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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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책을 읽기 전에도 다 읽은 후에도 참 다정한 제목이란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포함해서 총 14개의 단편들을 담고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짧은 분량으로 인간의 깊은 내면을 모두 담아낼 수 있었는지 읽는 내내 감탄스러웠다.

 

여기 나오는 이들은 모두 평범한 이들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인간 본연의 모습은 날카롭고 서늘하다. 그래서 앨리스 먼로가 그리는 인간들이 우리와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낯선 곳을 서성거릴 때, 어두운 감정들에 짓눌려 숨이 막힐 때, “사람들은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한단다.”라고 말하던 목소리를 떠올려본다.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봐. 넌 할 수 있어. 하다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 주변 상황과는 아무 상관없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넌 모를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라고 말하던 또 다른 목소리도 떠올려본다. 그럼 그들을 통해 전하려고 하는 앨리스 먼로의 따뜻한 위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416p) 



흐름을 따라가는 것. 자신을 내맡기는 것.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내맡기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다. 머리의 안쪽과 바깥쪽 사이에 세워진 벽이 무너져야 했다. 진실함에는 그것이 요구 되었다. - P29

내 가족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뭐든 어중간한 진실은 그들을 죽일 수 있으니까요. - P31

객차들 사이에는 다른 객차로 넘어갈 수 있는, 각 객차들을 연결하는 짧은 통로가 있었다. 그곳에 서면 기차의 움직임이 갑작스럽고 무섭게 느껴졌다. 뒤에도 무거운 문이, 앞에도 무거운 문이 있었고, 통로 양쪽에는 덜컹거리는 금속판들이 있었다. 그 금속판들이 기차가 정차할 때 내려지는 계단을 가려주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통과할 때 늘 걸음을 서둘렀다. 덜컹대는 소리와 흔들림은, 결국 세상 모든 것이 그리 필연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사람들은 무심한 듯, 하지만 다급하게 덜컹대는 소리와 흔들림을 통과한다. - P35

객차들 사이 시끄러운 공간에 망연히 앉아 있는 케이티. 울지도 않고, 칭얼거리지도 않고, 어떤 설명도 희망도 없이 그곳에 영원히 앉아 있어야 하는 것처럼. 묘하게 표정이 없는 눈동자와 살짝 벌어진 입, 그러다 아이는 자기가 구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울기 시작한다. 그제야 아이는 자기 세상을 되찾는다. 괴로워하고 불평할 권리를 되찾는다. - P37

그들 중 누구도 어떤 종파의 일원이나 엄격하고 까다로운 사람들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를 잠깐 보고 어떻게 그런 것을 장담할 수 있겠는가? - P37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 - P88

그녀는 줄곧 존재해왔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사라졌다. 존재한 적조차 없는 것처럼. 사람들은 현명하게 잘 처리하면 이 충격적인 사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부산스레 돌아다녔다. 그 역시 관습을 따르며 서명하라는 곳에 서명을 했고, 그들의 말대로 유해를 처리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유해遺骸’라니 얼마나 굉장한 말인가. 찬장에 남겨져 켜켜이 그을음을 묻히며 말라간 무언가처럼. - P117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그가 말했다.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봐. 넌 할 수 있어. 하다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 주변 상황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넌 모를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
이제, 안녕.
그가 어떤 의미로 그 말을 했는지 나는 안다. 그러는 것이 정말로 옳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 카로는 여전히 물을 향해 달려가 의기양양하게 자기 몸을 던지고, 나는 여전히 그것에 붙들려 있다. 그녀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기다리면서, 첨벙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리면서. - P142

무슨 일이든 잘 풀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러니까, 세상 모든 일이 그에게 불리한 쪽으로만 일어나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삼진 아웃으로 모자라 이십진 아웃까지 당한다. 하지만 결국 나중에는 나아진다. (...) 의지만 있다면 어떤 일도 좋게 만들 수 있다. - P175

무엇보다 끔찍했던 것은 캐나다와 뉴펀들랜드 사이, 우리 해안과 가까운 바다에서 민간인을 태운 페리가 침몰한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어 타운의 거리를 배회했다.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사람들이 자꾸 생각났다. 뜨개질을 하고 있던, 내 어머니만큼 나이가 들었을 노부인들, 치통을 앓는 꼬마. 죽기 전 마지막 삼십 분을 뱃멀미로 툴툴거리느라 다 써버렸을 사람들. 나는 한편으로는 공포와 한편으로는-최대한 비슷하게 묘사한다면-서늘한 흥분이 뒤섞인 아주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날아가고, 한순간에 나 같은 사람들이나 나보다 더 못한 사람들이나 그들 같은 사람들이나 모두 평등-이렇게 말해야겠다-평등해진다. - P183

