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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하와이 에디션)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평점 :
품절

<시선으로부터,>를 읽으며 부러울 정도로 멋진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아픔을 겪는다. 이 가족 또한 겉은 화려하고 편안해 보여도 구성원 각자에게 아픔이 있다.
시선의 삶은 고통스럽게 시작했지만, 끝은 아름다웠다. 시선 같은 어른이 되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살아있을 때도 이 생을 떠났을 때도 남은 이들에게 큰 힘이 되는 존재. 시선에게 애방이 그러했듯, 우리에겐 시선의 존재가 그렇다. ‘시선’이라는 강인하고도 단단한 사람으로부터 뿌리내린 이 가족 또한 앞으로의 역경을 잘 이겨낼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의 시작하는 장마다 실려 있던 시선의 인터뷰와 책의 인용문들이 아주 인상 깊었다. 실제로 이 분의 책이 남아있다면 한 권씩 한 권씩 아껴가며 읽을 텐데. 이 부분에 대해선 책을 다 덮은 지금도 아쉬움이 가득하다.
형식만 남고 마음이 사라지면 고생일 뿐입니다. - P9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구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간절히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한 사람이 가지고 있을 확률은 아주 낮지 않을까요? - P21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성격은 아니어서 머리를 통째로 다른 세계에 담가야만 했다. 끝없이 읽는 것은 난정이 찾은 자기 보호법이었다. - P23
고되고 고되면서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는 게 신기했다. 그 모든 일을 겪고도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게 인간이란 생각을 했다. - P46
20세기 여자들이 교육의 기회라는 말에 따라나섰던 수많은 길들은 정말 교육에 닿기도 했고, 위험한 나락에 닿기도 했다. 그럼에도 교육과 기회를 원했던 여자들을 생각하면 울고 싶어진다. - P47
유명세는 모든 걸 왜곡시켜버리는 경향이 있어. - P61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읽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죽음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행위는 읽기라고, 동의할 만한 사람들과 밤새 책 이야기나 하고 싶었다. - P72
그 모든 것은 전생처럼 느껴진다. 사람의 기억이란 어디서 분절이 생기는 것일까? - P99
21세기 사람들은 20세기 사람들을 두고 어리석게도 나은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몰아세우지만, 누구든 언제나 자기방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온전한 상태인 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러니 그렇게 방어적으로 쓰지 않아도 된다고, 기억을 애써 메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 P111
탄력을 받아야 할 시기에 계속해서 꺾이면 안쪽의 무언가가 소멸할 수도 있다. - P117
폭력은 사람의 인격을 조각한다. 조각하다가 아예 부숴버리기도 하지만. - P126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 P178
"그 모든 걸 꿰뚫어보던 사람이 왜 자기한테 일어난 일을 소화하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렸지?" "그야 그렇잖아.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들을 할머니는 몰랐을 거니까." "이름들?" "가스라이팅, 그루밍 뭐 그런 것들. 구구절절 설명이 따라붙지 않게 딱 정의된 개념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시작선이 다르잖아." - P182
"나는 세상에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생각해. 남이 잘못한 것 위주로 기억하는 인간이랑 자신이 잘못한 것 위주로 기억하는 인간. 후자 쪽이 훨씬 낫지." - P208
한끗이란 것은 의외로 분실하기 쉽거나 유효기간이 있는 무엇에 가까운지도 몰랐다. 그 한끗이 자신의 안쪽에 있었으면 했다. 힘을 잃지 않았으면 했다. - P247
어떤 시대는 지나고 난 다음에야 똑바로 보이는 듯합니다. - P256
어떤 인과는 명확히 기억되어야 한다. - P303
사랑은 돌멩이처럼 꼼짝 않고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빵처럼 매일 다시,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거래. - P304
외부의 충격에 영향받지 않는 인생이 어딨겠어? 그렇지만 내가 그날 이후로 곱씹고 있는 건 내 불행, 내 상처가 아니야. 스스로가 가엽고 불쌍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고. 그보다는 세상의 일그러지고 오염된 면을 너무 가까이서 보게 되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는 거야. 그걸 설명할 언어를 찾을 때까지는. - P305
언젠가부터 나는 애방처럼 말하고, 애방처럼 웃고, 애방처럼 싸웠다. 무엇보다 애방처럼 사람을 좋아하게 돼서 끝없이 불러모으고 연결시키고 판을 벌였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내 친구의 유령을 갑옷처럼 두르고 살기 시작한 것은? 아무것도 입지 않고 추운 겨울 길거리를 헤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나는 유령들을 입고 있었다. 유령들은 고운 목도리가 되어주었다. 때때로 투명한 격벽이 되어 눈물과 웃음이 섞이지 않게도 해주었다. 눈물은 눈물 따로, 웃음은 웃음 따로였다. 그리하여 어떤 것도 흐려지거나 변질되지 않았다. 남들이 나를 발가벗은 뻔뻔한 여자라 할 때에도 내가 개의치 않았던 것은 그런 까닭이다. - P307
요즘 여자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걸 모조리 경제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는 없어요. 공기가 따가워서 낳지 못하는 거야. 자기가 당했던 일을 자기 자식이 당하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어서. 혼자서는 지켜줄 수 없다는 걸 아니까. 한국은 공기가 따가워요. - P322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 P331
한국전쟁중에 국군의 손에 돌아가신 작은 할아버지가 계시다. 그 죽음이 만약 적군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토록 오래 곱씹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제 그 작은할아버지보다 열다섯 살쯤 많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비극을 소설 속에서 민간인 학살로 바꾼 것은 현재 많은 민간인 학살지들이 예산 부족으로 제대로 발굴되지 않고 개발지역에 포함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하지 않고 나아가는 공동체는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 P333
소설을 쓰면 쓸수록 나는 열심히 숨기고, 독자분들은 가끔 내가 숨기지 않은 것도 발견해가시는 것 같다. 변함없이 즐거운 보물찾기다.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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