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헌터 - 어느 인류학자의 한국전쟁 유골 추적기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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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뼈엔 색깔이 없다. 선주는 어느 편이든, 정치적 의미가 어떠하든, 유해 발굴에만 충실했다. 그것은 소명이라기보다 학문하는 이의 자세였다.

본 헌터 p257

당신이 먹은 음식이 무언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고 말했던 프랑스의 작가가 있었던가.

하성란 작가의 <곰팡이꽃>에는 '당신이 버린 쓰레기가 당신을 말해준다'라는 맥락의 문장이 있었던가.

당신으로 지칭되지만 사실 나, 너를 비롯한 인간을 말해줄 수 있는 것은 결국 삶에서 그 사람이 가장 많이 하고 있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나오는 선주는 책 제목 그대로 본 헌터임이 분명하다. 그에게 뼈는 사실 여부를 검증하기 위해 지켜야하는 신조처럼 보인다.

이 책은 1950년 '9.28수복' 이후 국면과 1951년 '1.4후퇴' 국면에서 두드러지게 발생했던 충남 아산의 부역혐의 민간인 희생사건을 다루고 있다. 말 그대로 그 지역 주민들은 인문군 점령시기에 "부역했다는 혐의"만으로 혹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넉 달도 되지 않은 짧은 기간 동안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감금되었다가 집단학살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최종 신원을 확인한 희생자는 77명. 그중 연령 미상인 32명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희생자 연령은 10세 미만, 14명이었다. 또한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는 최소 800여 명으로 추정됐다

내 이름은 없다.

나는 카운트되지 않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숙부 숙모 고모 누나(혹은 언니)가 포함된 몰살자 명단 속에 나는 없다. 부당하다. 나도 한 생명으로서 그 자리에 있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나는 태아다. 세상에 나와 엄마 젖을 먹어보지도, 울음을 터뜨려보지도 못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른다. 그저 하나의 수정란 세포가 되어 엄마의 자궁 내벽에 착상된지 36주였다. 자궁을 찢고 세상에 나가기 딱 한 달 전, 나를 배 속에 품었던 엄마는 처형당했다.

본 헌터p188

무차별적인 집단 학살은 '1.4후퇴' 국면에서 장소를 비롯해 희생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는데, 그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갓난아이를 포함한 어린이를 포함한다. 엄마의 처형으로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고 숨이 끊어진 태아를 비롯해서.

충남 아산의 도처에서 벌어진 부역혐의 희생자와 관련된 수많은 화자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있다. 모두 50장으로 구성된 책의 홀수장과 짝수장의 화자가 다르기 때문에 처음에 읽으면 헷갈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도 처음에 발굴된 유해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가, 다시 돌아와서 읽었으니까.

서로 다른 곳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서로 닿을 것 같지 않은 평행선을 달리다가 어느덧 뼈의 이야기에서 맞닿게 된다. 이렇게 홀수와 짝수, 특이한 교차식 구성을 통해 한국 전쟁기 동안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사건의 참상과 땅속에 묻힌 진실을 추적하고 있다. 홀수장에서 펼치는 민간인 학살사건 이야기는 유골·생존 피해자·유가족·유품·관련 주변인·가해자 등 여러 화자의 시점을 통해 우리가 납작한 사실로 알고 있던 사건의 참상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짝수장에서 펼치는 선주의 이야기에는 인골에 대한 순전한 호기심으로 한평생 유해가 남긴 진실을 좇아왔으며 '모던 미스'를 경계하는 인류학자 선주의 삶을 비롯한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탐구 혹은 투쟁의 과정이 담겨있다.

교차하는 화자들의 목소리에는 역사 교과서에서 담아내지 못한 진실들이 숨쉬고 있다. 특히 살아있지 않은 화자들 중 발굴된 유해들은 자신의 이름을 발굴 번호를 붙여서 명명한다. 이름 대신 유해 발굴 번호로 남은 사람들은 전쟁의 참혹하고 슬픈 결과이다. 이 책이 아직도 발굴되지 못한 희생자들을 찾아내고, 국가적 차원에서의 집단 학살의 진실을 독자들에게 알릴 수 있는 통로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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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계를 돌봄이라 부를 때 - 영 케어러와 홈 닥터, 각자도생 사회에서 상호의존의 세계를 상상하다
조기현.홍종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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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 케어러와 홈 닥터,

        각자도생 사회에서

        상호의존의 세계를 상상하다

     우리의 관계를 돌봄이라 부를 때

 