지금 생각하면 내 학창 시절은 내가-내 얼굴이-어떻게 보이는지에 익숙해지다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익숙해지다가 다 가버린 것 같다. 내가 새로운 사람들과 끊임없이 부대끼지 않고도 이곳에서 살아남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 그리고 이곳에서 용케 버텨낸 것을 나는 작은 승리라고 생각한다. - P189

그때 나는 생각했다. 오래 살다보면 많은 문제들이 그냥 해결된다고. 선택된 사람들만 들어가는 모임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어떤 장애를 가지고 살았건 그 시기에 이르면 많은 문제들이 상당수 해결된다. 모두의 얼굴이 고통을 경험했다. 당신의 얼굴만이 아니라. - P197

내가 그해의 문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미지의 세계로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내게 빛을 주세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어둠으로 나가 신의 손을 잡으시오. 그것이 그대에게 빛보다 더 좋고 알려진 길보다 더 안전할 것이오." - P276

모든 것은 가두어 잠가버릴 수 있다. 그러는 데 필요한 것은 단지 결심뿐이다. - P278

내게 일어난 일은 드문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책에 없다면 진짜 인생에는 있을 것이다. 그 문제를 다루는 상투적인 방법이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걷는 것도 물론 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걸음을 멈춰야 할 때가 있었다. 이런 규모의 타운에서조차 자동차와 빨간 신호등 때문에 멈춰야 했다. 가다 서다 하며 어설프게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었고,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처럼 떼지어 돌아다니는 학생들도 있었다. 왜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는지,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며 바보같이 구는지, 쓸데없고 불필요한 존재들이 넘쳐났다. 어느 곳에나 노골적인 모욕이 흘러넘쳤다.
상점과 간판처럼, 섰다 출발하는 자동차 소음도 모욕이었다. 어디에서나 이것이 삶이라고 외쳐댔다.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하다는 듯이, 더 겪어봐야 한다는 듯이. - P323

"우리는 싸울 여력이 없어." 그가 말했다.
참으로 그렇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늙었는지 잊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잊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세상에는 늘 괴로워할 것과 불평할 것이 존재한다. - P330

우리는 스스로가 꽤 건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그냥 죽을 수도 있다. - P330

무언가를 다 하고, 끝내고, 마무리를 할 때 들리는 일상적인 소음이 사라지고 나면 집은 낯선 장소가 되어갔다.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일들이 잠잠히 가라앉고, 그들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의 쓰임새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가구들도 모두 그 자체의 세계로 물러났다. 더는 누군가의 관심을 받기 위해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해방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아마 그랬을 것이다. 자유. 낯선 느낌. 하지만 내가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아지고 결국 새벽이 될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자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 P360

서쪽으로는, 길게 휘감아 도는 강과 들판과 나무와 일몰이 가로막히는 것 없이 다 보였다. 사람들과 얽혀들 일도 없고, 일상적인 생활도 영원히 없을 것 같았다. - P363

사람들은 어떤 생각들을 하지만 그것들은 이내 사라진다. 살다보면 그렇게 된다.
요즘에는 부모 노릇을 오래 하다보면 실수인 줄 아는 실수뿐 아니라 딱히 실수인 줄 모르는 그런 실수도 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면 내심 얼마간 초라해지고 이따금 스스로에게 혐오감을 느끼기도 한다. - P369

나는 페기를 울린 일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했을까? 그때는 그 질문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나는 용감하지 않았다. 처음 다녔던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가 나를 쫓아와 돌멩이로 맞히면 나는 울었다. 타운의 학교에서 선생님이 엉망진창으로 지저분한 내 책상을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나만 혼자 교실 앞으로 불러냈을 때도 울었다. 선생님이 그 문제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어머니가 전화를 끊은 뒤 내가 자랑스러운 딸이 아니라는 사실에 참담한 심정을 견디며 흐느꼈을 때도 나는 울었다.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용감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누군가 페기에게 무슨 말을 했을 테고, 페기도 나와 마찬가지로 뻔뻔하지 않아서 훌쩍였을 것이다. - P387

