에 맞춰 비밀로 부쳐야 하는 의무 사이에 갈등하던 닉과 친구로서 믿고 의지하며 자신의 약한 모습까지 다 보여주었지만 결국 상실감과 배신감에 힘들어했던 토비. 혼자만 관여된 비밀이 아니었기에 쉽사리 친구에게 터놓지 못했던 닉의 마음도, 진정한 우정으로 대했지만 결국엔 자신만 아무 것도 모른 채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야 했던 토미의 입장도 다 공감이 돼서 그들 모두 안타깝게 느껴졌다.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다는 데 사람들이 무척 감정을 상할 수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사실 비밀은 그런 사적인 문제가 아니야. 누구한테 말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누구한테든 말할 수 없는 성격의 진실이라는 거지.” (629p)

 

인물들의 표정, 행동, 심리묘사가 정말 탁월한 소설이다. 말 한마디, 몸짓 하나만으로도 그들의 개성과 성격이 자연스레 묻어나와 이렇게 긴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많은 감정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닉의 시선으로 상대를 관찰하는 재미도 있었다. 일상속에 내재되어 있던 대처수상 집권 당시의 시대상황 또한 이 책의 분위기를 한껏 더 진지하게 만들어주었다.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건 내게 배경지식이 더 두터웠더라면하는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이 책엔 음악과 미술에 대한 얘기는 물론 사회, 경제, 정치, 역사, 건축, 문학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에 있어 다양한 지식들이 등장인물들의 대화나 장면서술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데, 그때마다 , 내가 이걸 알고 있었더라면 좀 더 이 분위기를 잘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들어 음악을 찾아 듣기도 하고 포털 사이트 검색도 해가며 부족한 지식을 급히 채워가며 읽었다. (작가 앨런 홀링허스트의 일생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니 작가의 다양한 배경지식과 함께 이 책의 매력적인 서사와 묘사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한 편의 긴 영화를 본 것도 같다. 많은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졌고 그들이 대화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많은 이들이 떠나간 지금, 닉은 어디에 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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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적성에 안 맞는걸요 - 마음 아픈 사람들을 찾아 나선 ‘행키’의 마음 일기
임재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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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아프면 병원에 간다. 조금이라도 평소와 다른 이상징후를 느끼면 바로 병원에 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최대한 참는 데까지 참다가 마지막 수단으로 병원을 찾는 이들도 있다. 어찌됐든 병원이 우리가 아플 때 찾는 곳이라는 점에 있어선 이견이 없다.

 

빠르게 발전하는 요즘 시대에는 아픈 사람들도 많다. 몸이 아픈 사람들도 많지만 마음에 병든 사람들도 많다. 몸이 아픈 사람들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게 되지만, 마음에 병든 사람들은 쉬이 병원을 찾지 않는다. ‘정신과라는 말에 바로 거리감을 느끼고 거부감이 들기 때문이다. 나 또한 몇 번의 개인적인 일들을 겪으며 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고 여러 이유로 힘들어했지만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늘 그랬듯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믿었고, 현실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데 몇 번의 상담으로 지금의 감정들이 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 이 책의 저자는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해주는 정신과 의사다. 보통 정신과 의사들과 다른 게 있다면 이 분은 병원 안이 아닌 병원 밖으로 나와 거리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해준다는 점이다. 정신과에 대한 심적 문턱을 조금이나마 낮추기 위해 자신의 사비를 들여 찾아가는 고민 상담소라는 이름을 단 상담 트럭을 만들었고, 초기의 날카롭고 비판적인 세상의 시선을 꿋꿋이 이겨내며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다. 그 결과 거리에서 만난 많은 이들이 세상을 다시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얻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진심으로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상대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상대방의 입장을 다 안다는 착각에 빠져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상대가 느끼는 감정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겪은 경험들과 갖고 있는 지식만으로 상대에게 섣불리 충고하려 든다면 마음의 주파수는 걷잡을 수 없이 어긋나버려 상대에게 힘을 주기는커녕 상대의 마음을 더 아프고 힘들게 만들게 될 것이다.

 

자신이 충분히 역지사지하고 있다는 자만에 빠져, 지금 내가 상대의 말을 듣고 느끼는 감정이 곧 상대의 감정일 것이라고 섣불리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상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본다, 내가 상대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살아오면서 내가 겪은 개인적인 경험들과 배우고 익힌 지식들을 상대에게 더 많이 적용하려고 하면 할수록 마음의 주파수는 점점 더 어긋나버린다. 나도 모르는 사이 판단하고 해석하려는 마음이 생길 때, 문제를 빨리 해결해주고 싶은 마음이 앞설 때, 그럴 때 나는 속으로 되뇌곤 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마음을 비우고 있는 그대로 듣자.’ 그러면서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140~141p)

 

여러 가지 현실적인 상황으로 인해 저자는 2년 만에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게 된다. 저자의 끊임없는 고민과 환자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나는 이 분이 얼마나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인지를 느꼈다. 비록 치료하는 데 있어 완벽한 방법은 없을 지라도, 나의 진심이 상대방에게 가닿지 않더라도, 끝까지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좀 더 밝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음을 믿는다. 마음 아픈 이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주는 것일 테니까.