 누구나 돌봄이 필요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돌봄의 가치는 그리 높게 평가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지난 팬데믹 시기에 돌봄 공백 및 위기에 대한 이슈가 떠오르면서 돌봄의 가치가 재평가되는 것 같았지만 돌봄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돌봄의 공백은 언제나 존재했다. 돌봄은 주로 여성- 직업상에서 돌봄자는 중년 여성 대대수, 가정내에서 돌봄자도 중년 여성 혹은 미혼 여성-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가족의 형태나 구성원 등의 변화로 인해 이제 남성 돌봄자들도 많아졌다. 그중에는 '영 케어러'일 것이다. 아직 돌봄이 필요한 나이에 돌봄자가 되어버린 영 케어러의 삶은 남녀를 떠나서 참으로 난감해진다. 사회에 제대로 진출하기도 전에 돌봄자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에 경력 단절이나 사회 참여를 할 기회가 극히 줄어든다. 영 케어러가 짊어져야 하는 고달픈 현실은 결국 돌봄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것은 영 케어러 뿐 아니라 돌봄을 감당하는 역할자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된다.


"결국 앞으로 돌봄은 남녀 구분을 넘어서서 같이 감당해야 할 우리 모두의 일이고, 오히려 왜 여성만 짊어져야 되는 일인지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좀 더 나아가서 돌봄을 누군가가 짊어져야 되는 부담이라고 보는 관점도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모두 함께 감당해야 할 몫이죠." (p27, 1장 돌봄의 관계를 상상하다)


이 책은 스무 살 때 쓰러진 아버지를 10여 년간 돌본 경험을 바탕으로 《아빠의 아빠가 됐다》 《새파란 돌봄》 등을 쓴 ‘영 케어러’ 조기현과 국내 최초의 방문진료 전문병원 ‘건강의집 의원’ 원장이자 《처방전 없음》의 저자인 홍종원의 대담을 실었다. 대담 진행은 김경훈 편집자가 맡았는데, 그는 관련 서적이나 기사, 자료 등을 꼼꼼하게 천천히 읽어가며 대담을 준비했고(이 과정을 본인은 비효율적인 준비라고 언급했는데, 그런 비효율적 작업으로 인해 세상을 읽고 해석하는 눈이 하나 뜨였다는 말과 함께 효율이 세상을 지배해서 많은 존재가 소외되고 고통받고 있으니, 돌봄을 이야기하는 책에서만은 비효율적으로 작업하며,세계의 지배원리가 되어버린 효율의 원리를 의심하게 만들면 좋겠다고 했다.)


홍종원 원장은 프롤로그에서 "돌봄이 순환한다면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때로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이 책이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돌봄이 순환하는 세계'를 함께 상상하고 만들어갈 돌봄의 동료에게 건네는 연서"라고 표현했다. 돌봄이 순환하는 세계를 상상하는 이 의사와 "우리는 돌봄을 사회적 문제로만 접근하는 게 아니라 돌봄 그 자체의 가치를 말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부터 이제까지 우리 모두가 취약하기 때문에, 취약해지지 않기 위해서, 취약해졌을 때 서로 의존하며 살아냈다는 걸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하는 영 케어러 조기현 작가의 대담은 총 5장으로 이루어져있다.


각 장은 각각 돌봄의 관계, 돌봄이 필요한 시간, 돌봄의 동료들과 관계 맺기, 시설과 집의 이분법을 넘어서, 돌봄이 길이 되려면 이런 주제에 관한 대담을 담고 있는데, 눈에 보이는 돌봄의 현실적 문제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돌봄의 지위와 가치를 만든 배경(배후)까지도 함께 설명한다.

예를 들면, 가장인 남성의 노동은 돈을 벌고 생계를 부양하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지만, 여성의 가사노동은 돈이 안 되기 때문에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가부장적 인식의 배후가 있다. 돌봄은 생산성이 없어서 가치 없는 일로 여겨지는 것에 대한 생각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생산성의 논리와 맞닿으며 더욱 돌봄의 가치를 하락시켰다. 돌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회에서 돌봄을 새롭게 사유하고 재평가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고, 현재 닥친 돌봄 공백을 비롯한 여러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도 있다.