이 나라에 폭격 훈련을 받으러 왔던, 폭격 도중 대부분 죽음을 맞게 될 그 청년들은 아마도 콘월이나 켄트, 헐, 스코틀랜드의 평범한 억양으로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들이 입을 열면 곧바로 축복의 말이 쏟아질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 앞에 놓인 미래가 재앙뿐이라는 사실, 평범한 그들의 생명이 창밖으로 날아가 땅에 부딪혀 박살날 거라는 사실은 내게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 축복에 대해, 그런 축복을 받는다면 얼마나 근사할지에 대해, 그럴 가치가 없는 페기라는 여자가 그런 행운을 누린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지에 대해 생각했다.
(...) 그리고 그들이 아직 완전히 여물지 않은 내 에로틱한 환상 속에 머물러 있는 사이, 그들은 떠나버렸다. 그들 중 몇몇이, 대부분이, 영원히 떠나버렸다. - P388

그 딸은 한동안 내가 어른이 되어 살던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았다.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써 보낼 수도 있었고, 어쩌면 찾아가볼 수 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나의 어린 식구들과 한결같이 불만족스러웠던 내 글쓰기 때문에 바쁘지만 않았다면. 하지만 그때 내가 정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사람은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내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리고 장례식에도 나는 집에 가지 않았다. 내게는 어린 자식이 둘 있었는데 밴쿠버에는 아이를 맡길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거기까지 갈 경비가 없었고 내 남편은 의례적인 행동을 경멸했다. 하지만 그것이 왜 그의 탓이겠는가. 내 생각도 같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 P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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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사샤 세이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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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려고 노력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 자신이 한없이 하찮고 형편없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이런 우울하고 무기력한 순간들이 찾아오면 순식간에 무거운 감정에 둘러싸여 나 자신에게 못된 마음을 품게 되기도 한다.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는 그런 우리들에게 이런 나라도 괜찮다고, 나만큼 놀랍고 경이로운 존재는 없다고 따스한 말로 위로하고, 다친 마음을 다독여준다. 그 속에는 감탄하고 감동하고 감사하는 마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마음, 용서하고 믿어주고 사랑하는 마음, 봄의 축복에 기뻐하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이 마음들은 앞으로도 봄처럼 따뜻하게 나를 지탱해 주는 토대가 될 것이다.


  

사실이기를 바란다고 해서 사실이라고 믿어버리면 위험해. - P10

우리처럼 작은 존재가 이 광대함을 견디는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다. - P14

무언가를 ‘믿지 않는다’라는 말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는 뜻은 아니다. 존재한다는 증거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을 보류한다는 뜻이다. 신이나 내세 같은 종교적 요소에 대한 내 생각도 아버지가 외계인에 대해 갖는 생각과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아니다"라고 했다. 다시 말해 증거가 없으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는 말이다. - P35

내게는 이 모든 혼돈 속에서 어떻게든 당신이 당신이 되었다는 생각만큼 놀랍고 경이로운 건 없는 것 같다. - P41

우리 각자가, 살아서,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게 되기까지, 우리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도달하기까지 있었던 그 모든 일에 대해 나는 경이를 느낀다. - P46

어쩌면 우리는 봄을 사랑하게끔 진화했는지도 모른다. 봄이 왔다는 것은 이제 위험을 벗어났으며 얼어 죽거나 굶주릴 가능성이 줄어들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모든 것이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죽음에 대한 근원적 공포를 누그러뜨릴 수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봄의 기쁨은 신앙이나 교리 같은 것과 무관하게 누구든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 - P66

어떤 주제와 상징들이 수천 년을 넘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은 근사하고 감동적인 일이다. - P74

삶의 아주 사소한 신비들까지도 다 찬미하면서 살 수 있다면 우리 일상은 얼마나 많이 달라질까? - P91

과학은 모호함을 허용해야 한다.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믿음을 유보해야 한다. 불확실성 때문에 짜증이 날 수도 있겠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더 많은 데이터를 축적하게 된다. - P98

결국은 우리의 취약함이 우리가 무언가 더 깊은 것에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사랑도 그렇고. 오류를 기꺼이 인정한다면, 예측이나 선입견을 과감히 놓아버릴 수 있다면,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에 다가갈 수 있다. - P107

죽음을 통해 우리는 삶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무언가의 부재를 겪지 않고는 그것의 진짜 가치를 알 수가 없다. 우리가 헛발질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속죄하지 않고는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없듯이. - P126

