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오래 산다 - 30년 문학전문기자 생애 첫 비평에세이
최재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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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문학의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아 보인다. 종이신문 역시 생존의 기로에 놓여 있다. 같은 활자 매체로 문학과 신문은 어쩌면 같은 운명을 지녔는지도 모르겠다. 30년 동안 종이신문에서 문학을 담당해온 나로서는 더 늦기 전에 정년을 맞게 된 것이 일면 다행스럽다 싶기도 하다. 종이신문 문학 담당 기자의 정년퇴직이란 어쩐지 삼박자가 잘 맞아떨어지는 느낌을 주지 않겠나. 아까운 지면에 이렇듯 소소하고 심란한 이야기를 늘어놓게 되어 독자들께 미안한 마음이다. 정년을 앞둔 퇴물의 넋두리라고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다.

이야기는 오래 산다/ 들어가는 글

1988년 한겨레 신문사에 입사해 1992년부터 2022년까지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한 지난 30년을 저자는 "분에 넘치는 영광과 보람의 세월"로 기억한다. 일간 신문에 문학작품을 읽고 나름의 의견을 기사 형태로 제출하는 작업은 독서와 기사 작성을 동시에 해야 했으므로 시간과의 싸움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학 기사를 위해 문인드을 인터뷰하거나 만나는 즐거움은 그에게 "그 무엇과도 바꾸기 싫을 정도"였으며, 자신이 스스로 '보물 1호'라고 일컫는 것은 "지난 30년 동안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문인들로부터 받은 편지와 그들과 함께 찍은 사진 스크랩"이라고 말한다. 이토록 깊은 애정과 진심이 있었기에,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문학작품을 읽고 신문에 실을 기사를 작성하고 문인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기획기사를 위해 매주 출장을 떠나는 숨가쁜 일정을 해나갔던 것이 아닐까.

이 책에 수록된 직업인으로서의 최재봉의 글은 작가와 작품, 문학계 쟁점과 인물, 칼럼, 서평 등으로 이어진다. 30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그가 읽고 쓰고 만나고 인터뷰한 결과물, 그 속에는 시대와 사람이 담겨있다. 사랑하는 문학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다. 책, 책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이의 자신이 담겨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이야기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저자가 쌓아올린 오랜 이야기들은 사람과 문학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빛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그 빛들에는 어쩔 수 없이 틈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 작은 틈새를 메우는 것은 바로 저자 자신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무언가를 완성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가 세운 오랜 이야기에 담긴 것들이 부럽다.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자신만의 것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으며 오랜만에 듣는 이름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었다. 조세희, 박완서, 김소진, 무라카미 하루키 등의 작품에 대한 글을 만나던 중 신경숙 표절과 부딪히게 되었을 때는 그시절의 기억이 새록 솟아났다. 일정 기간 동안 이슈가 되었다가 잊힌 이름과 작품들이 오랜 이야기 상자 속에서 새롭게 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글을 한 편 한편 천천히 읽어갈 때마다 시간을 꺼내먹는 것 같아서 기분이 간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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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러시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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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 안으로 노을이 흘러 들어왔다. 진우는 핸들을 움켜쥔 손등에 내려앉은 붉은 햇빛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역시 붉게 물든 서인의 옆얼굴을 보았다. 주머니에 넣어둔 오팔 반지를 생각했다. 그는 서인에게 박수를 받으며 식장에 입장해 그녀에게 입을 맞춘 적도 없었다. 초음파사진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 적도, 서인의 눈을 닮은 아이를 보며 경탄한 적도 없었다. 진우와 서인은 빛나는 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빛나는 순간. 진우는 그들이 늘 그것을 기다려왔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절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붉은 햇빛이 차 안에 가득 들어찼다. 그는 온통 붉기만한 세계를 바라보았다. 