돌봄위기사회가 된 한국 사회를 되돌아보며 돌봄의 시간을 어떻게 채워넣을 것인지 고민하고, 좋은 돌봄을 하는 방법과 개개인이 안도감을 느끼는 장소와 사회적 환경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대담은 돌봄을 중심에 둔 사회, 돌봄으로 재구성된 사회로 이행할 방안을 제시하며 긴 여정을 마친다.


돌봄과 공동체에 대한 대안은 현실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은 곳에 있으며 내면의 떨림을 진동시키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대담자들의 이야기가 공동체의 이야기로 퍼져나가기를,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자리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제가 많이 드는 비유인데, 대안이라는 말에는 "강, 호수, 바다 따위의 건너편에 있는 언덕이나 기슭"이라는 뜻이 있어요. 그 비유를 빌리면 우리는 다 이쪽 언덕에 있는 사람이고 저편 언덕으로 가본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저 언덕에 뭐가 있는지, 우리가 정말 그곳으로 갈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은 어차피 없다고 생각해요. 사실은 '그게 가능해?' 라는 말이 잘못된 현실을 정당화하고, 변화를 막는 핑계로 작용할 때도 많고요.

우리의 관계를 돌봄이라 부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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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셋 2024
송지영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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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이름 붙이지 않은 별자리에 최초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 작가, 출판사, 독자 '셋'의 만남을 '셋(set)'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셋셋 시리즈의 첫번째 문을 여는 『셋셋 2024』를 읽었다. "지금 여기, 가장 빠르게 도착한 내일의 문학들"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이 시리즈는 올해를 시작으로 매년 소설가 3인과 시인 3인의 작품을 싣는다. 출간워크샵 프로젝트 『셋셋 2024』은 지난 여름 첫 심사를 시작으로 6개월 간의 작품 검토와 한 달 멘토링 과정까지 거친 뒤 독자들과 만나게 된 책이다.

처음 책을 읽고 든 생각은 수록 작품들이 신인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여러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지만 크게는 두 가지 정도가 될 것 같다. 하나는 작품에서 신인답지 않은 안정감이 느껴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작품에서 신인다운 패기가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랜 습작과 합평을 통한 단단한 필력과 내공이 대단하다 느껴지면서도 서툰 생동감을 찾을 수 없어서 아쉬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다시 생각해보니 서툰 생동감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신선한 소재와 열정을 쏟아부어 단기간에 써내려간 소설과 달리 오래 읽고 쓴 작가들이었다. 작품에 대해 잘 모르지만 독자로서 여느 소설과 비슷하게 일정 수준에 올라있으며 어긋나거나 삐뚤한 구석 없이 반듯한 느낌을 준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시에 대해서는 말을 '무척' 아낀다. 시를 잘 모르고 제대로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문학에서는 소설을 주로 읽기 때문에 소설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파킨슨병에 걸린 노모의 간병인이자 요양보호사인 여성을 그린 송지영의 소설 〈마땅하고 옳은 일〉은 현실과 죄의식을 양쪽에 놓고 어느 쪽으로 돌봄의 무게가 기우는지 지켜보는 소설이다. 신부에게 하는 고해성사에서 밝혀지는 진실의 한마디를 통해 독자는 무게의 경중을 가늠할 수 있으며 그 순간이 오면 어쩌면 나도, 라는 식의 공감까지 할 수도 있다. 삶을 견딜 만한 쪽으로 만들기 위해 거짓을 섞어 글을 써온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 성수진의 소설 〈재채기〉는 글쓰기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만드는 소설이다. 거짓을 섞어도 자신의 담겨있는 글은 자신의 글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너무 좋았는데 사실과 진실을 뒤섞거나 생략하는 방식으로 거짓을 섞어서 기록한 글은 어쩐지 오랜 시간 짓눌린 삶을 조금씩 떼어가서 조금은 가볍게 해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기대가 들기도 했다. 어쩌면 가장 신인 작가의 작품 같았던 내게는 가장 좋았던 소설. 그리고 연인이 키우던 고양이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반료묘 장례식장에 가던 중 공유 차량츼 타이어가 펑트나서 수리 기사를 기다리는 동안의 이야기를 그린 정회웅의 소설 〈기다리는 마음〉은 가장 안정감있으면서 단편소설의 묘미가 반짝이는 소설이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전개되는 소설의 장면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글을 쓰는 것은 무엇일까. 책을 읽고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다시 하게 된다. 내 안에서 준비된 질문은 아직도 없으니, "고요한 무대를 밝히는 첫번째 대사"인 이 작품들을 다시 읽게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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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를 해부하다 - 〈키스〉에서 시작하는 인간 발생의 비밀
유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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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에 따라 예술의 기법이나 형태가 달라지더라도 존재를 향한 끝없는 질문과 탐구라는 주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작품을 만든 작가의 의도가 관객에게 전달되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내가 처음 봤던 클림트의 작품은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알려진 <키스>와 <유디트>였다. 두 작품 모두 눈부신 황금빛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으며 관객을 압도하는 측면이 있었다. <키스>는 찬란하게 피어나는 황금빛 배경에서 키스를 하는 연인들을 모습을 그린 작품인데,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와 달리 얼굴에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여자는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묘사되었다.


