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웠던 이 땅의 강이 이제 기억의 대상이 되어가는 참이다.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처럼, 그보다 더 노골적이고 천박한 여기 한 줌 문명과 야만에 의해.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또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 "라는 슬픈 전언을 이 땅에서 맞닥뜨리는 느낌.

'이미지프레시안'의 첫 프로젝트로 진행된 '4대강 사진 기획'에 사진가 강제욱, 김홍구, 노순택, 성남훈, 이갑철, 이상엽, 조우혜, 최항영, 최형락, 한금선이 참가하여 1년여에 걸쳐 "사라져가는 풍경과 훼손되어가는 강"을 담았다. 


"... 사진은 고발하고자 하는 현실에 대해 가장 마지막까지 따라붙는다. 끝까지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이것이 정의이며, 과연 이것이 인간의 삶이 맞느냐고, 우리의 내밀한 욕망을 밝히는 물음을 계속 던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어쩔 수 없이 패배를 기록한다. 아무것도 저지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었기 때문에만 가능할 기록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 패배는 참혹한가. 그렇지 않다. 현실에 끝까지 따라붙는다는 점 때문에 사진은 가장 강력한 고발 매체이며, 마지막 패배를 기록한다는 점 때문에 사진은 폐부에 직접적인 찰과상을 내는 예술의 한 장르가 되는 셈이다. 우리의 영혼은 이토록 직접적인 찰과상을 경험하지 않는 순간부터 괴물의 영혼이 될지도 모른다. 자본과 권력의 욕망으로 얼룩진 현대사를 힘겹게 살아가는 나약한 개인이 괴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예술은 아마도 가녀린 숨을 쉬고 있으리라.

... 미셜 푸코는 "아우슈비츠를 망강하는 것도 학살의 일부다"라고 말했다. 이 학살의 현장을 우리는 망각하면 안 된다. 망각함으로써 학살의 일부를 행해서도 안된다. 비록 저지와 저항의 힘이 권력자의 오만을 꺽진 못하고 있지만, 우리는 학살의 일부에 가담하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한 권의 사진집을 세상에 내놓으며, 여전히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이의 제기를 해야한다. 망각의 반대편에 서서, 기억의 모든 방식을 동원하는 일만이 학살의 역사를 거스를 수 있는 힘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저항이 아니다. 커다란 물증을 남겨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록이 될 수 있또록, 많은 사람이 이 책을 간직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

- 김소연 시인의 발문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술은 인어공주의 숙명을 지녔다."고, 인터뷰 작가 김혜리는 말했다. "예술은 돌려 말해야 한다. 욕망과 사랑을 대놓고 발설하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태생이 벙어리 냉가슴일 수밖에 없는 예술을 통역하고 위무하기 위해 비평가가 존재한다"(진심의 탐닉, 씨네북스)는 것이다. 사실 현대의 예술이 과연 벙어리 냉가슴인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좀 들긴 하지만(스스로 발언을 하는 경우도 많으므로....그리고 요즘 언뜻 본 어느 CF에서는 인어공주도 왕자에게 분명히 말을 하더라. 내가 당신 목숨을 구했노라고.ㅋ ), 비평가의 존재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비평을 통해 예술의 의미가 풍요롭게 다가오고 그에 매혹되는 실제적 경험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 전문지 [월간 포토넷PHOTONET]에 연재했던 “한국현대사진의 새로운 탐색”을 묶어 단행본으로 펴냈다는 평론가 박평종의 사진 평론집 <매혹하는 사진>은 이러한 비평의 역할에 대체로 충실한 책이다. 저자의 통역을 따라 사진을 읽어가면 불분명했던 의미들이 드러나고, 모호하던 사진의 맛과 재미가 두둥~ 수면위로 떠오르는 느낌이다. 저자가 선별한 22인의 젊은 작가들의 리스트도 흥미롭다. 책에 실린 다양한 '태도'와 '실천'을 보여주는 작품들에서, "중요한 것은 한 작가가 세계에 대해 취하는 태도의 문제"라는 저자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노순택, 구성수, 한성필, 천경우, 이원철, 방병상, 손승현, 권순관, 김옥선, 난다, 박진영, 박형근, 백승우, 윤정미, 이강우, 이선민, 이은종, 이정록, 이혁준, 정연두, 조습이 그렇게 선별된 작가들이다.

책에 따르면 근대가 낳은 제도와 공간에 대한 구성수의 작업은 자기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던 우리 근대 역사의 결여를 메워 나가 결국 자기 극복을 꿈꾸는 시도이고, 이옥선의 작업은 인간의 확장을 말하고 있으며, 난다의 근대의 재현과 모던걸의 등장은 오늘의 현실이 근대로 퇴행하고 있는지를 묻는 작업이다. 노순택은 한국 사회에서 폭력이 발생하는 지점을 포착하고 그 폭력이 작동하여 우리 사회를 끝없이 동물성과 야만의 상태로 몰아가는 모습을 드러내는 작가로 소개된다.

"노순택이 한국 사회의 구석구석에 퍼져 있는 폭력의 장치와 권력이 미치는 범위를 들추어내는 작업에는 예민한 후각을 지닌 동물적 본능과 차분한 반성적 사유가 공존한다. 그것이 중요한 덕목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근저에는 폭력을 멀리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것이 진정 사라져 버리기를 바라는 간절한 애원이 있다. 그것이 작가를 집요한 현실주의자로 만드는 힘이자 실천의 윤리이다."

