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핑 뉴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9
애니 프루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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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감나는 묘사와 시적인 문장들로 가득한 소설이었다. 덕분에 읽는 내내 함께 바다를 나가 사나운 파도를 견디고, 코일의 힘든 시간들을 같이 겪으며 시공간을 공유한 기분이 든다. 사랑에 상처받은 코일이 새로운 사랑의 형태로 가족을 이루고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해나가던 모습과 거기서 나아가 육체적 성숙을 깨닫고 환희에 차오르던 모습은 우리에게 깊은 안도감을 선사한다. 어둡고 답답한 금속 상자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게 된 코일, 그의 앞으로의 여정이 더 기대되는 결말이다. 이렇게 수많은 가능성을 희망하며, 사랑으로 끝맺는 소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과학 저널들은 돌연변이 바이러스니, 죽음 직전에 생명을 구하는 의료 기계니, 파리가 진공청소기로 빨려들어가듯 은하계가 보이지 않는 거대 인력체를 향해 흘러가는 현상의 발견이니 떠들어댔지만 그건 타인의 인생이었다. 코일은 자신의 인생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트레일러 안을 돌아다니며 소리 내어 자문하는 습관이 생겼다. "누가 알아?" 그가 말했다. "누가 아냐고."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앞날에 어떤 일이 닥칠지 그 누가 알겠는가.
모로 세워진 상태로 빙글빙글 돌고 있는 동전은 앞면으로도, 뒷면으로도 넘어질 수 있으니까. - P27

인간은 슬플 때 왜 우는 걸까, 하고 고모는 생각했다. 개, 사슴, 새는 눈물을 보이지 않고 조용히 고통을 삭인다. 동물들의 무언의 고통. 그건 아마도 생존 기술이리라. - P45

저 새는 바다와 바위와 하늘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도망쳐나와 코일의 빈방이라는 광막한 공간으로 들어오고 싶어하는 듯했다. 바닥을 밟는 그의 발이 내는 속삭임. 유리창 너머로 우유처럼 뿌연 바다가 누워 있었다. 어슴푸레한 하늘. 그 하늘에 마구 휘갈겨진 구름. 텅 빈 만, 저 먼 기슭은 안개에 싸여 있었다. - P160

코일은 풀 위에 누운 채 달려가는 웨이비를, 그녀의 푸른 치마의 주름이 점점 멀어져가면서 지워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고모, 아이들, 웨이비. 그는 대지와 합쳐지려는 듯 사타구니를 황무지에 대고 눌렀다. 흥분된 감각에, 먼 풍경이 그에게 너무도 중요하게 다가왔다. 바다와 거대한 바위를 배경으로 한 작은 형체들. 복잡하게 뒤엉킨 삶이 허울을 벗자 그는 인생의 구조를 볼 수 있었다. 생이란 바위와 바다, 그리고 그것들을 배경으로 잠시 스쳐가는 작고 하찮은 인간과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 코일은 순수에 대한 감각을 되찾고 떨리는 균형 속에서 세상사를 이해했다.
세상 모든 일이 전조라는 껍질에 싸여 있는 듯했다. - P290

"이 뜨거운 박스만 있으면 난 안 죽어." 코일은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이제 그는 빨간 아이스박스 안에 뜨거운 숯덩이가 가득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뚜껑에서 턱을 떼면 이가 정신없이 딱딱딱딱 맞부딪치다가도 다시 얹으면 말짱해졌다. 뜨거운 열기가 아니고서야 그 무엇이 그런 효력을 지닐 수 있겠는가.
황혼이 가까워진 걸 깨닫자 다시금 놀랐다. 아니, 어쩌면 기쁜 일인지도 몰랐다. 황혼이 지면 잠자리에 들 수 있으니까. 그는 너무 피곤했다. 넘실거리는 파도는 포근한 잠자리가 되어주리라. 그러자 묘한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노란 옷의 남자는 죽은 게 아니다. 잠든 것이다. 쉬고 있는 것이다. 자신도 곧 남자처럼 엎어져서 잠에 빠져들리라. 빛이 꺼지면 바로. - P313

"잭의 기사 배정이 섬뜩하지 않나? 그는 우리의 개인적인 공포를 들쑤시고 있다구. 자네 경우만 해도 그래. 자동차 사고로 아내를 잃었잖아. 그런데 자네한테 뭘 맡겼나? 자동차 사고 기사. (...) 난 잭이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 궁금해. 그렇게 자꾸 상처를 들쑤시면 고통이 무뎌지는 건지 아니면 고통은 원래의 상태 그대로 남는 건지. 난 고통은 그대로 남는다고 생각해."
(...) "그는 자신에게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의 부친과 조부, 두 형제, 맏아들, 그리고 막내아들까지 잡아먹을 뻔한 바다에서 살다시피 하잖아요. 난 고통이 무뎌진다고 생각해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그런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받는 거죠. 그러고 보면 불행은 여럿이 함께 겪는 게 좋다는 옛말이 일리가 있어요. 주위 사람들이 함께 죽으면 죽기도 한결 쉬워지는 거 아니겠어요?" - P326

집안 공기가 숨이 막힐 듯 무거웠다. 방마다 무취의 가스 같은 과거가 무겁게 들어차 있었다. 멀리에서는 바다의 숨소리. 이 집은 고모에게 의미가 있다. 내게도 그럴까? 집 주위의 해안은 아름답지만 집 자체는 글러먹었다. 애초부터. 수마일이나 되는 얼음길을 끌려왔으니. 그것도 신도들에게 쫓겨나면서 고래고래 저주를 퍼부은 추방자들의 손에 의해 끌려와 바위 위에 얹힌 것이다. 이 집은 바위에 묶인 채 벗어나고 싶어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있다. 바람에 윙윙대는 팽팽한 케이블. 그 진동이 집으로 전달되어 마치 집이 살아 있는 듯 느껴졌다. 그래서 집에 들어와 있으면 꼼짝 못하고 묶여 있는, 말은 못해도 느낄 수는 있는 짐승의 뱃속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우성치는 과거에 삼켜진 것 같았다. - P381

그는 도랑이 팬 길을 오르며 노인을 생각했다. 동물 시체와 끈을 사용하는 더러운 주술. 노인은 분명 달의 주기에 따라 살며, 이파리 위에 표시를 해놓고, 만에서 올라와 그를 덮치는 핏빛 비와 검은 눈雪을 보았을 것이며, 거위들이 매니토바주州의 늪에서 꽁꽁 언 채로 겨울을 난다고 믿을 것이다. 마음속의 적에 대한 최후의 방어라는 것이 고작 마녀매듭인 노인. - P384

"당신 선물을 살 시간이 없었어." 그러곤 꼭 쥔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을 펴자 양 손바닥에 갈색 달걀이 하나씩 있었다. 코일은 그것들을 집었다. 차가운 감촉. 그는 페틀의 행동이 다정하고 멋지다고 여겼다. 중요한 건 달걀이 아니라 그것이 그녀의 손으로 건네진 선물이라는 상징성이었다. 그에겐 그것으로 족했다. 그 달걀이 어제 슈퍼마켓에서 자기가 산 것이라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페틀이 자신의 속마음을 아는구나 생각했다. 나에게 진짜 중요한 건 선물을 주는 마음, 선물을 건네는 손길이라는 걸 알 만큼 그녀는 날 사랑하고 있어. - P405

"엄마는 뉴욕에서 차 사고가 나서 여기 못 와요. 깨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난 엄마를 깨울 수 있지만 너무 멀어서 못 가요. 그래서 어른이 되면 갈 거예요." - P437

코일은 딸에게 질질 끌려가며 웨이비의 눈길을, 그녀의 미소를 보았다. 아, 그만을 위한 눈길과 미소! 계단을 오르는데 문득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사랑은 돌아가면서 하나씩 꺼내 먹는 종합 사탕 봉지 속의 다양한 사탕 같은 것이고 우리는 사탕을 맛보듯 사랑도 이것저것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혀에 톡 쏘는 맛을 남기는 것, 밤의 향기를 일깨우는 것, 속이 쓸개처럼 쓴 것, 꿀과 독을 섞은 것, 금방 삼키게 되는 것. 그리고 평범한 눈깔사탕과 박하사탕 틈에 희귀한 것들도 섞여 있다. 독바늘로 심장을 찌르는 것들 한두 알과 평온과 부드러운 기쁨을 주는 것. 지금 그의 손은 그 평온과 부드러운 기쁨의 사탕을 집으려 하고 있는 것일까? - P455