삶이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게 아니라,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느낄 수가 있었다. 이게 나에게는 어른이 되었다는 징표 같았다. 나는 모르는 게 약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아는 것이 축복이며, 기쁨을 얻으려면 때로 공포를 직접 마주해야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우리의 시간은 얼마나 짧은지를 진심으로 인정하고도 삶을 사랑할 수 있게 되자, 진짜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성장의 정의에 ‘두려움을 마주한다’는 의미가 들어가기도 한다. 무언가 힘든 일을 하고, 자신을 해방하고, 내 운명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일이 성인이 되는 관문이다. - P141

어떤 정보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고 해서 그 정보를 계속 머리에서 밀어내지 않게 되었다. 아니 적어도 덜 밀어내게 되었다. 그게 나에게는 성장을 향한 큰 걸음이었다. 그러려면 환상을 버려야 했고 그래서 고통스러웠다. 한편으로는 그 덕에 더 깊은 현실감을 얻었으니 잘된 일이다. 사람은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나름의 방법으로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 애착담요를 버리고, 세상의 무시무시한 경이를 향해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 P143

"사실 우리도 시간여행을 하는 거야." 아빠는 말하곤 했다. "일 초씩 미래로!" - P154

책이란 얼마나 놀라운 물건인가. 나무로 만든 납작하고 잘 휘어지는 물건인데 그 안에 검은색 선이 꼬물꼬물 우스운 모양으로 찍혀 있다. 그런데 그 물건을 한번 들여다보면 어느새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 사람은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일 수도 있다. 저자가 수천 년의 세월을 넘어 조용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당신의 머릿속에서 말을 건다. 글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일 것이다.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 멀리 떨어진 시대에 사는 사람들을 하나로 이어준다. 책은 시간의 굴레를 벗어난다. 책은 인간이 마법을 부릴 수 있다는 증거다. - P156

내가 아버지한테로 시간여행을 하는 방법이 한 가지 더 있다. 어릴 때 아버지가 대기 중의 공기 입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변함없이 그대로이기 때문에 우리는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과 같은 공기로 호흡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요새도 가끔 그 생각을 한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이 공기 입자 중 일부가 아버지가 들이마시고 내쉬었던 공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공기를 들이마신다니 얼마나 친밀한 행위인가. - P159

나는 우리에게 옳은 것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옳을 수는 없다는 걸 안다. 옳은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 쓸 수 있는 유일한 잣대는 그로 인해 다치는 사람이 있나?라는 질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P235

납골당에는 방이 여섯 개 있는데 전부 아주 오래전부터 카푸킨 수도회 구성원들의 유골을 재료로 써서 아주 정교하게 장식해놓았다. 정강이뼈, 종아리뼈, 넓적다리뼈의 방. 엉치뼈, 엉덩뼈, 꼬리뼈의 방. 해골의 방. 수천 개의 인체조각. 지금 우리 몸안에 있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마지막 방에는 여러 언어로 이런 문구가 적힌 액자가 있었다. 지금 당신의 모습은 우리의 과거이고, 지금 우리의 모습은 당신의 미래다...... - P278

플레이아데스성단의 별 일곱 개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머릿속에서 밀어내는 대신에, 두려움을 무시하는 대신에, 두려움을 존중하고 두려움에 관해 이야기하고 빛이 사라지기 전까지 빛을 조금이라도 더 즐겨야 한다. - P279

너희한테 들려줄 아주 멋지고 대단하고 짜릿한 사실이 있어. 너무 거대하고 장대해서 어떤 인간도 멈출 수가 없는 일이야. 내일부터 다시 낮이 조금씩 길어질 거고, 서서히 다시 꽃이 필 거고, 햇살이 돌아올 거야. 여름이 다가오고 있어. - P311

삶에서 상실을 마주할 때마다 이전의 모든 상실을 다시 겪는다. 하나하나의 작별은 다른 모든 작별이다. (...) 이 상실들이 모두 하나로 이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이 모든 일이 내 삶의 최초의 슬픔으로 나를 끌고 간다. 나의 아버지의 죽음. - P333

우주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든 우리가 태어났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기쁨을 느낄 것이고 고통을 느낄 것이고 거대하고도 광활한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로서의 존재를 다양하게 경험할 것이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건 간에, 우리는 여기에 있었다. 각각의 삶의 기록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힐지라도 우리가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우리는 살았다. 우리는 이 거대함의 일부였다. 살아 있음의 모든 위대함과 끔찍함, 숭고한 아름다움과 충격적 비통함, 단조로움, 내면의 생각, 함께 나누는 고통과 기쁨. 모든 게 정말로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광대함 속에서 노란 별 주위를 도는 우리 작은 세상 위에 있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축하하고도 남을 이유가 된다. - P342

