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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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발이 흩날리는 제주를 생각한다. 그 눈이 쌓이고 쌓여 세상이 적막에 잠기는 것을 바라본다. 책을 덮은 지금도 여전히 애틋하고 먹먹하기만 하다. 활활 타오르는 불이 느껴지기도 하고 쌓인 눈밭에 온몸이 묻힌 기분이 들기도 한다.

 

눈이 묻은 얼굴을 털어내던 소녀와 눈을 감지도 뜨지도 못한 채 그들의 얼어있는 얼굴을 살피던 어린 소녀를 떠올린다. 아무 잘못도 없이 고통스럽게 죽어가야만 했던 이들을 떠올린다. 감히 그들의 고통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다. 떠나간 이들과 뒤에 남겨진 이들의 아픔이 글을 읽는 내내 절절하게 느껴져 계속해서 아프고 서러웠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했을까.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 인간이 저지른 악행, 그 잔인함과 비정함에 몸서리가 처진다.

 

눈 내리는 제주를 보면 생각날 것이다. 인선이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얼어있던 얼굴들 위로 쌓이던 눈송이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릴 때면 아미와 아마가 떠오를 것이고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면 인선이 말해준 이야기가 떠오를 것이다. 아니메, 아니메, 하고 울부짖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잊지 않겠다. 우리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기 때문에



처음 그 꿈을 꾸었던 밤과 그 여름 새벽 사이의 사 년 동안 나는 몇 개의 사적인 작별을 했다. 어떤 것들은 나의 의지로 택했지만, 어떤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며 모든 걸 걸고라도 멈추고 싶은 것이었다. - P12

유리문 밖으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육체가 깨어질 듯 연약해 보였다. 생명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그때 실감했다. 저 살과 장기와 뼈와 목숨 들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끊어져버릴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 P15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야 했다. - P15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 - P17

악몽은 물론 그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제는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한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뻔뻔스럽게-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 P23

다음날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며 나는 오래전 겨울에 들었던 인선의 가출 이야기를 떠올렸고, 이상하게도 그 어머니만큼이나 인선이 안쓰럽게 느껴졌었다. 만 열일곱 살 아이가, 얼마나 자신이 밉고 세상이 싫었으면 저렇게 조그만 사람을 미워했을까? 실톱을 깔고 잔다고. 악몽을 꾸며 이를 갈고 눈물을 흘린다고. 음성이 작고 어깨가 공처럼 굽었다고. - P82

두 개의 시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건지 나는 알고 싶었다. 저 엇박자 돌림노래 같은 것, 꿈꾸는 동시에 생시를 사는 것 같은 걸까. - P114

물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지 않나. 그렇다면 인선이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지금 내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아니란 법이 없다. 인선의 어머니가 보았다던 학교 운동장의 사람들이 이어 떠올라 나는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푼다. 무딘 콧날과 눈꺼풀에 쌓인 눈을 닦아낸다.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 P133

어떻게 악몽들이 나를 떠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과 싸워 이긴 건지, 그들이 나를 다 으깨고 지나간 건지 분명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눈꺼풀 안쪽으로 눈이 내렸을 뿐이다. 흩뿌리고 쌓이고 얼어붙었을 뿐이다. - P177

꿈이란 건 무서운 거야.
소리를 낮춰 나는 말한다.
아니, 수치스러운 거야.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을 폭로하니까. - P237

그 저녁부터 인선과 친구가 되었다. 그녀가 섬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인생의 모든 기점들을 함께했다. 잡지사를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을 여의고 내가 텅 빈 아파트에 틀어박혀 있던 시기에 그녀는 불쑥 문자를 남긴 뒤 찾아오곤 했다. 너는 한 가지 일만 하면 돼. 문을 열어줘. 그녀의 말대로 현관문을 열면, 찬바람과 담배 냄새가 훅 끼쳐오는 팔이 내 어깨를 안았다. - P242

호송차 여러 대에 올라타기 시작하는데 줄 뒤쪽에서 젊은 여자가 아니메, 아니메, 하고 울부짖었습니다. 굶주려 그랬는지, 무슨 병을 앓았는지 배에서 숨이 끊어진 젖먹이를 젖은 부두에 놓고 가라고 경찰이 명령한 겁니다. 그렇게 못한다고 여자가 몸부림을 치는데, 경찰 둘이 강보째 빼앗아 바닥에 내려놓고 여자를 앞으로 끌고 가 호송차에 실었어요.
이상한 일입니다. 내가 그 말 못할 고문 당한 것보다...... 억울한 징역 산 것보다 그 여자 목소리가 가끔 생각납니다. 그때 줄 맞춰 걷던 천 명 넘는 사람들이 모두 그 강보를 돌아보던 것도. - P266

그 청년이 외삼촌이었을 확률이 0은 아니야.
인선이 속삭여 말한다.
지금 갱도에 있는 유해 삼천 구 중 어떤 것도 외삼촌일 수 있는 것처럼.
동의를 구하는 듯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추측할 수 있어, 그 사람이 외삼촌이었다면 어떻게든 이후에 섬으로 돌아왔을 거라고...... 하지만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런 지옥에서 살아난 뒤에도 우리가 상상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 P291

자료가 쌓여가며 윤곽이 선명해지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가 변형되는 걸 느꼈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 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
그게 엄마가 다녀온 곳이란 걸 나는 알았어. 악몽에서 깨어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면, 그 얼굴에 끈질기게 새겨져 있던 무엇인가가 내 얼굴에서도 배어나오고 있었으니까. - P316

아직 사라지지 마.
불이 당겨지면 네 손을 잡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눈을 허물고 기어가 네 얼굴에 쌓인 눈을 닦을 거다. 내 손가락을 이로 갈라 피를 주겠다.
하지만 네 손이 잡히지 않는다면, 넌 지금 너의 병상에서 눈을 뜬 거야.
다시 환부에 바늘이 꽂히는 곳에서. 피와 전류가 함께 흐르는 곳에서.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 P324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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