욕조에서 나와 수건으로 몸을 문지르다가 욕실문 뒤에 달린 전신 거울의 김을 닦아냈다.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자신의 알몸을 바라보았다. 정말 거구였다. 굵은 목, 거대한 턱, 짧고 억센 구릿빛 털이 박힌 두둑한 뺨. 누르스름한 주근깨. 우람한 어깨와 탄탄한 팔뚝, 늑대인간 같은 털복숭이 손. 불룩한 배까지 내려온 젖은 가슴털. 불그레한 음모의 숲에 둘러싸인, 뜨거운 목욕물에 선홍색으로 익은 큼직한 성기. 허벅지, 나무밑동 같은 다리. 그러나 그 모습은 뚱뚱하다기보다는 힘센 장사처럼 보였다. 코일은 자신이 육체적 성숙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중년이 머지않았지만 두렵진 않았다. 이제 못생긴 부분들을 헤아리기가 어려워졌다. 그건 어쩌면 헤아릴 수 없게 서로 뒤섞였거나 희미해져서 전체적인 모습으로 합쳐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겨드랑이가 터진 회색 잠옷을 걸치자 젖은 등짝에 옷이 달라붙었다. 다시금 환희가 스쳐갔다. 까닭도 없이. - P473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다 죽어요." 웨이비가 말했다. "인생에는 슬픔과 상실이 있죠. 아이들도 그걸 이해해야 돼요. 그애들은 죽음을 잠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 "버니가 악몽을 꾸는 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까봐 두렵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페틀과 워런과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말이에요. 그리고 고인을 봐도 그 기억 때문에 괴롭진 않아요. 그건 잘 알려진 사실이죠." - P480

"모두들 알다시피 우린 스쳐가는 인생일 뿐이야. 우리도 이 바위땅을 잠시 더 걸어다니고 배를 몇 번 더 탈 뿐이지 모두 죽을 목숨들이라구. 바다는 검은 꽃이고 어부는 그 꽃 한가운데 있는 벌이지." - P481

"웨이비 아줌마, 그 새가 아직 있나 보러 갈 수 있어요?" 잔뜩 긴장한 고사리손이 코바늘로 뜬 침대보를 움켜쥐었다.
"그럼. 가서 보자. 하지만 거센 폭풍이 지나갔으니 그 가벼운 작은 새의 시체는 바람에 날려갔을 수도 있고 파도에 씻겨갔을 수도 있어. 갈매기나 고양이가 점심으로 먹었는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그 새를 찾지 못할 수도 있어. 켄에게 거기까지 태워다달라고 부탁해보자. 그런 다음 우리집에 가자. 코코아 만들어줄게."
바위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새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풀포기 위에 작은 깃털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다른 새의 깃털일 수도 있었다. 버니는 그 깃털을 집어들었다.
"새가 날아갔어요." - P486

잭 버깃이 피클 단지에서 벗어났다면, 목이 부러진 새가 날아갔다면, 또 어떤 일이 가능할까? 물이 빛보다 먼저 생겼을 수도, 뜨거운 염소 피 속에서 다이아몬드가 깨질 수도, 화산이 차가운 불을 뿜어낼 수도, 바다 한가운데에 숲이 나타날 수도, 게 위로 손만 가져가도 그 손 그림자에 게가 잡힐 수도, 매듭 속에 바람이 갇힐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고통이나 불행이 없는 사랑도 가끔은 있으리라. - P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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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있는 서점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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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볍게 시작해서 묵직하게 끝나는 소설이었다. 개브리얼 제빈은 <비바, 제인>으로 처음 알게 된 작가인데, 개인적으로는 <비바, 제인>보다 <섬에 있는 서점>이 훨씬 더 좋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좋아할 책이라는 수식을 갖고 있는 이 책은 읽으면서 수많은 사랑과 가족의 형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언어를 잃는 순간에도 사랑을 잃지 않았던 에이제이가 딸 마야에게 사랑을 표현하며 "장갑"을 입 밖으로 내뱉던 순간, 그 순간의 감동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스무 살 때 감동했던 것들이 마흔 살이 되어도 똑같이 감동적인 건 아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야. 책에서나 인생에서나 이건 진리다. - A. J. F. - P57

다른 사람들은 그 누구도 에이제이만큼 진짜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계절마다 다른 신발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 마야는 어머니에 대한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아이는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죽었다는 것은 잠이 들어서 깨어나지 않는 것임을 안다. 마야는 어머니가 무척 안타깝다. 깨어나지 않는 사람은 아침에 아래층 서점에 내려갈 수 없으니까.
마야는 어머니가 자신을 아일랜드 서점에 두고 갔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일정 나이가 되는 모든 애들한테 일어나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떤 아이들은 신발 가게에 남겨진다. 또 어떤 애들은 장난감 가게에 남겨진다. 또 어떤 애들은 샌드위치 가게에 남겨진다. 그리고 인생은 어떤 가게에 남겨지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거다. 마야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살고 싶지 않다. - P109

에이제이가 읽는다. "……맨 꼭대기에는 빨강 모자가 여럿 있습니다."
그림은 다양한 색깔의 모자를 겹쳐 쓴 남자를 보여준다.
마야는 자신의 손을 에이제이의 손 위에 얹어 아직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게 막는다. 아이는 눈으로 그림과 글 사이를 왔다 갔다 훑는다. 돌연 ‘빨강’이 빨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 이름이 마야라는 것을 알게 되듯, 에이제이 피크리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되듯,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곳이 아일랜드 서점임을 알게 되듯.
"왜?" 에이제이가 묻는다.
"빨강." 마야는 에이제이의 손을 잡고 움직여 그 낱말을 가리킨다. - P111

에이미가 이 소설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을 때, 그녀의 기질 속에 내가 생각지 못했던 기묘하고 놀라운 것들, 내가 가보고 싶은 어두운 장소들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
사람들은 정치와 신, 사랑에 대해 지루한 거짓말을 늘어놓지. 어떤 사람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한 가지만 물어보면 알 수 있어. ‘가장 좋아하는 책은 무엇입니까?’ - A. J. F. - P113

"때로는 적절한 시기가 되기 전까진 책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 법이죠." - P119

그해 봄, 어밀리아는 마야를 데리고 약국 겸 화장품 가게에 가서 좋아하는 네일 폴리시 색을 고르라고 했다. "어떻게 골라요?" 마야가 물었다.
"지금 어떤 기분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되고," 어밀리아가 말했다. "어떤 기분이 되고 싶은지 물어봐도 좋고."
마야는 주욱 늘어선 유리병을 유심히 관찰했다. 빨강을 골랐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마야는 무지갯빛 도는 은색을 선반에서 꺼내들었다.
"와, 예쁘다. 하이라이트는 이거야. 각 컬러마다 이름이 있거든." 어밀리아는 마야에게 말했다. "병을 거꾸로 들어 바닥면을 봐봐."
마야는 시키는 대로 했다. "책처럼 제목이 있어요! 진주의 아침." 마야가 읽었다. "그건 뭐예요?"
어밀리아는 하늘색을 골랐다. "가볍게 살자." - P167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라곤……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라곤, 우린 함께 헤쳐나갈 수 있을 거예요, 맹세코. 나는 내가 읽는 책을 당신도 같이 읽기를 바랍니다. 나는 어밀리아가 그 책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내 아내가 되어주세요. 당신에게 책과 대화와 나의 온 심장을 약속할 수 있습니다, 에이미."
(...) 어밀리아는 미간을 찡그렸고, 에이제이는 그녀가 거절하려나 보다 생각했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그녀가 마침내 말했다.
"오코너의 단편을 말하는 거야? 당신 책상 위에 있던. 이런 순간에 떠올리기엔 지독히 어두운 얘긴데."
"아냐, 당신을 말하는 거야. 나는 끝없이 찾았는데. 겨우 기차 두 편과 배 한 척 거리였군." - P193