골드러시/ 서수진


표제작 <골드 러시>는 빛나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낯선 타국으로 건너와서 불안하고 떠도는 삶을 살아가는 이방인들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집의 표제작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의 첫 장면은 이렇다. 골드러시를 체험할 수 있는 상품인 '골드 러시'를 즐기기 위해 서인과 진우는 함께 차를 타고 끝없이 펼쳐진 붉은 흙 위를 달리고 있다. 인적은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그 길에서 그들은 사고 다친 캥거루 한 마리와 조우한다. 캥거루는 무척 괴로워보이지만 그들이 특별히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냥 두고 가자는 진우에게 서인이 힐난한 듯한 말투로 대응하지만, 진우는 "그럼 네가 남아서 뭐라고 해보든가." 라는 말과 함께 차로 먼저 돌아갔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 혼자 남게 되면 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캥거루를 위한 일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조차도 불가능할 것이다. 진우에게는 서인에게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결혼 7주년을 맞이한 두 커플은 사랑하기 때문에 부부로서 함께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이유로 헤어질 수 없어서 그저 살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처음 사귀기 시작할 때 이 커플은 빛나는 미래를 설계하며 가슴 가득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난관들- 비자 문제,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동, 벗어날 수 없는 생활고, 그로 인한 피로와 고독, 마침내 권태와 파국으로 이어지는-은 그들에게 가득했던 희망을 소리없이 앗아갔다. 그렇게 7년을 살아가던 중, 서인이 여행사 프로모션 상품인 '골드 러시'를 예약했다. 지하 광산을 개조해 만든 숙소와 금광 체험, 사륜구동 렌터카가 포함된 상품인데 여행사 프로모션으로 반값 할인을 하는 상품이었다. 여행지로 가는 도중 그들은 조금 전의 캥거루와 조우한 것이었다. 애초에 오고 싶지 않았던 여행이었다. 일하고 있는 매장에 휴가를 내는 것도 서인과 함께 여행을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으니까. 결혼 7년 동안 이 커플의 삶은 메말라서 황폐해져갔고,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듯했다. 

  '골드 러시'라는 여행 상품은 둘의 만남과 결혼 생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미장센처럼 보인다. 한때는 빛나는 금을 찾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금광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몰락하고 황폐해져 폐광으로 변했고, 이제는 반값 할인으로 겨우 관광객들을 끌어모아서 근근이 버티고 있는 금광이 있던 자리. 서인과 진우의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빛나는 삶을 꿈꾸었던 순간은 이방인의 고된 삶 속에서 무너져버렸고 이제는 관성으로 이어진 생활만이 남아있었다. 영어를 잘 하지 못해 호주에서 늘상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던 진우는 서인의 도움으로 소통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정작 서인과의 소통은 단절되어버렸다. 그렇게 보면, 진우의 소통 불능은 영어 실력의 부족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폐광에서의 금광 체험을 하는 동안 가이드는 계속해서 천장의 돌을 만지면 무너질 수 있으니 만지면 안 된다고 주의를 했지만,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할 뿐 아니라 주위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진우는 그물에 감싸인 천장의 암석을 만지고 만다. 서인이 진우의 행동을 말리며 설명을 해준 다음에야 진우는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서인은 가이드에게 진우가 영어를 잘 못한다는 사실을 알리며 사과를 했다. 그때 서인은 "자신이 광산을 뒤흔든 것처럼, 그래서 광산이 완전히 무너져내린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걸어왔던 삶에는 가느다란 빛 하나 스며들지 않는 광산처럼 끝을 알 수 없는 어둠만이 펼쳐져있었고, 그마저도 소통 불능으로 인해 무너질 위기에 처해있다는 걸, 소설은 이 장면을 통해 보여주고 이다.