본래 클림트가 처음 붙인 제목은 <연인>이었는데, 작품을 감상한 관객들이 키스를 하는 연인들의 황홀경에 흘려 <키스>라고 불렀다고 할 정도로 작품의 초점은 여자의 얼굴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유디트> 역시 황금빛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키스>와는 다른 온도의 황금빛이다. 거기에 눈을 내리깔고 정면을 응시하는 유디트의 모습은 낯설고 불편하다. 유디트 뿐 아리나 클림트의 작품을 볼 때면 그런 느낌이 자주 들었다. 낯설고 불편한, 그리고 과시적인.


내게 예술작품은 스치듯 감상하는 것이었지 자세히 보고 읽어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낯설고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는 작품들은 어쩔 수 없이 멈춰서 그 의도를 보고 읽어나가야 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클림트의 작품도 그런 작품에 속했다. 클림트는 기존 질서에 순응하는 작품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빈 대학교의 천장화를 그린 후 "검열은 끝났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작품을 거둬들였던 일화는 기존 질서가 부여하는 검열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클림트가 활동하던 시기의 오스트리아 빈은 합스부르크 제국이 몰락하고 입헌국가가 시작되던 시기였다. 국가는 쇠락하고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문화와 학술의 꽃은 만개했다. 클림트는 이러한 시기에 기존의 질서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그는 '인간과 과학'에 매혹되어, 이를 평생의 테마로 삼았다. 특히 그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주된 테마로 삼았는데, 그 테마에 사로잡혔던 배경에는 ‘빈 모더니즘’을 견인했던 오스트리아 빈의 살롱·카페 문화와 현미경의 발달로 촉발된 '과학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


클림트는 주커칸들 교수와의 교류로 쌓은 높은 생물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그림에 정자와 난자, 착상, 임신, 세포분열을 상징하는 요소를 빼곡히 새겨 넣었다. 이 책의 저자는 〈키스〉에서 시작해 〈죽음과 삶〉에 이르는 클림트의 모든 작품은 인간이 태어나 죽음으로 향해가는 과정을 발생학과 진화론적 관점에 기반해 그린 ‘연작 시리즈’라고 소개하고 있다.


처음 언급했던 <키스>를 그런 관점에서 분석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봤던 <키스>는 무엇이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그림을 확디해서 살펴보면 남성성과 정자, 여성성과 난자, 수정과 수정 후 발달과정, 혈액세포까지 그려져있다. 저자의 확대 해석이 아닌가 싶지만, 저자만의 주장이 아니라 기존 학회에서도 발표되었으며 현매경으로 확대해서 확인한 사실에 기반한 내용이다.

 

<키스> 그림을 확대해서 살펴보자. 남성성을 상징하는 부분은 남자의 옷에 표현되어 있다. 클림트는 세로로 긴 직사각형을 남성의 성기 모양의 상징으로 써왔다. 따라서 남자 옷에 표시된 검은 직사각형이 남근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다음에 설명할 <다나에>의 그림을 보면 동의하게 될 것이다.

또한 클림트는 정자의 형태를 스타일리시한 도식으로 표현하였다. 여자의 옷을 살펴보면 도라지꽃 같은 다각형이 많이 관찰된다. 좀 더 자세히 보면, 이 다각형에 물결치는 듯한 꼬리가 붙어 있는데, 이것이 광학 현미경으로 관찰되는 200~400배 확대된 정자의 모습이다. 이미 19세기에는 광확 현미경 기술이 충분히 발달되어, 이 정도의 영상을 얻을 수 있었다.

클림트를 해부하다 p156

 

현매경으로 확대해서 본 작품에 이런 코드들이 숨겨있다고 한다.