"이유가 있었을 거야. 분명 네 어머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을 거라고." 어밀리아의 어머니는 이태 전에 세상을 떴다. 그들 모녀의 관계는 때론 위기도 있었지만, 어밀리아는 뜻밖에도 어머니가 맹렬히 그리웠다. 가령,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격월로 딸에게 새 속옷을 부쳤다. 어밀리아는 평생 단 한 번도 스스로 속옷을 살 일이 없었다. 최근에서야 티제이맥스의 란제리 매장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팬티를 고르면서 울음이 터졌다. ‘나를 그토록 사랑해주는 사람은 다시는 없을 거야.’ - P219

"흠, 난 지금 당신한테 경고하는 거예요. 난 표지만 예쁘지 내용은 형편없는 책일 수도 있다고."
램비에이스는 끙 신음을 흘렸다. "저도 그런 책 좀 알아요."
"예를 들면?"
"나의 첫 결혼. 아내가 예뻤는데 성격이 안 좋았어요."
"그럼 똑같은 실수를 두 번 하려고요?"
"설마, 난 서가에 놓인 당신을 십수 년간 봐왔어요. 뒤표지에 실린 인용구도 읽고 줄거리도 읽었죠. 배려심 많은 교사. 대모. 지역사회의 견실한 구성원. 여동생의 남편과 그 딸을 돌보는 사람. 아마도 너무 어린 나이에 시작된, 그러나 최선을 다했던 불행한 결혼생활."
"개략적인 이미지군요."
"하지만 계속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에 충분한데요." 램비에이스는 그녀를 보고 싱긋 웃었다. "디저트 주문할까요?" - P252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일들을 저지르고, 보통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 P256

"난 항상 마야의 어머니가 왜 앨리스를 택했을까 궁금했어요."
이즈메이는 팬케이크를 뒤집고, 또 하나 뒤집었다. "사람들이 하는 행동의 이유를 누가 다 일일이 알겠어요?" - P257

"난 소개팅을 수만 번 해본 여자하고 비슷해. 너무 많이 실망했고, 다들 ‘대박’이라고 큰소리치는데 대박은 개뿔. 당신도 경찰일 하면서 점점 그렇게 되지 않아?"
"어떻게?"
"시니컬해진달까." 에이제이가 말했다. "매번 사람에 대한 기대치를 밑바닥까지 끌어내리게 되지 않아?"
램비에이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나쁜 사람들만큼이나 착한 사람들도 많이 보는데."
"그래, 어디 이름 좀 대보시지."
"자네 같은 사람 말이야, 친구." 램비에이스는 헛기침을 하며 목청을 가다듬었고, 에이제이는 대꾸할 말을 떠올릴 수 없었다. - P286

어째서 이 책은 저 책과 다른 걸까? 책이 저마다 다른 건, 에이제이는 결론을 내린다, 그냥 다르기 때문이야. 우리는 많은 책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는 믿어야 한다. 때로 실망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이따금 환호할 수도 있다. - P287

인간은 홀로 된 섬이 아니다. 아니 적어도, 인간은 홀로 된 섬으로 있는 게 최상은 아니다. - P296

아주 심플한 거야, 그는 생각한다. 마야, 그는 말하고 싶다, 이젠 다 알아.
하지만 그의 두뇌가 말을 듣지 않는다.
마땅한 말을 못 찾으면 빌려 쓰는 거지.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 우리는 혼자라서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내 인생은 이 책들 안에 있어, 그는 마야에게 말하고 싶다. 이 책들을 읽으면 내 마음을 알 거야.
우리는 딱 장편소설은 아니야.
그가 찾고 있는 비유에 거의 다가간 것 같다.
우리는 딱 단편소설은 아니야. 그러고 보니 그의 인생이 그 말과 가장 가까운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단편집이야.
수록된 작품 하나하나가 다 완벽한 단편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 만큼 읽었다. 성공작이 있으면 실패작도 있다. 운이 좋으면 뛰어난 작품도 하나쯤 있겠지. 결국 사람들은 그 뛰어난 것들만 겨우 기억할 뿐이고, 그 기억도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맞아, 별로 오래가지 않아. - P301

죽는 건 겁나지 않아, 그는 생각한다. 하지만 내 지금 상태는 약간 두려워. 날마다 내 존재는 조금씩 줄어들어. 오늘의 나는 말이 결여된 생각이지. 내일의 나는 생각이 결여된 몸뚱이가 될 거야. 그렇게 되는 거지. 하지만 마야, 지금 네가 여기 있으니 나도 여기 있는 게 기뻐. 책과 말이 없어도 말이야. 내 정신이 없어도. 대체 이걸 어떻게 말하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 "마야,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바로 우리야.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우리다." - P303

"우리는 우리가 수집하고, 습득하고, 읽은 것들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여기 있는 한, 그저 사랑이야.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그런 것들이 진정 계속 살아남는 거라고 생각해."
마야는 여전히 고개를 흔들고 있다. "못 알아듣겠어요, 아빠. 알아들었으면 좋겠는데. 에이미를 불러다 드려요? 아니면 타이핑으로 시도해 볼까요?"
그는 땀을 흘리고 있다. 대화가 이제는 즐거운 일이 아니다. 예전에는 그렇게나 쉬웠는데. 좋아, 그는 생각한다. 한 단어가 돼야 한다면 한 단어로 하지 뭐.
"사랑?" 그는 말했다. 제대로 발화됐기를 빈다.
마야는 눈썹을 찡그리고 그의 표정을 읽으려 애썼다. "장갑?" 마야가 물었다. "손 시려요, 아빠?"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마야는 아버지의 두 손에 자기 손을 포갰다. 차갑던 그의 손이 이제 따뜻해지고, 그는 오늘은 이걸로 할 만큼 했다고 판단한다. 내일은, 어쩌면, 말을 찾아낼지도. - P303

서점은 올바른 종류의 사람들을 끌어당겨. 에이제이나 어밀리아 같은 좋은 사람들. 그리고 난, 책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책 얘기를 하는 게 좋아. 종이도 좋아해. 종이의 감촉, 뒷주머니에 든 책의 느낌도 좋고, 새 책에서 나는 냄새도 좋아해. - P308

"당신 진짜로 하고 싶은 거 확실해? 우리가 뭐 한창 청춘도 아니고." 이즈메이가 말했다. "겨울 없는 곳은 어쩌고? 플로리다 말야."
"늙어서 가면 되지. 아직 그 정도로 늙진 않았어." 램비에이스는 잠시 말을 끊었다. "난 평생을 앨리스에서 살았어. 내가 아는 유일한 곳이지. 좋은 동네고, 이곳을 쭉 그렇게 살리고 싶어. 서점이 없는 동네는 동네라고 할 수도 없잖아, 이즈메이." - P310

나는 진심으로 아일랜드 서점을 사랑한다. 나는 신을 믿지 않고, 종교도 없다. 하지만 내게 이 서점은 이승에서 교회에 가장 가까운 곳이다. 이곳은 신성한 곳이다. 이런 서점들이 있는 한, 출판업은 오래도록 이어져갈 거라고 확언한다. ―어밀리아 로먼.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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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에게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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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선의를 알아채지 못해 상처받고, 믿지 못하고, 과거에 계속 머무르는 건 나를 끊임없이 아프게 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던 오세의 말과 실패가 아니라 인생을 더 깊이 용인하는 거라던 영웅의 말, 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이라도 냉동고에 넣으면 얼마든지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된다던 복자의 말은 내게 오래 남는다. 위로가 되는 그 말들을 품에 안고, 실패를 미워하면서도 차가운 바람에 맞서 앞으로 나아가야지. 누군가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가득 보내줘야지. 수많은 복자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줘야지.