몇 주 뒤, 내가 헬레나에게 줄 채소를 찌다가 돌아보니 헬레나가 유아용 의자에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가장 가까운 별의 도움으로 땅에서 자라난 음식을 헬레나가 더 크게 자라는 데 쓸 에너지로 바꿀 수 있게 준비하고 있었다.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의 결과로 가능해진 일이다. 헬레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가 사소하고 일상적인 의식을 수행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반쯤 신성한 과업을 수행하는 나의 모습이 헬라나의 뇌에 각인되는 중이었다. 언젠가 나는 사라질 테지만, 헬레나는 나를 기억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나는 헬레나 뇌의 뉴런 안에서, 그리고 핏속의 세포 안에서 조금 더 살 수 있을 테니까. - P349

남편 존, 내 평생의 사랑, 나는 어쩌면 이렇게 운이 좋을까. 변하지 않는 무조건적 사랑과 수없는 격려의 말과 한없는 인내심과 믿음에, 매일매일을 축하할 만한 날로 만들어준 것에 감사해. 당신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 광대한 시간 속에서 눈 한 번 깜짝할 만한 순간이라도 나에게는 충분해. - P358

우리 각자가, 살아서,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게 되기까지, 우리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도달하기까지 있었던 그 모든 일에 대해 나는 경이를 느낀다. -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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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하와이 에디션)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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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를 읽으며 부러울 정도로 멋진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아픔을 겪는다. 이 가족 또한 겉은 화려하고 편안해 보여도 구성원 각자에게 아픔이 있다.

 

시선의 삶은 고통스럽게 시작했지만, 끝은 아름다웠다. 시선 같은 어른이 되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살아있을 때도 이 생을 떠났을 때도 남은 이들에게 큰 힘이 되는 존재. 시선에게 애방이 그러했듯, 우리에겐 시선의 존재가 그렇다. ‘시선이라는 강인하고도 단단한 사람으로부터 뿌리내린 이 가족 또한 앞으로의 역경을 잘 이겨낼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의 시작하는 장마다 실려 있던 시선의 인터뷰와 책의 인용문들이 아주 인상 깊었다. 실제로 이 분의 책이 남아있다면 한 권씩 한 권씩 아껴가며 읽을 텐데. 이 부분에 대해선 책을 다 덮은 지금도 아쉬움이 가득하다



형식만 남고 마음이 사라지면 고생일 뿐입니다. - P9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구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간절히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한 사람이 가지고 있을 확률은 아주 낮지 않을까요? - P21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성격은 아니어서 머리를 통째로 다른 세계에 담가야만 했다. 끝없이 읽는 것은 난정이 찾은 자기 보호법이었다. - P23

고되고 고되면서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는 게 신기했다. 그 모든 일을 겪고도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게 인간이란 생각을 했다. - P46

20세기 여자들이 교육의 기회라는 말에 따라나섰던 수많은 길들은 정말 교육에 닿기도 했고, 위험한 나락에 닿기도 했다. 그럼에도 교육과 기회를 원했던 여자들을 생각하면 울고 싶어진다. - P47

유명세는 모든 걸 왜곡시켜버리는 경향이 있어. - P61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읽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죽음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행위는 읽기라고, 동의할 만한 사람들과 밤새 책 이야기나 하고 싶었다. - P72

그 모든 것은 전생처럼 느껴진다. 사람의 기억이란 어디서 분절이 생기는 것일까? - P99

21세기 사람들은 20세기 사람들을 두고 어리석게도 나은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몰아세우지만, 누구든 언제나 자기방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온전한 상태인 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러니 그렇게 방어적으로 쓰지 않아도 된다고, 기억을 애써 메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 P111

탄력을 받아야 할 시기에 계속해서 꺾이면 안쪽의 무언가가 소멸할 수도 있다. - P117

폭력은 사람의 인격을 조각한다. 조각하다가 아예 부숴버리기도 하지만. - P126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 P178

"그 모든 걸 꿰뚫어보던 사람이 왜 자기한테 일어난 일을 소화하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렸지?"
"그야 그렇잖아.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들을 할머니는 몰랐을 거니까."
"이름들?"
"가스라이팅, 그루밍 뭐 그런 것들. 구구절절 설명이 따라붙지 않게 딱 정의된 개념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시작선이 다르잖아." - P182