  빛나는 이름과 달리, '골드 러시' 는 빛을 거두는 방식으로 끝을 맺어간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진우는 도로로 뛰어든 캥거루를 치고 만다.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캥거루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 쇠막대로 캥거루를 내리친다. 캥거루가 살아있다는 서인의 말을 무시하고 쇠막대로 내리쳐서 캥거루를 죽인다. 그렇게 차를 달리다가, 진우는 정말 캥거루가 살아있었냐고 서인에게 묻는다. 대답하지 않는 서인과 함께 있는 차안으로 붉은 노을이 흘러 들어오며 차안을 가득 채운다. 그 방향 그대로 서있는다면 붉은 노을로 채워졌던 차는 시간이 흐르면서 검은 어둠으로 채워질 것이 분명하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제목과 결말과 미장센이 너무 제대로 맞아떨어져서 놀라게 된다. 차 안이 "붉기만 한 세계'가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진우와 서인 커플의 삶과 '골드 러시' 여행상품과의 연관성이 얼마나 밀접한지, 소설의 플롯은 이렇게 짜야 하는구나, 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골드러시>에서 느꼈던 감탄은 <배영>에서도 다시 찾아오는데, 폭죽을 거꾸로 들고 있는 장면이 그러하다. 어둠 속에서 짧은 순간 가장 빛나는 불꽃을 발할 수 있는 폭죽을 우현은 거꾸로 들고 있다가 다리를 다치게 된다. 빨갛게 부어오른 다리에도 불구하고 우현은 괜찮다고 말하고, 이를 지켜보던 여진은 그를 치료하기보다는 다른 폭죽에 불을 붙인다. 그런 다음 밤바다를 걸으면서 우현은 말을 건네고 여진은 다른 곳을 쳐다보는 장면은 빛나는 순간을 가지려다 오히려 상처만 입게 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게 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폭죽을 거꾸로 들고 있었나 봐.

 우현이 옆으로 집어 던진 폭죽에선 계속 불꽃이 터져나왔다. 여진의 폭죽도 뒤늦게 불꽃을 토해냈다. 그녀는 빨갛게 부어오르는 그의 다리를 지켜보았다.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냐?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는데?

 정말 괜찮아. 이러다 나을 거야.

 여진은 잠시 침묵하다 다른 폭죽에 불을 붙였다.

 폭죽을 다 써버린 후 밤바다를 따라 걸었다. 가로등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모래사장의 어둠 속 여기저기에 연인들이 바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우현은 다리를 절뚝거렸다. 상처가 그새 거무죽죽하게 곪아있었다. 여진은 고개를 돌렸다. 우현이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말했다. 그녀는 방향을 틀어 바다로 걸어갔다.

배영 / 서수진

《골드 러시》에 수록된 8편의 단편은 표제작 <골드 러시>처럼 한때는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을 공유하며 함께 희망을 꿈꾸었던 연인들이 낯선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면서 관계와 꿈이 무너진 후 빛바랜 삶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배영> <외출금지>와 같은 연인들의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루며, 다른 한 축은 일평생을 성실하게 일해온 이민1세대의 고달픈 삶과 ‘차별’과 ‘편견’에 기대왔던 그들의 모순에 대한 이야기 <캠벨타운 임대주택> <졸업 여행> <헬러 차이나> <한국인의 밤> 등의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승수는 텅 빈 식당에 앉아 채찍처럼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단단히 움켜쥐었다고 믿어온 성취를 곱씹었다. 식당은 뜨거운 공기로 가득했다. 냉면 얼음은 녹아버렸고 국물에는 기름만 둥둥 떴다. 냉장고 안의 고기는 부패하고 있었다. 그는 땀을 흘리면서도 입술이 바짝 말랐다. 주먹을 꽉 쥐었다. 그동안 이룬 것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졸업 여행/ 서수진

  <코리안 티처>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서수진의 첫 번째 소설집 《골드 러시》에는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이자 표제작인 ‘골드러시’와 미발표작 ‘졸업여행’을 포함해 작품 8편이 수록되었다. 어느 곳에서 살아가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나 실패, 자기 혐오, 자기 모순, 정체성 혼란과 같은 순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더 나은 삶, 빛나는 삶을 희망하며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러한 순간은 더욱 힘겨운 시간이 될 것이다. 희망을 품고 그려냈던 꿈의 세계는 멀어져가고, 빛이 들지 않는 끝없는 어둠 혹은 인적 없는 흙길을 향해 나아가야 할 때 갑작스러운 붕괴(폐광처럼)나 돌연한 출몰(캥거루) 등으로 인해 그동안 지나왔던 삶의 궤적이 소멸되거나 방향이 완전히 틀어져버릴 수도 있으니.