제주에는 아예 그렇게 가여운 애기들을 가리키는 설룬애기라는 말이 있고 서럽고 불쌍한 엄마를 가리키는 설룬어멍이라는 말도 있다. 슬픔이 반복되면 그렇게 말로 남는 거야. - P18

결국 분노의 목적과 명분은 사라지고 그냥 분노라는 상태만 남아 활활 탔다. 화는 눈덩이처럼 뭉치고 뭉쳐져서 차가운 불면의 밤이 왔고 병원의 처방약이 없으면 잠들기가 힘들어졌다. - P37

"사람을 한번 만나면 그 사람의 삶이랄까, 비극이랄까, 고통이랄까 하는 모든 것이 옮겨오잖아. 하물며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언제나 억울하고 슬프고 손해보고 뭔가를 빼앗겨야 하는 이들이야. 이를테면 판사는 그때마다 눈을 맞게 되는 것이야. 습설濕雪의 삶이랄까. 하지만 눈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으려면 빨리 털어내야 한다고." - P39

고통은 그렇게 단련되기는커녕 어느 면에서는 더 예각화되었다. 노출되면 될수록 예민하게 아프고 슬프고 고통스러워졌다. - P40

사장은 바구니에 담긴 귤을 가리키며 공짜니까 가져가라고 했다. 귤들은 푸릇했고 점무늬가 있기도 했지만 싱싱해 보였다. ‘비닐봉지 제공 불가. 손에 쥘 수 있는 만큼만 욕심내기’라고 안내문이 쓰여 있었다. 나는 누가 비닐봉지까지 달라고 하냐고 사장에게 물었다. 아주 양심이 불량하네, 하고. 맞장구를 칠 줄 알았는데 사장은 주방 쪽을 향해 "패마농 주문허카 말카?" 하더니 "네네"하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들이 있고 그런 게 사람이죠." - P47

나중에도 도시 곳곳에 흔하게 놓여 있는 음료 자판기들은 내게 아주 복잡한 고통 같은 것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어느 때에는 그렇게 가족들이 어떤 곤경과 맞서보려고 했던 때가 대책 없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 P66

농담은 우리에게 일종의 양말 같은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우리의 보잘것없고 시시한 날들을 감추고 보온하는 포슬포슬한 것. 농담을 잘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면 하루가 활기차다고도 했다. - P81

왜 뭔가를 잃어버리면 마음이 아파?
왜 마음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렇게 아파?
나는 일기장에 이런 말들을 쓰면서 하루를 마감했다. - P100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메스를 든 의사와 같다’는 말이었다. 의사들에게 인체를 찢는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우리 역시 타인의 삶을 찢고 들어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가 필연적으로 짊어지게 되는 무게와 끊임없이 유동하는 내면의 갈등과 번민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 P110

사람들은 말이다. 맘이 있지? 그러면 절대적으로 반응이라는 것을 해. 그리고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늘 범위 안에 있어.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하니? 콘택트, 연결, 접속이 항상 있어야지. - P123

인터뷰를 하는 간호사가 복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부분은 복자인 듯했고 어느 부분은 복자가 전혀 아닌 듯했다. 불행의 표피가 너무 단단해서 말이 그 안을 드러낼 수 없을 듯한 부분은 복자의 것이면 안 될 것 같았고, 유채꽃처럼 예쁘잖아요 할 때는 당연히 고고리섬 풍경이 떠오르면서 복자일 듯했다. - P130

"별은 불변이구나"라고 한 건 복자였고, 그 느리고 느린 인공위성이 만드는 작은 움직임이야말로 인간의 힘처럼 느껴진다고 말한 건 오세였다. 위대한 건축이란 인간이 위대하다는 가장 위대한 증거라는 어느 건축가 말을 반복해서 믿게 된다고. 저기 인공위성 역시 인간이 우주공간에 지은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자기는 그것이 조금씩 어둠을 밀며 움직일 때마다 힘을 얻는다고. - P139

복자의 엄마가 복자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어른이란 사실 자기 무게도 견디기가 어려워 곧잘 무너져내리고 마는 존재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까. 1999년 내가 복자를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복자는 그걸 잘 알고 있는 아이처럼 보였다. 그래서 씩씩하고 많이 웃고 더 진취적인 아이도 있는 법이다. 그렇게 해서 세상을 속일 수 있기를 바라는 힘으로 어른이 되는 아이들이. - P143

여름이 한창이었다. 생선 가게 주인이 한 팔을 내밀거나, 선풍기 바람이 비닐봉지들을 펄럭일 때마다 매대에 내려앉았던 파리떼가 와하하 일어났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생선을 토막 내고 오징어를 손질하는 주인을 보고 있으면 마치 그 파리떼가 그의 유일한 아우라 같았다고 고모는 적었다. 오직 그것만이 토막 난 생선처럼 종결되지도 않고 차양 아래 오징어처럼 다 물러지지도 않은 채 생이 계속된다고 증언하는 듯했다. 그 비린 것에 달라붙는 파리떼처럼 칼과 도마와 고무장갑에 내려앉았다가도 공기 중으로 와락 떠오르며 우리도 산다고, 우리가 이렇게 구차하고 끈질기게 기꺼이 산다고. - P163

많은 기억들이 흔들리고 부유했다. 기억을 되살린다는 건 그렇게 한없이 풍성해지는 일인 듯했다. 통제를 벗어난 많은 것들이 나의 재단을 훼방하고 흐트러뜨려놓는 상태,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여름을 닮은 시간들이었다. - P167

오세는 드론을 띄워서 찍은 고고리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바다 위에 그 작은 고고리섬이 떠 있는 게 기적처럼 느껴졌다. 연속해서 몰아치는 파도를 견뎌가며 섬은 마치 가지를 뻗듯 선착장과 부두를 만들고 꽃처럼 다채로운 지붕의 집들을 피우고 보리밭과 해바라기밭을 보듬으며 거기에 있었다. 해안의 거친 바위들, 섬의 유일한 공장인 보리 도정공장과 밭둑의 고인돌들까지, 그렇게 위에서 보니 모든 것이 한없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드론이 점점 내려앉아 지붕의 시점이 되고 잠자리들의 시점이 되고 우리의 눈높이가 되고 갯강구들의 자리까지 내려와 착륙하면 슬픔이 먼지처럼 피어올랐다. - P181

제주 속담에 ‘속상한 일이 있으면 친정에 가느니 바다로 간다’는 말이 있다. 복자네 할망에게 들었지. 나는 제주, 하면 일하는 여자들의 세상으로 읽힌다. 울고 설운 일이 있는 여자들이 뚜벅뚜벅 걸어들어가는 무한대의 바다가 있는 세상. 그렇게 매번 세상의 시원을 만졌다가 고개를 들고 물밖으로 나와 깊은 숨을 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다 잘되지 않겠니? - P189

선배는 실무관실에 연락해 일정을 조정한 다음, 예약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물론 법복을 가져가지는 않았다. 옷 안섶에 각자의 이름이 새겨진 그 옷을 선배는 유독 아꼈으니까. 그걸 입고는 사무실 의자에도 앉지 않았다. 그렇게 해야 입는 사람에게도 그 옷의 권위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법정을 나와 일상으로 돌아오면 당연히 벗어서 그 권위가 일상의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며 스스로 삼가는 것. 자신을 롤 모델로 삼지 말라는 선배의 말과는 달리, 나는 그런 선배에게서 어떤 마음을 옮겨 받고 있었다. - P201

"영초롱아, 저기 나무 보이니? 저게 새별오름에서 요즘 제일 유명한 ‘나 홀로 나무’다. 사람들이 그렇게 사진을 찍어 올린다더라, 오세가. 왕따 나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나 홀로랑 왕따랑 느낌이 참 다르지? 어쩌면 그게 그거처럼도 느껴지고."
"그래, 그게 그거 같다. 자의냐, 타의냐의 차이일 뿐."
"근데 그러면 엄청난 차이 아니냐? 스스로 하는 것과 시켜서 하는 것." - P213

우리 할망이 물질을 오래해서 귀가 안 좋았잖아. 그래서 크게 크게 소리를 질러서 말할 수밖에 없었어. 그러다보면 마냥 우울하고 슬플 수가 없었어. 할망! 나! 슬! 펏! 저! 소리치고 나면 슬픔이라는 게 아무것도 아닌 듯하고 그냥 숨 한번 크게 쉬고 나면 괜찮은 듯하고. - P215