 

세상에 아픈 이들이 조금은 더 건강해지기를 바란다. 서로에게 따뜻한 관심과 눈길을,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 덜 추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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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ma1228 2018-12-04 0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행키입니다! ^^ 리뷰 감사합니당~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ㅎㅋ
 
보기왕이 온다 히가 자매 시리즈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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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공포물이라면 질색을 하는 나는 공포영화는 물론이거니와 지나가다 붙어져 있는 공포물 포스터만 봐도 자지러지는 편인데, 하필이면 이번 아르테에서 온 책 수집가 선정도서가 <보기왕이 온다>라는 일본 호러소설이었다. 표지를 둘러싼 보라색 띠지에는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선정된 일본 호러소설 대상 대상 수상작이라는 말이 쓰여 있었고, 그 짧은 소개는 으스스한 책 표지와 함께 나를 더 겁먹게 만들었다. 하지만 처음에 주저했던 것과는 달리 첫 장을 넘기고 다음 장을 넘기면서 나는 이 책이 끌어당기는 마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적막 속 작은 소리에도 흠칫 놀라면서, 옆을 봤다가 뒤도 돌아봤다 불안하게 주변을 살펴보면서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나갔다.

 

이 책은 서술자에 따라 챕터가 총 3장으로 이루어져있다. 1<방문자>는 다하라 히데키의 목소리, 2<소유자>는 다하라 히데키의 아내인 가나의 목소리, 그리고 마지막 제3<제삼자>는 마코토의 남자친구인 노자키의 목소리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덕분에 동일한 사건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어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반전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런 서로에 대한 생각이나 입장차이는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보고 겪는 문제들이어서 자연스레 공감이 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더욱더 혼자만의 생각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자기 식대로 행동하기만 한 남편 히데키자신의 생각 하나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참고 또 참으며 모든 걸 남편에게 맞추기에 급급했던 아내 가나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계속 참기만 하면 마음속에 나쁜 게 쌓이는 법이지. 오랜 세월이 지나면 그 대가가 온단다. 계속 참는 게 좋은 일은 아니야. 나는 참았어, 그러니까 용서해줄 거야.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란다. 세상은…… 이 세상은.” (31p)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서로 간의 대화가 아닌 혼자만의 생각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그런 독선으로 누군가를 위하려 하는 것은 더 이상 배려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을. 참기만 한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이 책이 호러라는 장르의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으면서도, ‘소설의 맥락을 끝까지 잘 유지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긴장과 공포 속에서도 끝까지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스토리가 갖는 흡입력과 더불어 일종의 괴담에서 나온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허황된 것으로만 치부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이 책엔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옛날부터 생각했지. 자신과 똑같이 생긴 건 무섭다고. 봐서는 안 된다, 보면 죽는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왜일까?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어. 적어도 알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군.”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자신의 추악함과 교활함, 나약함, 어리석음을 자기 눈으로 보는 건 견디기 힘들 만큼 괴롭기 때문이지.” (267p)

 

보기왕은 부르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은 저주를 불러일으키고 그 저주의 끝엔 보기왕이 오게 될 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를 소중히 대하지 않는다면 다음에 초인종 소리와 함께 보기왕이 찾아올 이는 우리가 될 지도 모른다. 이미 누군가가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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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 - 혼자여서 즐거운 밤의 밑줄사용법
백영옥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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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시작하는 책 수집가 1가을에 어울리는 예쁜 에코백과 함께 기다리던 첫 책이 도착했다. 에세이인 만큼 작가 개인의 생각과 경험은 물론 그동안 작가가 보고 들었던 책의 문장, 드라마 대사, 영화의 장면이 각각 수록되어 있어 읽는 내내 작가가 받은 위안과 위로가 오롯이 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챕터가 짧은 분량으로 나눠져 있어 평소 책을 읽기 어려워하던 이들이나 시간에 쫓겨 독서시간을 갖기 어려운 분들이 읽기에도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나온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이나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캐스트 어웨이> 등은 내게도 여전히 여운이 짙은 작품이어서 오랜만에 그때의 다이어리와 노트를 찾아보기도 하며 감상에 젖기도 했다.