타국에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를 주요 소재로 삼고 있지만, 소설 곳곳에 나오는 소통 불능 혹은 소통 부재이라는 요소는 어디에서나 적용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낯선 곳에서 그로 인한 충격은 더욱 크게 다가오겠지만, 같은 언어와 문화가 배경인 고국에서도 그로 인한 배제나 불화는 늘 존재한다. 


소설집의 가장 처음에 실린 단편 <입국심사>에서 유미는 서울 녹사평에서 만났던 미군 출신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간다. 하지만 입국심사 과정이 만만치 않다. 유미는 자신이 미군 출신 남자친구 에디와 진지한 관계임을 강조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과적으로 심사관이 원하는 것은 둘의 관계가 진지하지 않고 진전되지 않는 것이었다. 심사관이 미국에 머무는 동안 결혼하지 않겠다는 서명을 하면 통과시켜주겠다고 한 순간, 유미는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입국심사관에게 중요한 건 두 사람의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한국인 유미가 미국에 눌러앉게 되는 경우의 수였다. 유미는 서명을 했고, 심사관은 에디에게 전화를 걸어 유미와 결혼할 거냐고 물어본다. 그리고 에디의 대답을 듣고 만족한 얼굴로 유미를 통과시켜준다. 그 과정에서 유미는 자신이 녹사평 미군부대에 놀러갔을 때 아무도 자신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 미군 남자친구에게 유미는 한국에 있을 때 잠시 알고 지냈던 타국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책을 읽고 사람은 세상에 태어난 이상 누구나 이방인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한계는 소통 불능 혹은 부재로 이어지며 "붉은 햇빛"이 가득 들어찬 삶을 언젠가는 만들어낼 것이며 한껏 부풀려놓았던 희망을 짓눌러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시작을 함께 했던 사람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옆에 있다. 마음의 형태와 방향이 변했을지라도, 누군가 아직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붉은 햇빛"이 무너져내리는 폐광의 전조가 아닐 거라고 자조한다. 아직 눈을 가릴 정도의 어둠은 찾아오지 않았고 이방인으로 태어난 우리의 삶은 움직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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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후의 세계 - 다원 패권 시대, 한국의 선택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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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집필한 목적 중 하나는 지금 미국의 패권적 지위에 도전해 2020년대 이후 다시 한번 글로벌 강대국으로서 세계 패권의 일부라도 나누어 가지려는 푸틴의 러시아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본 틀을 독자들에게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러시아의 '연성 권력'(소프트 파워)이 왜 이토록 약한지, 왜 연성 권력과 경제적 비중의 부족을 군사주의와 침략 정책으로 '벌충'하려 하는지, 이 군사주의와 침략 정책들이 왜 70퍼센트가 넘는 러시아인들의 지지를 얻게 된 것인지, 왜 러시아에서 반전 세력들이 이토록 반전운동의 대중화에 실패했는지 등을 러시아의 역사와 같은 배경을 염두에 두고 서술했습니다. 이러한 설명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국 패권에 대한 푸틴 정권의 도전, 그리고 앞으로 러시아가 나름의 역할을 맡게 될 새로운 세계 패권 질서의 파악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전쟁 이후의 세계 -프롤로그


"전쟁은 인간의 마음에서 생기므로 평화의 옹호는 인간의 마음에서 건설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명시되어 있는 '유네스코 헌장' 전문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요소를 신뢰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평화를 옹호하는 인간의 마음은 좀처럼 건설되지 않고, 전쟁을 발생시키는 인간의 마음은 좀처럼 그치지 않고 있으니 전문은 전문일 뿐 현실은 이와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발발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2년을 넘어섰다. 전쟁 초반에 가졌던 강렬한 기세로 몰아붙인 러시아의 손쉬운 함락으로 금세 끝날 거라는 예측과 달리, 우크라이나의 거센 저항 및 서방국가들의 제재로 인해 전쟁의 끝은 요원한 것만 같다. 하지만 만약 전쟁의 끝이 보인다고, 그 끝에는 무엇이 남아있을까. 러시아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국토는 이미 황폐화된 상태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만약 '평화를 옹호하는 인간의 마음'에 불이 붙어서 전쟁이 극적으로 끝나게 되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상황이 발생해서 전쟁이 극적으로 끝나게 되거나 했을 경우, 그것은 말 그대로 '엔딩'일 수 있을까.