"그래, 세상이 그럴 수 있지. 세상이 그렇게 보이고 그렇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 그런데 영초롱아, 너가 보는 것이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늘 생각했으면 한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에 불과하다고 네가 내게 멋진 말을 알려주지 않았니. 그렇다면 법을 통해 볼 수 있는 인간의 면면도 최소한에 불과한 거야. 회사는 자본이니까 너가 말한 대로 흘러갈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나란 사람도 그렇게 흘러간다고 너가 말할 수 있니? 주민들 중에 이참에 땅이고 집이고 다 비싸게 팔고 가버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하지만 섬을 지키기 위해 연륙교 착공을 힘 모아 저지한 일은 어떻게 설명할 거니? 몸 지지러 갔다가도 섬의 고넹이돌을 단번에 알아본 그 마음은 어떻게, 싹 무시하면 되는 일이니? 너는 최소한의 도덕을 다루지만 나에게는 너가 최선의 사람이라서 나는 늘 너가 좋았어.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도 들어. 어쩌면 한번 기울어진 채로 시작된 관계는 복구가 되지 않을지도." - P220

보낼 수 있다면 복자야, 나는 너에게도 이 박수를 보내고 싶다. 넘치도록, 자꾸 넘쳐서 네 머리맡에 그것이 고이도록, 그렇게 해서 너가 파도가 치나 아니면 태풍이 올 참인가 싶어서 잠결에 잠깐 눈을 뜨도록. 그러면 태풍이 올 리가 없으니 이 밤 아주 편안하게 자고 있던 흰둥이가 귀찮은 듯 네 방문을 잠깐 보고. - P230

"그래, 실패는 당연히 아니지만 그렇다면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이름을 붙인다고?"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사표를 낸 것과 너가 더 이상 상영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를 하지 않는 것."
영웅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한동안 생각하더니 "글쎄, 그런 건 인생을 더 깊이 용인한다는 자세 아닐까?"라고 결론 내렸다. 영웅의 그 말은 그 무렵 읽고 있던 볼테르의 책과 함께 내가 힘껏 잡고 놓지 않는 것이 되었다. - P233

내가 놀라웠던 건 볼테르의 마지막 물음이었다. "이렇듯 가장 거룩한 신앙심도 지나치면 범죄를 낳는다. 해서 어떤 이들은 자비나 관용, 그리고 신앙의 자유란 사실상 기만이라고 냉소하지만, 그러나 진정으로 반문하건대 자비나 관용, 신앙의 자유 자체가 과연 그같은 재앙을 초래한 적이 있었던가?" - P235

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이라도 냉동고에 넣으면 얼마든지 다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이 된다고 말할 줄 알았던 현명한 나의 친구, 복자에게. - P237

소설을 다 쓰고 난 지금, 소설의 한 문장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실패를 미워했어, 라는 말을 선택하고 싶다. 삶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실패는 아프게도 계속되겠지만 그것이 삶 자체의 실패가 되게는 하지 말자고,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선언보다 필요한 것은 그조차도 용인하면서 계속되는 삶이라고 다짐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는 그렇듯 버텨내는 자들에게 기꺼이 복을 약속하지만 소설은 무엇도 약속할 수 없어 이렇듯 길고 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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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별밤 에디션)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할머니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증조모와 새비 아주머니의 이야기는 여전히 내게 큰 울림을 준다. 함께였기에 견딜 수 있었던 시간들. 비록 그로 인한 고통이 있었더라도 서로의 존재가 주는 위로와 기쁨이 더 컸기에 그들의 만남은 충분히 따뜻했을 것이다.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던 새비 아저씨의 외침과 자신의 딸만큼은 멀리 나아가길 바랐던 새비 아주머니의 마음, 그리고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안고 먼 나라로 떠나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간 희자의 시간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과 용서하는 마음, 살생을 결행하는 것과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마음, 인간이 가진 수많은 형태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2021년을 마무리하며 밝은 밤을 만날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덕분에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 P14

어떤 말은 듣는 순간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는 걸 알게 한다. 내게는 엄마의 그 말이 그랬다. 엄마는 내게 전화를 해서 나의 이혼으로 엄마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얼마나 괴롭고 우울한지 호소했다. 심지어 내 전남편에게 연락해서 그의 행복을 빌어주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엄마의 눈에는 나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 P18

열일곱은 그런 나이가 아니다. 군인들에게 잡혀갈까봐 두려워하며 잠들지 못하는 나이, 아침마다 옥수수를 삶아 한 광주리를 이고 팔러 다녀야 하는 나이, 죽음을 목전에 둔 엄마의 공포와 노여움과 외로움을 지켜봐야 하는 나이, 영영 자기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예감을 하는 나이, 백정이라는 표식 때문에 길을 지나갈 때면 언제나, 어김없이 조롱당하고 위협당하는 나이, 엄마를 버려야 하는 나이, 엄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멀리서 소식을 들어야 하는 나이. 그렇지만 증조모의 열일곱은 그런 나이였다. 할머니는 증조모가 그 나이의 자신을 버리지 못한 채 계속 붙들고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 P47

할머니는 증조모가 고조모에게 느낀 감정이 죄책감일 거라고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지나면서, 고조모에 대한 증조모의 감정이 오로지 깊은 그리움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어리광 부리고 싶고, 안기고 싶고, 투정 부리고 싶고, 실컷 사랑받고 싶고, 엄마, 엄마, 하고 부르고 싶은 마음을 차곡차곡 접어둔 채로 살아왔을 뿐이라고. 증조모가 할머니를 보며 엄마라고 불렀을 때, 할머니는 고조모가 증조모에게 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기래, 가라.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그때 만나자. 그때 다시 만나자. - P47

나는 항상 나를 몰아세우던 목소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나만큼 나를 잔인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용인하는 일이. - P86

내가 새비 아주머니의 입장이었더라도, 나는 남편을 위해 그만큼 울었을 것이고 남편을 다시 만나서도 그만큼 행복했을 것이다. 전남편이 저버린 것은 그런 내 사랑이었다. 내가 잃은 것은 기만을 버리지 못한 인간이었지만, 그가 잃은 건 그런 사랑이었다. 누가 더 많은 것을 잃었는지 경쟁하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경쟁에서 나는 패자가 아니었다. - P99

‘넌 사랑받기 충분한 사람이야.’ 어느 날 말을 이을 수 없어 눈물만 흘리던 내게 지우가 그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내가 널 더 많이 사랑할게. 이제 사랑받는 기분이 뭔지도 느끼며 살아.’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듯이, 어떤 이유 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나는 지우를 보며 알았다. - P102

"새비 아주머니는 엄마의 상처였어. 그렇지만 자랑이기도 했지. 엄마를 크게 넘어뜨렸지만, 매번 털고 일어날 힘이 되어주기도 했으니까. 엄마가 새비 아주머니를 떠올리며 가장 많이 했던 얘기는 이거였어. 새비가 나를 얼마나 귀애해줬는지 몰라, 새비가 나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몰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 아픈 일이 많았는데도, 새비 아주머니를 기억하는 엄마의 표정은 늘 환했어. 꼭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말이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상처 같은 거 받지 않아도 됐겠지만 그래도 엄마는……"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는 삶을 택하셨겠네요."
"그래. 그게 우리 엄마야." - P116

그렇게 죽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희자 아바이가 말했어. 조선 사람이고 일본 사람이고 중국 사람이고 간에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사람은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다고. 사람이 저지른 일이야. 사람이 저지른 일이야. 희자 아바이는 내 손을 붙잡고서 그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어. - P123

희자 어마이, 전지전능한 천주님이 왜 손을 놓고 계신 기야. 나는 슬퍼만 하는 천주님께 속죄하고 싶지 않아. 천주님 앞에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말하고 싶지 않아. 천주님이 정말 계신다면 그때 뭐하고 계셨느냐고 따지고 들고 싶어. 예전처럼 무릎 꿇고 천주님, 천주님 감사합니다, 말하고 싶지 않아. 기래, 나를 살려주셨지. 기래서 감사하다고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 목숨은 뭐가 되나. - P124