 

<키스>에서 여자의 옷에는 난자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황금색을 배경으로 파란색 경계가 그려지고 속은 노란색으로 채워진 원들이 많이 보인다. 이것이 난자의 형태이다. 마치 계란을 깨었을 때 보게 되는 형태와 유사하다.

클림트를 해부하다 p160

 

클림트의 작품들이 지닌 공통점은 인간의 삶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주된 테마로 삼았는데, 특히 <철학>과 <의학> 속 나신의 군상은 그의 생각이 명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벌거벗은 진실>과 <베토벤 프리즈>는 어머니의 자궁을 중요한 그림의 무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키스>에서도 남녀의 키스 장면과 배경 사이에 실루엣이 보이는데 전체를 연결하면 자궁의 형상을 닮았다고 한다. 작품에 대한 깊이있는 고찰을 원한다면 해부학적 측면에서 작품을 읽고 해석해도 좋을 것 같다.


화가와 해부학자에 대한 저자의 언급이 공감되어 옮겨적었다. "잘 살피고 분석한다"는 구절은 화가와 해부학자에게만 필요한 점이 아닌 것 같아서. 잘 살피고 분석하는 노력이 있어야 누군가의 세상이 아니라 내가 믿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화가와 해부학자의 공통점은 둘 다 형태를 습관적으로 잘 살피고 분석한다는 점이다. 화가들은 한번 본 이미지를 머릿속에 담았다가 그들의 작품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옮겨놓고, 해부학자는 인체의 구조와 기능을 연결하려고 노력한다.

클림트를 해부하다 p173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클림트를 비롯한 당시의 예술가들을 과학에 매료시킨 시대·문화적 배경, 2부에서는 〈키스〉, 〈다나에〉 등 클림트의 작품 속 인간 발달을 상징하는 도상들에 대한 분석. 3부에서는 클림트처럼 과학에서 예술의 영감을 얻었던 프리다 칼로, 에곤 실레, 에드바르 뭉크 등의 작품을 살펴본다.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과학이 있고 그 시대의 예술이 있을 것이다. 클림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 인공지능이 발달하여 인간의 자리를 대신하고 새로운 바이러스가 끝없이 출연하고 가장 발달된 기술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각자의 섬에서 고립된 사람들로 가득한-를 본다면 작품 속에 어떤 비밀 코드를 숨겨놓을 것인지 궁금해졌다.



-한겨레출판사 서평단 하니포터8기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서평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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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은 총을 부르고 꽃은 꽃을 부르고 - 열 편의 인권영화로 만나는 우리 안의 얼굴들
이다혜.이주현 지음,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 한겨레출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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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선한 본성을 믿는다. 우리 안의 선한 천사를 늘 응원한다. 그럼에도 인권 감수성이라는 건 저절로 길러지지 않는다. 판단력과 논리력을 기르는 것처럼 폭력과 차별과 통제와 억압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인권 감수성도 기를 필요가 있다. 오랜 시간 영화기자로 일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나는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배웠다. 로맨스영화로 연애를 배우고, 코미디영화로 개그를 배우고, 액션영화로 액션을 배워 망했다는 슬픈 전설은 건너뛰고, 영화를 통해 예민하게 감수성을 기를 수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영화를 통해 우리의 마음과 마음, 세계와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매번 조금씩 살아갈 힘을 얻었던 것 같다. 영화는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하고, 의심하지 않았더 것을 의심하게 하고,질문하지 않았던 것을 질문하게하고, 꿈꿔보지 못한 것을 꿈꾸게 한다.

총은 총을 부르고 꽃은 꿏을 부르고 '서문'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통해 세상을 배운다. 무언가를 통하지 않고 배우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 바탕에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이주현 기자는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 글에 나오는 '영화'라는 단어를 자신에게 무언가를 깨닫게 한 다른 단어로 바꿔도 본래 의미가 크게 손상되지는 않을 것이다.

책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음식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음악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그림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사람(가족, 친구, 우연이거나 필연이거나 일상적 인물 등등)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낚시를 통해 세상을 배웠다. 야구를 통해 세상을 배웠다. 바둑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

어떤 것을 통해 세상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배움이 자신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으며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성장시켰는지 깨닫는 과정일 것이다. 영화든 책이든 어떤 것을 통해 배운 세상이 자신이 가진 선입견이나 편견의 단단한 껍데기를 무르게 만들 수 있다면, 다수의 의견에 올라타는 것이 쉽지만 그것이 결코 올바른 것과 동일한 의미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진실에 비춰 자신의 자화상을 부끄럼 없이 그려낼 수 있다면, 균일하고 매끄럽게 보이던 세상의 표면이 실은 균열과 부식을 감추고 있었다는 걸 알아챌 수 있다면.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게 자연스러운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뜨거운 자갈길을 밟으며 걷는 일처럼 고통스럽다는 차이를, 마침내 알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차별과 혐오의 메시지를 남기지 않을 수 있다면.