한 권에 담긴 스토리로 엔딩을 맞을 수 없기에 현실의 전쟁에는 깔끔한 엔딩이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표면적인 종식을 맞이한다고 해도, 러시아가 10년 이내 에 나토와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예측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한국인으로 귀화하기 전까지 '블라디미르 티호노트'라는 러시아 이름을 가진 러시아 출신 지식인 박노자는 러시아 사회의 작동 원리를 내부자의 시선으로 분석하여, 푸틴 체제의 침공 전략을 설명한다. 그뿐 아니라, 현재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들을 지정학적 관점에서 다원 패권 시대로의 이행을 알리는 징후로 해석한다. 내부자의 시선으로 러시아를 분석하고, 학자의 시선으로 시대를 분석하며 이끌어낸 통찰력으로 박노자 교수는 일명 전쟁의 시대에 전쟁 없이 평화로운 외교를 펼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한반도 평화'에 중심을 둔 외교 및 안보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미국에 대한 맹종적인 태도를 버리고 한국 스스로가 주변 외교의 독립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박노자 교수의 책 이전에도 윤석열 정부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취한 태도는 여러 우려를 낳았다. 한미 동맹 이전에 한반도의 평화가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무력 갈등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최대한 평화 지향적 균형 외교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나라를 맹종하여 그와 대립되는 나라를 배척하는 식의 외교는 작은 불씨 하나가 거대한 화염으로 번질 수 있는 현재 국제 정세와 맞지 않다. 박노자 교수는 윤석열 정권의 우크라이나 지원과 한미동맹 강화 정책으로 인한 관계 변화와 경제와 안보 및 외교에 대한 손익 결산을 정확하게 제시하며 초기 외교 정책에 대해 비판한다. 하지만 현재 한국과 러시아 관계의 "처참한 상태"에 대한 책임을 윤석열 정권에만 묻는 것은 정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며 "어떤 정권이 집권했어도 일정 정도의 관계 악화를 강오해야만 했을 것"이라고 비판적인 시선을 분산시키면서도, "대미 충성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치적 행동은 자제했어야 했던 것"이라고 실질적인 조언을 한다.

이 글의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박노자 교수는 독자들이 현재 세계 패권을 파악하는데 일부 목표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지금처럼 미국의 패권이 쇠락하고 세계 질서가 다원 패권 체제로 재편되는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는 말을 하며 미국과 일본 뿐 아니라 러시아, 중국, 북한 등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국가들과 평화 지향적인 외교에 나서야만 한반도의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말을 한다.

그러한 결론에 이르기 위해 이 책에서는 다음처럼 4부에 걸친 내용을 담아 설명하고 있다.

1부 : “혁명의 국가” 소련은 어떻게 침략 전쟁의 주역이 됐나

2부 러시아는 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는가

3부 한국과 러시아,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4부 포스트 워, 세계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국형 열강 사이의 영구적인 경쟁을 의미하는 '다극'이 아니라 평화입니다. 미 제국 패권 체제도 그랬지만, 균세 시스템도 평화를 절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면, 민초 차원의 평화 운동부터 그 힘을 키우고, 영구 전쟁 체제의 경제적 배경, 이를테면 전시 무기 판매 등으로 군수 복합체가 얻는 초과 이윤 등에 대한 '불편한 질문'들을 던져야 합니다.