혼자 돌담 아래 앉아서 아재비, 말을 걸고, 잘 지내시오, 아재비, 다시 말하고 그랬어. 내가 여든이 다 되도록 살면서 떠나보낸 사람들이 많아. 그런데도 그게 처음 겪은 죽음이어서 그런지 잊히질 않네. 분명히 가까이 있는데, 마음으로는 그렇게 지척인데 볼 수도, 만져볼 수도 없다는 게, 영영 없어져버렸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아. - P126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 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우주의 나이에 비한다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너무나 찰나가 아닐까. 찰나에 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인간이었던 걸까.
원자폭탄으로 그 많은 사람을 찢어 죽이고자 한 마음과 그 마음을 실행으로 옮긴 힘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이 빚어내는 고통에 대해, 별의 먼지가 어떻게 배열되었기에 인간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언젠가 별이었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신성의 파편이었을 나의 몸을 만져보면서.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 P130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에게는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게." - P134

예전처럼 며칠씩 서로 말도 붙이지 않을 정도로 신경전을 벌일 만한 일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없었다. 큰불이 나기 전에 꺼버렸고, 상대에게 작은 불씨를 던졌다는 것에 문득 무안해지기도 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그건 우리가 그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가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우리는 눈빛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정말 끝이 날까봐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 P137

그때 죽은 사람이 그 열 명만은 아니었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첫번째 영옥이도 그때 죽었고, 다시 태어난 영옥이는 그전의 영옥이와는 다른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증조모, 증조부, 할머니는 죽음으로 서로 헤어질 때까지 그날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셋 다 각자의 방식으로 조금씩 부서졌다. 겉으로 보아 가장 달라진 사람은 증조모였다. 증조모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약이 없이는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 사람을 쉽게 의심했고, 자신이 언제든지 아무렇게나 처리될 수 있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그 마음을 누구도 고쳐주지 못했다. - P141

나는 희자가 높은 하늘에 연을 띄우듯이, 기억이라는 바람으로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을 마음에 띄워 올리곤 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바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일이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으리라고 짐작하면서. - P152

고통 안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뒷걸음질쳤고 익숙한 구덩이로 굴러떨어졌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서린 두려움이 나를 장악했다. 나는 왜 내가 원하는 만큼 강해질 수가 없을까.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도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래 울던 밤에 나는 나의 약함을, 나의 작음을 직시했다. - P156

말이 끝나자마자 증조모가 할머니의 얼굴을 때렸다. 한 번, 두 번, 다음에는 머리를 쳤다. 바닥에 쓰러질 정도로, 증조부가 말릴 때까지. 아이는 더 이상 그들을 따라오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길을 걷다보니 해가 졌다. 그믐밤이었다. 별 무리가 아주 낮게까지 내려와 밝게 빛났다. 그걸 보면서 할머니는 생각했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라고. 짐승만도 못한 존재들, 천한 존재들,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라고. - P166

"너희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이런 계절이었어. 장례 치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도무지…… 안에 들어갈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여기 길가에 서서 계속 맴돌았어. 겁이 나더라고.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면 세상에 엄마가 없다는 게 진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계속 맴돌았지. 옛날 사람들 말이 맞아. 딸의 곡성은 저승까지 들린다고…… 그렇게 한 해를 괴롭게 지내다가 네가 놀러왔을 때 얼마나 반갑고 좋았던지 몰라. 세상에는 끝나는 것들만 있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너를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겠더라."
할머니가 개망초꽃을 손등으로 툭툭 쳤다. 지금 너도 남몰래 울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할머니의 말이 내게 꼭 그렇게 들렸다. 끝나는 것들만 생각하지 마. - P168

나는 엄마에게 죽은 언니와 놀았다고 말하던 날을 떠올렸다.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겪은 사람 앞에서 나의 진실을 떠벌리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엄마의 고통 앞에서 나의 진실은 가치가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엄마의 불행에 나의 불행을 견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거짓말을 했다. 괜찮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잘 자고 잘 먹고 있다고, 문제가 없다고. 나는 언제나 잘 웃는 아이였고, 자라서는 잘 웃는 어른이 됐다. 마음속으로 울고 있을 때도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 P171

할머니는 희자야, 라고 말하지도 못한 채로 자리에 주저앉아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반가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치받치던 두려움이 그제야 몸밖으로 빠져나왔기 때문이었다. 두려움이란 신기한 감정이었다. 사라지는 순간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니까. - P179

이런 갈등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엄마나 나나 서로에 대해 많은 걸 포기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다시 이렇게 부딪치게 된 걸까. 나를 방어하기 위해서 결국 엄마를 공격하게 되는 패턴을 반복하고야 말았다. 상처 주고 싶지 않았지만 끝내 자신을 꺾지 않고 나를 비난하는 엄마를 견딜 힘이 내게는 없었다. - P191

앞에서는 듣기 좋은 말을 하면서 뒤에선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 악의 없는 웃음을 보이면서 다른 마음을 품는 사람들이 흔하고 흔했다. 그런 모습은 어쩌면 인간이 지닌 보편적인 성질인지도 몰랐다. - P195

"어떻게 살았어요, 할머니? 그런 일을 겪고 어떻게 살 수 있었어요?"
나는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흘렸다.
"언젠가 이 일이 아무것도 아닌 날이 올 거야.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 그럴 거야."
할머니가 말했다. - P230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날 아침 의사가 내게 귀리의 죽음을 알렸을 때 느낀 감정이 슬픔만은 아니었음을 기억했다. 나는 안도했다. 나의 일부는 안도했다. 귀리의 고통이 이제 사라졌다는 사실에, 고통을 받는 그애의 모습을 보고 겪어야 했을 나의 괴로움이 끝났다는 사실에. 그 이기적인 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 P233

나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며 누군가에게 죽어버리라고 소리지를 수밖에 없는 마음을 생각했다. (...)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야, 그저 진심어린 사과만을 바랄 뿐이야,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랄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연기라도 좋으니 미안한 시늉이라도 해주면 좋겠다고 애처롭게 바라는 사람과, 그런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상처도 주지 않았으리라고 체념하는 사람과, 다시는 예전처럼 잠들 수 없는 사람과, 왜 저렇게까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내?라는 말을 듣는 사람과, 결국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벽을 마주한 사람과, 여럿이 모여 즐겁게 떠드는 술자리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음을 쏟아내 모두를 당황하게 하는 사람이 그 나라에 살고 있을 것이다. - P251

그는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 아래에 모두 평등하며 어느 누구도 더 존귀하거나 비천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존귀함과 비천함은 사람의 선택에 달렸으며 행동의 결과로 드러날 것이다. 증조모는 채 스물도 되지 않은 그의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가 우스우면서도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오리가 무리를 지어 날아갈 때 내는 소리처럼, 폭우가 호수 위에 쏟아지는 소리처럼, 바람이 길게 불며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처럼, 멀리서 들려오는 기차 소리처럼 증조부의 목소리는 증조모에게 다가왔다. 그때의 기억으로 증조모는 살아갔다. - P253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할머니는 희자를 생각하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배움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것, 아무것도 꿈꿔보지 않았다는 것, 결혼으로 도피하려 했다는 것, 일이든 사람이든 무언가를 위해서 단 한 번도 노력한 적이 없었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이 할머니는 그저 부끄러웠다. 할머니의 모든 선택이 그때로서는 합당하고 이치에 맞는 것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 P256

"저 징그러운 걸 어떻게 안 무서워해."
"난 좋아해."
엄마는 그것이 정말 중요한 문제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갯강구는 바닷가 돌 틈이나 방파제에 살면서 해변을 청소해."
엄마는 친구를 소개하는 듯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릴 때, 혼자 바닷가에 앉아 있을 때, 그렇게 부지런히도 움직이는 갯강구가 정답게 느껴졌어. 속으로 불렀지, 갯강구야, 하고. 나쁜 짓 하나 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너희들을 징그럽다고 끔찍하다고 말해." - P269