이 책은 2013년부터 10년 동안 만들어진 열 편의 영화와 인권 이야기다. 그 전에 씨네21북스에서 출간한 《별별차별》에 국가인권위원회가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제작한 인권영화 10편을 담겨 있으니 이 책은 '영화로 만나는 인권' 시즌 2이라고 할 수 있다. 책에 수록된 열 편의 영화에는 지난 10년 동안 한국 사회의 풍경이 담겨 있다. 이중에서 《메기》와 《4등》은 꽤 알려져서 대략적인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영화들은 모두 처음 접하는 영화들이었다.

불법 촬영과 실업,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서 불안한 청년을 다룬 메기. 교사와 학생 모두의 학습권과 생존권이 보장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우리는 떡볶이를 먹을 권리가 있다. 이른 나이부터 너무 힘을 내다가 낙오된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힘을 낼 시간. 누구나 노인이 되고 있으며 실제로도 노인이 많은 나라이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봉구는 배달 중. 학습과 운동이 양립할 수 없는 구조를 통해 성적을 위해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는지 묻는 4등. 존엄한 죽을 맞이할 권리를 돌아보며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하늘의 황금마차. 고독사와 가난에 대한 공포를 보여주는 소주와 아이스크림. 양심적 병역 거부의 문제를 다룬 얼음강. 장애와 비장애의 이분법적 구분이 아닌 각기 다른 위치에 서있음을 보여주는두환에게. 시스템을 벗어난 이들에 대한 시선을 보여주는 과대망상자들. 이렇듯 인간의존엄과 관련된 열 편의 영화를 보는 동안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문제로 남아있지만 다수의 관심을 받지 못해 한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고여있는 문제들의 실체를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서문에서 언급했듯 인권 감수성이라는 건 저절로 길러지지 않기에 익혀야 한다. 무언가를 통해 열심히 배워서 익혀도 나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면 어느새 희미하게 사라지기도 한다.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지 않을 때는 잘 몰랐는데, 매일 붐비는 시간에 지하철 출퇴근을 하다보니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시위로 인해 지하철이 늦어지면 조바심이 생기면서 왜 하필 이 시간에 하는 걸까 하는 원망스러운 마음이 올라오기도 했다. 지각을 하면 안 되는 시간에 그 시위로 인해 지각을 하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사실 문제의 원인은 시위를 하는 사람도 시위로 인해 피해를 받는 사람도 아닌, 시위를 하게 된 근본적인 문제를 그대로 방치해두고 있는 기관 때문이다. 그게 해결된다면 시위가 벌어지지 않을 것인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기관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벌어지는 일을 방관하고 있다. 실제로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이런 식으로 우리는 가끔 잊어버릴 때가 있다.

그리고 피곤한 일이 쌓이고 내 삶에 대한 불안이 쌓일수록 나는 인권 감수성에 경각심을 불어넣는 종류의 매체들이 불편했다. 예전에는 잘 찾아서 읽던 책이나 영화, 뉴스 등을 보면 나의 불안도 더 커지는 것 같아서 밝고 편안하고 환한 것들만 찾아다니며 웃고 떠들었다.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인권 감수성에 대한 관심은 나의 삶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누구라도 언제든지 다른 위치에 설 수 있으며 그건 바로 지금이 될 수도 있다.

영화는 때로 비현실적이고 너무 이상적일 때가 있다. 현실에서 누가 저래, 현실에서 저런 결말이 어디 있어, 라고 나무라고 싶은 영화들이 꽤나 있다. 하지만 그런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무언가를 배운다. 분명히, 배운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책의 제목처럼 반드시 총은 총을 부르고 꽃은 꽃을 부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메시지가 보여주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총 대신 꽃을 손에 쥐어주는 세상을 나도 꿈꾼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지만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배우는 사람을에 의해 영화는 세상을 바꾸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을 보면서, 혹은 다른 영화를 보면서 세상이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종종 깨닫는다. 그래서 아직도 나는 영화가 좋고 책이 좋고, 무언가를 통해 배우는 과정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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