"나는 세상에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생각해. 남이 잘못한 것 위주로 기억하는 인간이랑 자신이 잘못한 것 위주로 기억하는 인간. 후자 쪽이 훨씬 낫지." - P208

한끗이란 것은 의외로 분실하기 쉽거나 유효기간이 있는 무엇에 가까운지도 몰랐다. 그 한끗이 자신의 안쪽에 있었으면 했다. 힘을 잃지 않았으면 했다. - P247

어떤 시대는 지나고 난 다음에야 똑바로 보이는 듯합니다. - P256

어떤 인과는 명확히 기억되어야 한다. - P303

사랑은 돌멩이처럼 꼼짝 않고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빵처럼 매일 다시,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거래. - P304

외부의 충격에 영향받지 않는 인생이 어딨겠어? 그렇지만 내가 그날 이후로 곱씹고 있는 건 내 불행, 내 상처가 아니야. 스스로가 가엽고 불쌍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고. 그보다는 세상의 일그러지고 오염된 면을 너무 가까이서 보게 되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는 거야. 그걸 설명할 언어를 찾을 때까지는. - P305

언젠가부터 나는 애방처럼 말하고, 애방처럼 웃고, 애방처럼 싸웠다. 무엇보다 애방처럼 사람을 좋아하게 돼서 끝없이 불러모으고 연결시키고 판을 벌였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내 친구의 유령을 갑옷처럼 두르고 살기 시작한 것은? 아무것도 입지 않고 추운 겨울 길거리를 헤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나는 유령들을 입고 있었다. 유령들은 고운 목도리가 되어주었다. 때때로 투명한 격벽이 되어 눈물과 웃음이 섞이지 않게도 해주었다. 눈물은 눈물 따로, 웃음은 웃음 따로였다. 그리하여 어떤 것도 흐려지거나 변질되지 않았다. 남들이 나를 발가벗은 뻔뻔한 여자라 할 때에도 내가 개의치 않았던 것은 그런 까닭이다. - P307

요즘 여자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걸 모조리 경제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는 없어요. 공기가 따가워서 낳지 못하는 거야. 자기가 당했던 일을 자기 자식이 당하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어서. 혼자서는 지켜줄 수 없다는 걸 아니까. 한국은 공기가 따가워요. - P322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 P331

한국전쟁중에 국군의 손에 돌아가신 작은 할아버지가 계시다. 그 죽음이 만약 적군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토록 오래 곱씹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제 그 작은할아버지보다 열다섯 살쯤 많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비극을 소설 속에서 민간인 학살로 바꾼 것은 현재 많은 민간인 학살지들이 예산 부족으로 제대로 발굴되지 않고 개발지역에 포함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하지 않고 나아가는 공동체는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 P333

소설을 쓰면 쓸수록 나는 열심히 숨기고, 독자분들은 가끔 내가 숨기지 않은 것도 발견해가시는 것 같다. 변함없이 즐거운 보물찾기다.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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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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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발이 흩날리는 제주를 생각한다. 그 눈이 쌓이고 쌓여 세상이 적막에 잠기는 것을 바라본다. 책을 덮은 지금도 여전히 애틋하고 먹먹하기만 하다. 활활 타오르는 불이 느껴지기도 하고 쌓인 눈밭에 온몸이 묻힌 기분이 들기도 한다.

 

눈이 묻은 얼굴을 털어내던 소녀와 눈을 감지도 뜨지도 못한 채 그들의 얼어있는 얼굴을 살피던 어린 소녀를 떠올린다. 아무 잘못도 없이 고통스럽게 죽어가야만 했던 이들을 떠올린다. 감히 그들의 고통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다. 떠나간 이들과 뒤에 남겨진 이들의 아픔이 글을 읽는 내내 절절하게 느껴져 계속해서 아프고 서러웠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했을까.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 인간이 저지른 악행, 그 잔인함과 비정함에 몸서리가 처진다.