엄마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은 삶이라고 말했었다. 아빠와의 결혼으로 자신도 평범한 가족을 꾸리게 되어서 좋았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런 말을 습관적으로 하던 엄마를 예전에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머릿속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그 안에 평범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 두드러지지 않은 삶, 눈에 띄지 않는 삶, 그래서 어떤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고, 평가나 단죄를 받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 동그라미가 아무리 좁고 괴롭더라도 그곳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엄마의 믿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잠든 엄마의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 P271

"착하게 살아라, 말 곱게 해라, 울지 마라, 말대답하지 마라, 화내지 마라, 싸우지 마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그런 얘길 들어서 난 내가 화가 나도 슬퍼도 죄책감이 들어. 감정이 소화가 안 되니까 쓰레기 던지듯이 마음에 던져버리는 거야. 그때그때 못 치워서 마음이 쓰레기통이 됐어. 더럽고 냄새나고 치울 수도 없는 쓰레기가 가득 쌓였어.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나도 사람이야. 나도 감정이 있어." - P278

되는대로 아무 상호나 대고는 번호를 안내해주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정말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만 114를 눌렀다. 혹시나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잠시라도, 아주 잠시만이라도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나와 같은 마음으로 114를 누를 아이들을 상상했다. 실패할 것이 분명한 전화를 거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런 상상을 할 때만큼은 나는 온전한 혼자가 아니었다. - P281

새비 아주머니의 시선은 증조모의 몸을 지나서, 마음을 지나서, 어쩌면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에까지 다다랐다. 그곳에서, 아직 다섯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증조모는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돌멩이를 안고서 내 동무야, 내 동무야, 말을 걸고 있다. 그런 작은 따뜻함이라도 간절해서, 하지만 사람은 너무 무서워서. 증조모는 마당 구석에 쪼그려앉아서 자기 그림자를 보고 있다.
그때 자신이 누구를 부르는지도 모르고 간절히 부르던 사람이 바로 새비 아주머니였다는 사실을 증조모는 그녀의 시선 속에서 이해했다. 너레 내 목소리를 들어주었더랬지. 내가 한 음식을 먹고 맛이 있다고 이야기해주었어. 너는 내를 삼천이라고 불러주었어. 새비 너는 내를 삼천이라 불러줬었어. - P288

안정을 추구했던 그 시간 동안 나는 성장하지 못했다. 독에 갇힌 나무처럼 가지를 마음껏 뻗어나갈 수가 없었다. 고립되었다.
(...) 나는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나.
나에게, 내 인생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알고 싶지 않아서,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어둠은 거기에 있었다. - P299

내 어깨에 기댄 여자는 편안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었다. 청명한 오후였다.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좋았다.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자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별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깨에 기대는 사람도,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도. 구름 사이로 햇빛이 한 자락 내려오듯이 내게도 다시 그런 마음이 내려왔다는 생각을 했고, 안도했다. - P299

‘맞서다 두 대, 세 대 맞을 거, 이기지도 못할 거, 그냥 한 대 맞고 끝내면 되는 거야.’ 나는 그 말을 하던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너를 괴롭힌다고 똑같이 굴면 너도 똑같은 사람 되는 거야.’ ‘그냥 너 하나 죽이고 살면 돼.’ 패배감에 젖은 그 말들. 어차피 맞서 싸워봤자 승산도 없을 거라고 미리 접어버리는 마음. 나는 그런 마음을 얼마나 경멸했었나. 그런 마음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발버둥쳐야 했었나. 그런 생각을 강요하는 엄마가 나는 미웠다. 그런 식의 굴욕적인 삶을 원하지 않는다고 저항했다. 하지만 왜 분노의 방향은 늘 엄마를 향해 있었을까. 엄마가 그런 굴종을 선택하도록 만든 사람들에게로는 왜 향하지 않았을까. 내가 엄마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다면, 나는 정말 엄마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내 생각처럼 당당할 수 있었을까. 나는 엄마의 자리에 나를 놓아봤고 그 질문에 분명히 답할 수 없었다. - P313

"그래, 똥강아지. 걔가 얼마나 감탄을 잘했는지 몰라. 작은 개구리 하나를 봐도 우와, 커다란 소라 껍데기를 봐도 우와, 늘 우와, 우와, 하는 거야. 그런데 그건 너도 그렇더라. 언니를 보고 커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쩌면 우리 엄마로부터 이어졌는지도 몰라.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그렇게 감탄을 잘하니 앞으로 벌어질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받아들일까 싶었어.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우와, 하면서 살아가겠구나. 그게 나의 희망이었던 것 같아." - P316

어머니는 자기 신념이 강했고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사람이었어요. 나를 데리고 늦가을에 대구로 피난을 가는데 어머니가 바들바들 떨던 것이 기억나요. 자꾸 농담을 하면서. 나는 어머니가 추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떨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어머니는 일평생이 그런 식이었죠. 바들바들 떨면서도 제 손을 잡고 걸어갔어요. 어머니는 내가 살면서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어요. 무서워서 떨면서도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 나는 어머니를 닮고 싶었어요. - P333

그래, 우린 끝이 났어. 마지막으로 영옥이 언니를 보고 오던 길에 했던 그 날카로운 다짐조차도 영옥이 언니와 내가 나눴던 마음을 잘라낼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요. 우리가 서로를 영원히 알아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은 젊은 나를 절망하게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지금의 내게는 위안이 되네요. - P334

김희자 박사에게 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가라고 했던 새비 아주머니의 말을 나는 종종 생각했다. 그 말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을 뜻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딸이 다른 차원으로 가기를 바랐던 마음이었겠지. 본인이 느꼈던 현실의 중력이 더는 작용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딸이 더 가벼워지고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던 새비 아주머니의 마음을 나는 오래 생각했다. - P335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삶의 모든 순간을 오감을 다 동원해 기록할 수 있고 무수한 생각과 감정을 모두 담을 수 있는 레코드가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삶의 크기와 같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가시권의 우주가 얼마나 큰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안에도 측량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할 테니까. 나는 할머니를 만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사실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나는 나를 너무 쉽게 버렸지만 내게서 버려진 나는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그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P336

내게는 지난 이 년이 성인이 된 이후 보낸 가장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절반 동안은 글을 쓰지 못했고 나머지 시간 동안 『밝은 밤』을 썼다. 그 시기의 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누가 툭 치면 쏟아져내릴 물주머니 같은 것이었는데, 이 소설을 쓰는 일은 그런 내가 다시 내 몸을 얻고, 내 마음을 얻어 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 P341

삼 년 만에 책을 낸다. 소설이 책이라는 몸을 입을 때 나는 늘 이별하는 기분을 느낀다. 『밝은 밤』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무사히 도착하기를, 자신만의 생명으로 누군가의 마음에 잠시나마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내 역할은 작가의 말을 쓰는 지금 여기까지인 것 같다. 책은 책의 운명을 살 것이다.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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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만우절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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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치에 물총을 쏴달라는 여자, 풍선 간판을 칼로 찢으며 그 순간을 좋아했던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던 남자, 0부터 9까지 심호흡을 하면서 온 힘을 다해 자신만의 역기를 드는 남자, 나도 모르는 내 영혼을 당신이 어떻게 아는 거냐며 꽃다발로 사람을 때리던 여자, 이상한 놈이 되는 건 버튼 하나로 왔다 갔다 하는 스위치 같은 거라던 삼촌.

 

우리는 그렇게 애를 써서 그냥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 슬프고 외롭고 시시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우리에게 가끔은 얼음이 되어도 괜찮다고,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이 한 마디는 따뜻한 위로가 된다.