박진영은 한국 사회 곳곳에 숨어 있는 갈등 구조와 분열의 양상을 드러내 보여주고, 손승현은 문명사의 진행과정에서 은폐되어 온 희생의 역사에 주목하여 문명의 야만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선민은 여성의 주체적 삶의 가능성을, 조습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해 온 야만과 폭력의 문제를 패러디로 보여주는 작가로 제시된다.

이 밖에도 이전에도 관심이 갔던 작가들의 작품은 보다 큰 '매혹'으로 반갑게 다가왔고, 잘 몰랐거나 왜 좋은 건지 이해가 안되었던 작가가 새롭게 보이는 장도 있었다. (형상과 관계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보여주는 천경우의 사진은 인상적이었고, 실재와 재현, 진짜와 가짜 같은 지각의 문제를 다루는 한성필의 사진도 재미있었다. ) 뭐 저자의 친절한 통역으로도 여전히 아무런 매혹이 되지 않는 작품들도 있긴 한데, 나의 취향이니 어쩔 수 없다. 저자가 작가 선정에 있어 취향과 가치관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처럼.

표지며 내지의 디자인이 좀 안타깝지만(이미지를 다루는 것인데 좀 신경 좀 쓰지...) 실린 사진도판들은 나쁘지 않고 빼곡한 텍스트도 꽤 재밌고 맛나게 읽히니, 애초 선정적이라 생각했던 제목도 고개가 좀 끄덕여지긴 한다. 그래, 매혹을 꽤 하기는 하지... 어떤 건 매혹을 하는 주체가 사진 자체인 것인지, 저자의 독해로 드러난 사진 속 세계인 것인지 살짝 모호하기도 하지만.... "한국 사진의 미래를 걸머지고 나갈 젊은 작가들의 지위를 탄탄하게 하는 데 보탬이 되고 싶었다."는 의도가 살짝 드러나는 대목도 종종 눈에 띄지만... 미학 전공자로서 한국사회에서 이 땅의 삶에 밀착된 사진예술을 고민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저자의 책이 이끄는 대로 사진에 매혹당하는 경험은 즐겁고, 사진예술에 대한 안목을 - 교양이 아니라 - 갖추고 싶다면 꽤 신뢰가 가는 참고서-교과서가 아니라-가 되어줄 것 같다. 위대한 탄생의 김태원의 표현을 빌자면 "두께가 있는" 책 되겠다. 물리적으로도 좀 두껍긴 하지만.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빅토르 I. 스토이치타의 <그림자의 짧은 역사>를 재미있게 읽었다.
코린트 석공의 집에서 일어난 플리니우스의 신화와 플라톤의 동굴 신화에서 출발하는 이 책은, 양자가 각각 예술의 신화와 지식의 신화를 다르고 있으며, 예술적 재현의 탄생에 관련된 신화와 인지적 재현의 탄생에 관련된 신화가 모두 투영이라는 모티브에 집중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최초의 투영은 그림자를 말하는 것이며, 예술과 지식은 그림자의 초월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에 대한 연구가 없었던 이유를 저자는 "역사에 대한 우리의 관념(즉, 헤겔적인 관념)과 재현에 대한 우리의 관념(사실상 플라톤적인 관념)은 우리를 다양한 관점으로 빛의 역사에 접근하게 해주고 그렇게 하도록 부추기지만, 그림자의 역사의 가능성은 회피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림자를 연구한다는 것은, "긍정적이고 절대적 특성을 지닌 존재인 빛의 적극적 재현을 빛-그림자의 변증법으로 보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중적인 도전을 수반"하는 것이며, 그림자의 역사는 "그림자의 기원에 관한 신화들이 드러내주는 문을 통해 서양재현의 역사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고, 이를 통해 "예술적 재현의 역사와 재현의 철학이 만나는 곳"에 이 책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은 이러한 모호함에 대한 헤겔의 간접적 기술로 인용된 것.

그러나 사람은 존재를 마음속에 그릴 때, 또렷한 시각의 명확함으로서의 순수한 빛의 이미지 속에 있는 것으로 상상하고, 무無를 그릴 때는 순수한 어둠으로 생각한다. 그들의 구분은 바로 이렇게 친숙한 감각적인 차이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상, 바로 이러한 시각적인 것을 더 정확하게 상상한다면, 절대적 밝음 속에서는 절대적 어둠 속에서 보이는 만큼만 볼 수 있고, 밝음과 어둠은 등가으 ㅣ것이며, 완전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은 완전하게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순수 빛과 순수 어둠은 동일한 두 개의 공간이다. 사물은 명확한 빛과 어둠 속에서만 구분될 수 있고(빛은 어둠에 의해 확인되며, 따라서 그것은 어두워진 빛이고, 어둠은 빛에 의해 확인되며, 따라서 그것은 밝혀진 어둠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오로지 어두워진 빛과 밝혀진 어둠만이 그 자신들 속에 차이의 계기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바로 명확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The Science of Logic

그 기원의 신화에서 출발하여 푸생과 모네, 나르키소스 신화 등을 거쳐 뒤샹과 워홀, 볼탕스키에 이르기까지, 그림자를 팔아버린 슐레밀 이야기에서 피터팬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의 이정표들을 추적해가는 여정을 따라가는 건, 마치 <다빈치코드>를 읽는 일처럼 흥미진진하다. 소피와 랭던이 <최후의 만찬 속에서>와 같은 그림들과 암호들을 해석하고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장면이 떠오를 정도. 현존하는 타자, 자기-재현의 한 형태로서의 그림자에 대한 저자의 통찰도 "우리 의식에 대한 성찰"로 여운을 남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