 

눈 내리는 제주를 보면 생각날 것이다. 인선이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얼어있던 얼굴들 위로 쌓이던 눈송이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릴 때면 아미와 아마가 떠오를 것이고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면 인선이 말해준 이야기가 떠오를 것이다. 아니메, 아니메, 하고 울부짖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잊지 않겠다. 우리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기 때문에



처음 그 꿈을 꾸었던 밤과 그 여름 새벽 사이의 사 년 동안 나는 몇 개의 사적인 작별을 했다. 어떤 것들은 나의 의지로 택했지만, 어떤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며 모든 걸 걸고라도 멈추고 싶은 것이었다. - P12

유리문 밖으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육체가 깨어질 듯 연약해 보였다. 생명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그때 실감했다. 저 살과 장기와 뼈와 목숨 들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끊어져버릴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 P15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야 했다. - P15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 - P17

악몽은 물론 그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제는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한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뻔뻔스럽게-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 P23

다음날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며 나는 오래전 겨울에 들었던 인선의 가출 이야기를 떠올렸고, 이상하게도 그 어머니만큼이나 인선이 안쓰럽게 느껴졌었다. 만 열일곱 살 아이가, 얼마나 자신이 밉고 세상이 싫었으면 저렇게 조그만 사람을 미워했을까? 실톱을 깔고 잔다고. 악몽을 꾸며 이를 갈고 눈물을 흘린다고. 음성이 작고 어깨가 공처럼 굽었다고. - P82

두 개의 시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건지 나는 알고 싶었다. 저 엇박자 돌림노래 같은 것, 꿈꾸는 동시에 생시를 사는 것 같은 걸까. - P114

물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지 않나. 그렇다면 인선이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지금 내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아니란 법이 없다. 인선의 어머니가 보았다던 학교 운동장의 사람들이 이어 떠올라 나는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푼다. 무딘 콧날과 눈꺼풀에 쌓인 눈을 닦아낸다.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 P133

어떻게 악몽들이 나를 떠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과 싸워 이긴 건지, 그들이 나를 다 으깨고 지나간 건지 분명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눈꺼풀 안쪽으로 눈이 내렸을 뿐이다. 흩뿌리고 쌓이고 얼어붙었을 뿐이다. - P177

꿈이란 건 무서운 거야.
소리를 낮춰 나는 말한다.
아니, 수치스러운 거야.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을 폭로하니까. - P237

그 저녁부터 인선과 친구가 되었다. 그녀가 섬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인생의 모든 기점들을 함께했다. 잡지사를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을 여의고 내가 텅 빈 아파트에 틀어박혀 있던 시기에 그녀는 불쑥 문자를 남긴 뒤 찾아오곤 했다. 너는 한 가지 일만 하면 돼. 문을 열어줘. 그녀의 말대로 현관문을 열면, 찬바람과 담배 냄새가 훅 끼쳐오는 팔이 내 어깨를 안았다. - P242

호송차 여러 대에 올라타기 시작하는데 줄 뒤쪽에서 젊은 여자가 아니메, 아니메, 하고 울부짖었습니다. 굶주려 그랬는지, 무슨 병을 앓았는지 배에서 숨이 끊어진 젖먹이를 젖은 부두에 놓고 가라고 경찰이 명령한 겁니다. 그렇게 못한다고 여자가 몸부림을 치는데, 경찰 둘이 강보째 빼앗아 바닥에 내려놓고 여자를 앞으로 끌고 가 호송차에 실었어요.
이상한 일입니다. 내가 그 말 못할 고문 당한 것보다...... 억울한 징역 산 것보다 그 여자 목소리가 가끔 생각납니다. 그때 줄 맞춰 걷던 천 명 넘는 사람들이 모두 그 강보를 돌아보던 것도. - P266

그 청년이 외삼촌이었을 확률이 0은 아니야.
인선이 속삭여 말한다.
지금 갱도에 있는 유해 삼천 구 중 어떤 것도 외삼촌일 수 있는 것처럼.
동의를 구하는 듯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추측할 수 있어, 그 사람이 외삼촌이었다면 어떻게든 이후에 섬으로 돌아왔을 거라고...... 하지만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런 지옥에서 살아난 뒤에도 우리가 상상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 P291

자료가 쌓여가며 윤곽이 선명해지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가 변형되는 걸 느꼈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 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
그게 엄마가 다녀온 곳이란 걸 나는 알았어. 악몽에서 깨어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면, 그 얼굴에 끈질기게 새겨져 있던 무엇인가가 내 얼굴에서도 배어나오고 있었으니까. - P316

아직 사라지지 마.
불이 당겨지면 네 손을 잡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눈을 허물고 기어가 네 얼굴에 쌓인 눈을 닦을 거다. 내 손가락을 이로 갈라 피를 주겠다.
하지만 네 손이 잡히지 않는다면, 넌 지금 너의 병상에서 눈을 뜬 거야.
다시 환부에 바늘이 꽂히는 곳에서. 피와 전류가 함께 흐르는 곳에서.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 P324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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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 타오르다
우사미 린 지음, 이소담 옮김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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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아이돌 그룹 마자마좌의 멤버로 활동 중인 우에노 마사키의 팬이다. 사실 마사키를 향한 나의 사랑은 팬과 스타의 관계로만 한정 짓기엔 부족할지도 모른다.