 

가치 있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늦었다는 건 없다. 하고 싶은 것을 시작하는 데 시간의 제약은 없단다. 너를 자극하는 뭔가를 발견해내기를 바란단다. 전에는 미처 느껴보지 못했던 것들을 느껴보길 바란다.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많은 사람을 만나보기 바란단다. 네가 자랑스러워하는 인생을 살기를 바란단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갖기를 바란단다. (224p)

 

살아남기 위해 난 끝까지 버텼어. 그러던 어느 날 파도가 밀려왔고 바람이 뗏목을 밀어줬어. 난 계속 살아갈 거야. 파도에 또 뭐가 실려 올지 모르니까.” (250p)

 

이 책의 저자처럼 누구에게나 각자의 밑줄은 존재한다. 읽고 쓰는 걸 좋아하는 나는 매일 쓰는 다이어리 외에도 필사용 노트,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나서 쓰는 감상용 노트가 따로 존재하는데, 그런 문장과 장면들은 처음 만난 그 순간뿐만 아니라 세월이 지나도 계속해서 내게 남아 건강한 힘을 주고 따뜻한 위로를 건네준다.

 

제가 그어온 책 속 밑줄 중 단 하나라도 당신의 상처에 가닿아 연고처럼 스민다면 그것으로 저는 정말 기쁠 거예요. (9p)

 

이 책은 감기에 걸린 환자들이 약봉지를 하나씩 뜯듯, 추위에 떠는 사람들이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듯 그렇게 마음 아픈 이들에게 단단한 밑줄이 되어줄 것만 같은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꺼번에 읽기 보다는 한 두 챕터씩 조금씩 나눠 보는 걸 추천한다. 비스킷도 한꺼번에 먹는 것보단 조금씩 감질나게 먹는 게 더 맛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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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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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는 해, <사양>을 읽으며 그 당시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종전을 맞이한 후 혼란스러운 격변 속에 각각의 이유로 괴로워했을 그들을. 오직 사랑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던 가즈코와 천박해지고 난폭해지고자 했지만 정작 민중에도 상류 계급에도 속하지 못한 채 괴로워했던 나오지, 자상하고 기품 있는 귀부인이지만 경제력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졌던 그들의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예술을 계속 하면서도 현실이 여전히 비참하고 슬프기만 한 소설가 우에하라까지. 누구는 술과 약에 취해 현실을 외면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구는 사랑과 혁명으로 그런 현실에 맞서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우에하라에게 기대어 함께 기요틴 기요틴 슈르슈르슈건배 노래를 부르던 취한 사람들과 남편의 외도를 알고도 제자리서 끝까지 자신의 본분을 다하던 우에하라의 아내. 그들은 모두 서로의 행동이 옳지 않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이 시대의 혼란 속에서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명분을 찾고 서로에게 공감을 한다. 여기엔 용서를 비는 사람도 용서를 하는 사람도 없다. 그저 혼란을 대하는 서로의 방식을 묵묵히 인정할 뿐이다.

 

나는 우에하라를 향한 가즈코의 사랑, 가족을 책임지지 않고 자신의 길만 걸어가던 우에하라의 삶, 자신이 괴롭다하여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힘들게 했던 나오지의 행동과 선택 모두 쉬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는 가즈코의 사랑이 여전히 불편했고 그렇게 남을 상처 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게 마냥 긍정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마찬가지로 방탕하고 책임 없던 우에하라와 나오지 역시 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 격변 속에 있던 사람이 아니니 지금의 이곳에서 함부로 그들을 판단할 순 없으리라. 그들 또한 지금의 우리들을 그들의 기준으로 함부로 판단할 순 없듯이. 단지 그 당시와는 다른 이유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또 다른 격변과 혼란 속에 괴로워할 뿐이다. 지금 이곳에도 사양은 엄연히 존재하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괴로워하고 힘들어한다. 여전히 취한 채 현실을 외면하려 하는 이들이 있고 사랑이나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으며, 어떻게든 제대로 문제를 인지하고 앞으로 나아가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나오지와 같은 선택을 하는 슬픈 이들도 있다.

 

가즈코가 나긋나긋하게 말해주던 옛 추억들이 듣기 좋았고, 우에하라에게 보낸 그녀의 진심어린 편지들과 나오지가 죽기 전 누나에게 남긴 유서를 여러 번 읽어보는 게 좋았다.

이 세상의 공기와 햇볕 속에서 살기에 자신은 너무나 허약한 풀이었다고 말하는 나오지. 그는 지금 그곳에서 조금은 평안할까.  

 

나는 전등을 껐다. 여름 달빛이 홍수처럼 모기장 안에 흘러 넘쳤다. (60p)

‘불량하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 라고 그 공책에 쓰여 있었는데, 그러고 보면 나도 불량, 삼촌도 불량, 어머니조차 불량하게 여겨진다. 불량하다는 건 상냥하다는 뜻이 아닐까. (76p)

"전, 지금 행복해요. 사방의 벽에서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와도, 지금 제 행복감은 포화점이에요. 재채기가 날 만큼 행복해요." (144~14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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