전쟁 이후의 세계, p296

외교는 자국의 평화와 안전,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마땅하다. 며칠 전 우크라이나 파병에 대해, 나토는 "국제법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가 있으며 우리는 그 권리는 지킬 수 있도록 지원할 권리가 있다"며 기존처럼 지원 가능성만 언급할 뿐 파병에 대해서는 "계획없다"고 일축했다. 또한, 미 백악관에서도 "우크라이나 군대가 스스로를 방어하는데 필요한 무기와 탄약을 갖출 수 있도록 교착된 군사 지원 패키지를 통과시키는 것이 승리의 길이라고 믿는다"는 말과 함께 "우크라이나에 미군 파병 안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책을 계기로 한국이 취해야 할 입장과 노선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다. 실시간 전쟁 게임처럼 방송에서 전해주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기만 하면, 평화를 옹호할 수 있는 인간의 마음은 언제 건설될 것인가. 그러한 인간의 마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깊은 고민과 멈추지 않은 공부를 통해 조금씩 쌓이는 것이므로, 우리가 정말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작은 돌에 소망을 담아 탑을 쌓아가는 마음으로, 그렇게 평화를 옹호하는 인간의 마음을 건설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국과 오랜 동맹 국가라고 표명하고 있는 미국의 울타리는 그다지 견고하지 않으며 이타적이지도 않다. 또한, 다원패권주의로 흐르는 시대에는 미국의 낡은 울타리 안에 갇혀 맴돌기만 해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의 평화를 중심에 두고, 여러 나라와 평화적으로 협력하고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다원패권주의의 시대, 우리가 누구의 언어로 누구의 평화에 대해 고민하고 발언해야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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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캐나다의 한국인 응급구조사 - 나를 살리러 떠난 곳에서 환자를 살리며 깨달은 것들
김준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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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에게는 최악의 날이 나에게는 일상이 된 지금, 나 또한 내가 맡았던 환자들처럼 때로 불행해지고, 앞으로 약해질 것이며, 최악의 시간을 거쳐 언젠가 반드시 죽음에 이르리라는 것을 안다. 삶이 유한하다는, 이 지극히 당연하고 간단한 사실을 배우기 위해 아둔하기 이를 데 없는 나는 여러 번 가슴을 치며 눈물을 쏟아야 했다. 하지만 내 고향 한국에서 이 책을 접할 분들은 나처럼 가슴 아픈 순간은 건너뛰고 삶의 유한함만 되새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예전에 비해 지금의 한국은 물질적인 면에서 무척 발전했고 살기 편해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그만큼 편안해지지 못했다는 얘기를 여러 지인으로부터 들었다. 나는 그곳 사정에 밝지 못하지만 여러 지인으로부터 들었다. 나는 그곳 사정에 밝지 못하지만 여러 매체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평생 불행하지 않을 것처럼, 평생 아프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평생 죽지 않을 것처럼 살며 오로지 똑같은 목표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달려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한때 그랬듯, 삶은 결국 유한하다는 사실을 잊은 채 말이다.

--나는 캐나다의 한국인 응급구조사/ 들어가는 글

작가가 '들어가는 글'에 쓴 문장 중 "평생 아프지 않을 것처럼" "평생 죽지 않을 것처럼" "오로지 똑같은 목표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달려간다"는 구절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앞의 두 구절, "평생 아프지 않을 것처럼" "평생 죽지 않을 것처럼"에 물음표를 그렸다. 평생 한국에서 살아가면서 "똑같은 목표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보았지만, 그들의 맹렬한 기세로 달리는 속도에 모두 그런 이유를 붙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속도가 붙어서 멈출 수 없는 기세로 달려가는 집단적 달리기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에서 얼핏 그런 식으로 보일 수 있지만, 나는 한국의 집단적 달리기의 이유에 불안과 강박이라는 단어를 붙였다. 불안하니까 강박이 생기고, 그러한 강박의 반복으로 인해 불안은 떠날 줄 모르고. 지금 아프고, 이러다가 죽을 것 같아도 달리기를 멈출 수 없는 사회의 아픈 단면처럼 보였다.

물론 작가는 삶의 유한함을 깨닫는 것으로 삶의 의미와 목적을 되새기자는 의도로 한 말이라는 것을 안다. 평범하게 보이지만 소중하게 반짝이는 삶의 조각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간직하고 삶의 마침표를 잘 찍기 위한 과정을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이 담겨있다는 것도. 집단적 달리기에 붙이는 이유는 달랐지만, 결국 나도 작가도 삶의 조각들을 살피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하는 마음은 같다.