 

힘들고 우울할 때 존재만으로 큰 힘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생전 처음 본 사람일 수도 있다. 나에게 있어 그건 스타 마사키였다. 생애 첫 기억이자 힘들 때 자신을 숨 쉬게 만드는 사람. 그렇기에 마사키를 향한 나의 사랑은 맹목적이고 희생적이다. 돈과 시간을 모두 마사키에게 쏟아 부어도 아깝지가 않다. 마사키처럼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고 매 순간 그와 함께 살아간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방송을 챙겨보고 녹화하고 녹음하고 분석하고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단지 연예인으로서가 아니라 '인간' 마사키를 알아보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를 이해하는 것만이 그에게 가깝게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나는 사회에 적응하는 게 어렵다. 남에게는 쉽게 느껴지는 당연한 일들이 내게는 어렵게만 느껴진다. 이런 나를 선생님도 가족들도 이해하지 못한다. 각자의 아픔만 크게 느끼는 가족들 곁에서 나는 점점 더 메말라간다. 그리고 그럴 때일수록 나는 인간 마사키에게 더 집착하게 된다. 그의 곁에서만 편히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다. 그만이 나를 움직이고 불러주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준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생활에 큰 활력을 준다. 그렇기에 건강한 덕질은 삶에 있어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와 같이 단순한 덕질을 넘어서 자신을 모두 바치고 스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을 망가뜨린다. 그리고 그건 더 나아가 내가 사랑하는 최애를 아프게 만들 수도 있다. 여기에서의 나는 마사키나 그의 주변에 괴롭힘을 가하는 악질적인 팬은 아니다. 누구보다 인간 마사키를 잘 알기에 그가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사키가 연예계를 은퇴하게 되면서 나는 결국 무너진다. 마사키로 메운 삶의 구멍들이 다시 벌어지며 넘어지게 된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게만 느껴진다.

 

더 이상 인간이 된 마사키를 쫓아다닐 수 없다. 지금까지 그랬듯 바라보고 해석할 수 없다. 그동안 내가 모았던 모든 것들보다 현재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이 갖고 있는 셔츠 한 장, 양말 한 켤레가 마사키의 존재를 느끼게 한다는 사실은 나를 아프게 한다.

 

척추가 사라진 내게 더 이상 이족보행은 어울리지 않는다. 방에 떨어진 면봉을 주우며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느끼는 나의 모습으로 이야기는 모두 마무리된다.

 

독특한 제목으로 시작한 이 소설은 얇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살아가는 것만이 급급한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척추를 잃고 살아간다. 이런 현실에서 척추가 되어줄 무언가를 다시 잃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하루를 다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여전히 씁쓸하고 아프게 느껴진다.

 

그래도 아카리는 대단해. 가니까 대단해.”

지금 학교 가니까 대단하다고 한 거?”

.”

살아가니까 대단하다고 들렸어, 순간.” (11p)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 네버랜드에 가자. 코끝이 찡했다. 나를 위한 말 같았다. 공명한 목에서 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소년의 발그스름한 입에서 나온 말이 내 목에서도 같은 말을 끄집어내려고 했다. 말 대신 눈물이 차올랐다. 무게를 짊어지고 어른이 되는 것을 괴롭다고 생각해도 된다고, 누군가가 힘주어 말해준 것 같았다. 같은 것을 떠안은 누군가의 그림자가 그의 작은 몸을 매개 삼아 아른거렸다. 나는 그와 연결되면서 그 너머에 있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과 연결되었다. (18p)

 

짧고 까만 체모 끝에 체액이 달린 꼴이 한심했다. 깎아도 뽑아도 또 자라는 것과 왜 영원히 마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항상 그랬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그랬다. (66p)

 

면봉을 주웠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뼈를 줍는 것처럼 정성스럽게 내가 바닥에 어지른 면봉을 주웠다. 면봉을 다 주워도 하얗게 곰팡이가 핀 주먹밥을 주워야 하고 다 마신 콜라 페트병을 주워야 했지만, 앞으로의 길고 긴 여정이 보였다.

기어 다니면서, 이게 내가 사는 자세라고 생각했다.

이족보행은 맞지 않았던 것 같으니까 당분간은 이렇게 살아야겠다. 몸이 무겁다. 면봉을 주웠다. (1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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