오빠는 따뜻한 신발을 신고 눈길을 걸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고 했다. 나는 따뜻한 신발을 신고 길을 걷다보면 낯선 곳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고 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내 말을 들은 오빠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따뜻한 신발 덕분에 오빠는 자신감이 넘치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책임감 강한 아버지가 되었다. 따뜻한 신발을 신고 동화 속 주인공을 상상하던 나는 뭐가 되었을까?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적절한 단어를 떠올려보았다.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 P55

이번이 여섯 번째네.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네 번의 절교와 한 번의 파혼을 당했다. 네 번의 절교와 한 번의 왕따를 당한 뒤 선물처럼 찾아온 단짝 친구의 죽음과 아버지의 죽음을 겪었다. 두 번이나 이직을 했고, 스트레스로 탈모를 겪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여섯 번째로 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렇게 애를 써서 나는 그냥 어른이 되었다. 그 생각을 하자 헛웃음이 나왔다. 구급대원이 내 입에 귀를 가까이 대고 물었다. "뭐라고요? 방금 뭐라 말했나요?"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추워요." - P59

나는 벤치 뒤에 웅크리고 앉아서 물총을 쏘는 아이에게 말했다. "할머니한테 한 번만 쏴줄래?" 아이가 어리둥절해했다. "더워서 그래. 여기에 맞혀봐." 나는 손가락으로 명치를 가리켰다. 아이가 머뭇거리더니 물총을 들었다. 다른 두 아이가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이 할머니가 물총에 맞고 싶대." 아이가 친구들에게 말했다. 미끄럼틀 뒤에 숨어 있었던 아이가 그럼 그러자,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내 가슴을 향해 물총을 쏘았다. 차가웠다. 나머지 아이들도 따라서 물총을 쏘았다. 처음에 머뭇거리던 아이가 가장 신나게 총을 쏘았다. 옷이 흠뻑 젖었다. "이제 시원해요?" 아이들이 물었다. - P86

눈을 감았다 떴다. 똑딱. 빛이 지구를 일곱 바퀴 돌았을 것이다. 또 눈을 감았다 떴다. 똑딱. 그건 딸이 어렸을 때 내게 알려준 거였다. 엄마, 눈 한 번 깜빡일 시간에 빛이 지구를 일곱 바퀴나 돈대. 딸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눈을 감았다 뜨곤 했다. 눈 깜빡할 시간. 그 시간에 빛이 지구를 몇 바퀴나 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고민은 하찮게 느껴진다고 했다. - P96

사람들한테는 고시 공부중이라고 거짓말을 했지만 사실 아무것도 안 해요. 청년이 말했다. 나는 그래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가만히 있는 것도 힘든 거라고. (...) 내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진 적이 있었거든요. 나는 청년에게 말했다. 그때 딸이 내게 말했다. 엄마, 얼음 하고 외쳐. 그래서 나는 얼음 하고 말했다. 삼십 분이 지나도 한 시간이 지나도 딸은 땡을 외쳐주지 않았다. 딸이 땡을 해주길 기다리면서 나는 종일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 되었고 그제야 딸이 내 손을 잡으면서 땡 하고 말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시원하게 오줌을 누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 가끔 얼음이 되어야겠다고. 나는 청년에게 지금은 술래를 피해 얼음이 된 거라고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곧 누군가 땡 하고 외쳐줄 거라고. 얼음땡 놀이는 그런 거라고. 누군가 땡 하고 말해줘야 집에 갈 수 있는 거라고. 그러자 청년이 웃었다. 흐흐흐, 그렇게 웃었다. - P109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다. 화가 났는데 어떻게 화를 내야 할지 몰라 또 화가 났다. 나는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엄마는 작년에 담임선생님한테 그렇게 말했다. 화 한 번 낸 적 없는 착한 아들이라고. 엄마와 면담을 마친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화를 내고 싶으면 내도 된다고. 그 말에 하마터면 나는 화가 나려고 하면 허벅지를 손으로 꼬집는다고 고백할 뻔했다. 손이 움직이지 않으니 허벅지를 꼬집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는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놀이를 했다. 어릴 때 엄마한테 혼나면 나는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 놀이를 했다. 열여섯 살인 나. 열다섯 살인 나. 열네 살인 나…… 그렇게 나이를 한 살씩 줄이다보니 어느새 갓난아이인 내가 보였다. 그 갓난아이를 다시 엄마의 뱃속으로 넣어보았다. 어둡고 축축한 곳으로. 지금 죽는다면 나는 평생 시시하게 살다 죽는 거겠지. 세상엔 시시한 게 많지만 그중 가장 시시한 건 나였다. 그 생각을 하자 눈물이 났다. - P187

어렸을 때 나는 풍선 간판을 몰래 찢은 적이 있었다. 부모님이 차린 김밥집이 망한 다음이었다. (그해 우리 가족은 지겹게 김밥을 먹었다. 누나는 투덜대며 안 먹었지만 나는 하루 세끼를 먹었다. 묵은지김밥. 그건 정말 맛있었다. 그렇게 맛있는데 왜 장사가 안된 걸까?) 그 자리에 피자집이 생겼다. 오픈 날 사람 모양의 커다란 풍선이 가게 앞에서 춤을 추었다. 두 팔을 흔들면서. 다음날 가보았더니 여전히 풍선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다. 우리가 망한 자리에서 풍선이 신나게 춤을 추어서. 풍선을 찢은 날 나는 일부러 비를 맞았다. 감기에 걸리고 싶어서.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을 때 통쾌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런 내가 무서웠다. 아이가 찢은 의자에 앉으면 풍선 간판을 찢던 그때가 자꾸 생각났다. 그럴수록 거기에 앉았다. 내가 미워서. - P189

할머니가 왜 내게 숫자를 말해주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배꼽에 힘을 주고 숫자를 외우라는 말. 그렇게 외우다보면 0부터 9까지 모든 숫자들이 혈관을 따라 내 몸을 돌고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발가락을 상상했다. 나는 흉터가 있는 오른쪽 종아리를 상상했다. 튀어나와 친구들의 놀림을 받는 배꼽을 상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 코 입을 상상했다. 누나랑 나는 별명이 똑같았다. 단춧구멍. 아빠 빼고 우리 가족은 눈이 다 작았다. 그렇게 작은 눈인데…… 세상에, 눈꺼풀이 너무나 무거웠다. 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릴 수만 있다면 앞으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역도 선수가 되는 상상을 했다. 내 역기는 봉 양쪽에 동그란 눈꺼풀이 달려 있다. 십 킬로그램짜리 눈꺼풀이. 나는 역도 선수다. 나는 국가대표다. 나는 대회 결승전에 진출했다. 결승전 경기에 나선 나는 0부터 9까지 천천히 숫자를 세면서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숨을 멈추고 온 힘을 다해 역기를 든다. - P195

외로워서 감기에 걸리는 게 아니라 감기에 걸리니 외롭다는 생각이 드는 거라고. 며칠 후에 그 문장 아래에 누군가 이런 글을 적어놓았다.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음.’ - P215

지하철역으로 들어가 열차를 기다리는데 젊은 여자 둘이 다가와 언니에게 영혼이 맑아 보인다는 말을 했다. "그 말에 갑자기 화가 났어. 나도 모르게 여자를 밀었지." 두 여자 중 한 여자가 넘어졌다. 언니는 들고 있던 꽃다발로 넘어진 여자의 얼굴을 때렸다. 붉은 장미가 떨어지고, 분홍 장미가 떨어지고, 노란 장미가 떨어지고, 마지막으로 안개꽃이 날렸다. 꽃다발을 휘두르면서 언니는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니가 내 영혼을 어떻게 알아. 나도 모르는데." 언니는 미리를 낳을 때까지 매일 그 일을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그런데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뭐랄까,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아. 블랙홀 같은 거. 조금만 잘못해도 그 안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어." 언니는 말했다. - P247

그해, 휴가를 나와 같이 잠을 잤던 사흘 동안 삼촌은 군대에서 만난 이상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듣다보면 정말 그렇게 나쁜 사람이 있을까 싶은 이야기투성이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내가 잠을 자려고 하면 삼촌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왜? 잠결에 물으면 삼촌은 웃으면서 말했다. 인마, 불 꺼. 나는 졸린 걸 참고 간신히 일어나 스위치를 껐다. 불이 꺼졌다. 그러면 삼촌은 늘 이렇게 말했다. 스위치 같은 거야. 그렇게 이상한 놈이 되는 건. 버튼 하나로 왔다갔다하는 거지. 그러니 스위치를 잘 켜고 있어야 해. 그 말을 할 때 삼촌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마치 내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러 온 사람처럼.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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