혹시라도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매일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이 가끔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지? 그렇다면 당신 일상 중 어떤 하루는 눈앞에서 가족이 사고를 당하는 모습, 심지어 그 가족의 목숨이 끊어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날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러면 당신이 느끼는 그 지루함에 오히려 감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캐나다의 한국인 응급구조사 p70

대학에서 회계를 전공하고 대기업에서 군사용 IT솔루션의 해외사업개발 업무를 하면서 12년 동안 회사원으로 일하다가 갑작스레 삶의 회의가 찾아온 작가는 나이 마흔에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캐나다로 떠나와서 최저시급을 받는 일을 전전하다가 이민 3년차, 마흔 셋의 나이에 캐나다의 응급구조사가 된다.

캐나다에 처음 도착해서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정부 보조가 없으면 생계유지가 불가능한 사회적 약자이자 저소득층, 이민자였던 그는 이제 캐나다 온타리오주 렌프루 카운티 소속 공무원이자 파라메딕으로 채용되어, 사람들에게 사회공공서비스를 주고 있다.

응급구조사라는 직업인으로서의 그에게는 평범한 일상의 나날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평생 잊혀지지 않는 참혹한 날이 될 수도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 평화롭고 살기 좋은 캐나다에도 여러 삶이 있으며 작가가 보는 삶은 대체로 안타까운 상황에 몰린 삶, 그리고 죽음을 앞뒀거나 죽음을 마친 사람들이 있는 삶이다.

괴롭고 안타깝고 슬프고 참혹한 현장을 자주 마주할수록 비극을 생각하는 삶으로 기울 것만 같은데, 작가는 주어진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과 삶의 소중한 순간들을 간직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저마다 중요하다고 믿는 것들을 갖기 위해, 혹은 더 갖거나 뺏기지 않기 위해 애쓰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분명 그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인정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그거 열심히 살고만 있는 것은 아닌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진짜 중요한 것들을 챙기며 사는 법은 잊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결국 우리는 다 똑같이 죽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살아 숨 쉬고 까닭에 쉽게 느끼지 못할 뿐 죽음은 삶과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오히려 우리 인생길 바로 옆에서 함께 조용히 걷고 있을 뿐이지요. 따라서 죽음은 삶의 일부분이며, 잘 죽는 것은 우리 삶의 마침표를 잘 찍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캐나다의 한국인 응급구조사/ 나가는 글

책을 읽으면서 방송에서 보았던 이미지로만 알고 있던 캐나다의 표면 아래 어떤 삶들이 숨어있는지 엿볼 수 있었다. "오래된 교회 건물의 지하 한구석에 판자를 얼기설기 세워 마든 방, 옷장 대신 커다란 쓰레기용 비닐봉지에 옷을 보관하고, 가구라고 해봐야 찢어지고 검게 때 탄 매트리스가 전부인" 그런 집에서 아빠를 살리기 위해 심장을 계속 누르고 있던 어린 딸의 모습은 내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아내를 벽난로에 대고 차고 밟아서 얼굴 윤곽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든 남편, 응급구조대에 전화를 건 상태로 권총 자살을 한 사람, 코카인에 취한 산모 옆에서 죽어간 조산아.. 그리고 수많은 사고와 죽음들.

생계 때문에 선택한 응급구조사라는 직업은 작가에게 삶의 의미를 되찾게 해주었다. 모든 죽음은 슬프고 최대한 멀리하고 싶은 일이지만, 그로 인해 삶이 유한하다는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하지만 중요한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반짝이는 평범한 순간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사는 일은 늘 어렵고 숨이 차다. 하지만 늘 그런 것만은 아니다. 평범한 듯 작은 조각들이 흔들리면서 시간을 채우고 있다. 흔들리는 그 시간들 속에서, 가끔 반짝이는 조각을 발견하여 만질 수 있다면, 그런 순간들이 하나라도 더 늘어나준다면 사는 일은 조금 덜 어렵고 조금 덜 숨이 찰 수도 있다. 집단적 달리기를 하는 이유에 붙인 물음표를 떼어 버리고, 맹렬한 속도의 궤도에서 이탈해도 좋은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면. 감성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삶의 대부분은 이성이 아니라 그런 감성에 의해 구성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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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같은 나무 하나쯤은
강재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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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맨 꼭대기 우듬지가 하늘을 치받지 않고 하늘이 허락하는 대로 자라듯, 사시사철 변화에도 역정 내지 않고 순응하며 느리게 자라듯, 비를 맞고 눈을 맞으며 하나도 안 자란 듯 겸손하게 자라는 나무처럼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면 내가 먼저 나무가 되자. 그렇게 되면 길 위에서 어떤 나무를 만나든 나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나무에 대해 관심이 커진 뒤 나무 사진도 열심히 찍게 되었다. 잘생기고 유명한 나무보다는 이름 없는 들에 이름 없이 혼자 선 나무에 눈이 더 가기 시작했다.

친구 같은 나무 하나쯤은 p72~73

친구를 배웅하기 위해 집앞 버스정류장에 나갔던 강재훈은 영문도 모른 채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붙잡혀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들은 설명한 틈도 주지 않고 무작정 강재훈을 때렸고 삼청교육대로 끌고 갔다. 다행히도 통사정을 하여 강재훈은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 이후의 삶은 불안과 공포의 나날이었다.

대학생활 동안 대통령이 세번이나 바뀌었던 격동의 시기에 청년 강재훈은 생각과 느낌과 존중을 잃어갔다. 그러다가 가야산 백련암에 올랐고, 그곳에서 "남을 위해 기도하라!"고 재차 일러주신 큰 스님과 만났다. 그때 강재훈은 '화두는 못 풀더라도 나무처럼은 살아보자!' 라고 스스로 다짐했다고 한다. 그때 가슴에 담은 말이 '나무는 서 있는 사람이고 사람은 걸어 다니는 나무'이다.

나무처럼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자신이 먼저 나무가 되자는 마음. 이름 없는 들에 이름 없이 선 나무에 눈이 더 가기 시작하는 마음은 그를 '걸어다니는 나무'로 만들었고, 길 위의 나무들과 친구가 되도록 했다. 나무의 사진을 찍는 것도 좋아하지만 나무와의 대화가 더 즐거울 때가 많다는 작가의 마음이 이 사진 에세이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은 기술이기에 앞서 오래 지켜보는 애정이 아닐까.

사진 에세이 《친구 같은 나무 하나쯤은》에는 작가의 전시회에 걸렸던 작품들 중 100여 컷의 사진과 함께 사진에 얽힌 작가의 이야기를 함께 실었다. 이름 없는 곳에 있는 이름 없는 나무들은 작가의 따뜻한 시선을 통해 새로운 인연으로 태어났다.

사진가이자 산림 교육 전문가인 강재훈은 《한겨레》 《한겨레21》 《씨네21》 사진부장과 한국사진기자협회 김용택사진기자상 이사장, 국회 미래연구원 미래사진전 책임 사진가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진 집단 ‘포토청’ 대표, 서울 광진마을기록단 대표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다. 30년 이상 신문사 사진 기자로 근무하면서 ‘한국보도사진전 최우수상’ ‘올해의 사진기자상’ ‘이달의 보도사진상’ 등을 수상하는 등 여러 이력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100여 곳이 넘는 작은 분교와 그곳에서 해맑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사진으로 기록했던 이유로 ‘분교 사진가’라는 별명이 붙었다. 분교를 찾아다니며 작가와 나무의 인연은 더욱 깊어졌고 더 많은 나무 친구들이 생겨났다.

이 책의 처음도 진동분교를 찾을 때마다 눈에 들어왔던 나무 친구와의 인연으로 시작된다. 십수 년의 인연과 작별 인사도 없었던 마지막까지. 작가의 사진과 글을 보고 있으면 추억과 회환의 감정이 동시에 몰려드는 것만 같다. 자신에 대한 존중을 잃어버린 채 하루하루 숨가쁘게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도 '걸어다니는 나무'가 될 수 있음을 잊지 않기를 바라며, 길 위의 이름 없는 나무에 오래도록 시선을 두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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