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동 헤리티지 - 공단과 구디 사이에서 발견한 한국 사회의 내일
박진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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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구로동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신경숙의 소설 『외딴방』을 통해 보이는 것처럼 열악한 노동환경의 구로공단으로 대표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구로동은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라 입주해 있던 기업들이 하나둘 줄어가기 시작하면서 1995년에는 노동자 수가 4만 2천명까지 줄어들었다. 1970년대 후반에 약 11만 명이 구로공단에서 종사하고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노동자 감소 폭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와서는 정부 주도로 IT 첨단 산업 단지로 육성하기 시작하면서 구로단지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이 바뀌었고 동시에 많은 부분들이 변해갔다.

오래되고 낡은 공장이 있던 자리에는 아파트형 공장들이 세워졌고 제조업 중심이었던 산업은 출판, 영상, 방송통신, 정보서비스업으로 변해갔다. 좁고 어둡고 분진 날리는 열악한 환경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이곳에서 일하는 많은 노동자들은 비정규,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열악한 노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살게 되었다는 것도 내가 아는 사실. 자,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사실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다. 그럼 이제부터 그로동에서 태어나 24년을 살고 있는 구로동 토박이인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다. 내가 아는 기본 정보와 구로동이 얼마나 비슷하고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서.

나는 구로동에 산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20년이 넘도록 한 번도 다른 곳에서 살아 본 적이 없다. 내게 '우리 동네'는 언제나 구로동이었고, 가장 잘 아는 동네 또한 구로동이었다. 그렇게 구로동은 내 몸과 마음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나 또한 구로동 이곳저곳에 흔적을 남기며 살아왔다. 내 정체성의 상당 부분을 구성하고 있지만 너무 익숙한 나머지 그러한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다. 나에게 구로동은 그런 동네다.

구로동 헤리티지

구로동에 대한 이미지로 동네를 판단하는 곳과 구로동에 살면서 동네를 느끼는 것은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지는,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머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외부의 시선으로 스치거나 들여다보는 것과 그 지역의 일부로서 시간을 부딪히며 살아온 내부의 시선과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서.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외부의 시선으로 평가받으면 지표상으로는 그렇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몇 개의 키워드로 분석하는 외부의 시선과 달리, 내가 살아가는 곳에는 키워드로 분석할 수 없는 시간의 흔적들이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구로동에서 낳고 자란 작가는 사람들이 외부의 시선으로 평가하는 일반적인 이미지인 '구로공단, 디지털 단지 중국인' 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에 수긍하면서도 자신이 경험한 구로동을 그것만으로 떠올리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그는 세 가지 키워드에 숨겨진 수많은 이야기와 담론이 존재한다는 상기시키며 자신이 오랫동안 살아온 동네를 익숙하지만 낯설게 산책하며 숨겨진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이 책은 그 이면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이미지 너머의 구로동과 그 안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느 동네 사냐"라는 질문에 "구로동 살아요" 라는 짧은 답변과 함께 생략했던 말을 복원하는 과정이자, 익숙하지만 낯설게 동네를 탐험하는 산책기이다.

구로동 헤리티지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구로동에서 살아가는 작가와 작가 주변이 이야기를 담아냈다. 구로동의 모습과 그것을 관통하는 이야기, 자신이 체감한 구로동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담았다. 구로동에서 살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생생한 구로동의 이야기가 편안한 시선 속에 흘러가는 부분이다. 2부는 구로동에서 일을 하거나 했거나 하게 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3부는 중국인 밀집 지역으로 알려진 구로동의 이방인과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책을 읽다 보면 작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담과 동네를 다니면서 느꼈던 수많은 변화들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구치소였던 자리에 (고도제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초고층 아파트가 생겨나고 공단이 아닌 초고층 공장들이 들어서는 외적 풍경과 더불어 부모님이 말하는 구로동과 자신이 알고 있는 구로동의 간극, 노동과 민주 운동에 대한 생각까지 더듬어볼 수 있다.

구로동을 외부의 매끈한 시선으로 훑어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내부의 날 것 그대로의 시선에서는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이라면 구로공단 시절과 변하지 않는 사회의 태도를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산업 역군으로 치켜세우면서도 노동 환경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노동 환경 개선에 목소리를 높이면 목소리를 누르기에 바빴던 것은 디지털산업단지로 명칭이 바뀌고 초고층 건물들이 세워진 다음에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산업 단지의 구성원이 젊고 기업들의 성장 속도가 빠르고 일자리 창출이 이어진다는 점은 역동성의 요소로 여겨지지만 비정규,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이어지는 노동 환경을 보면 씁쓸해진다.

돈을 벌 수 있다는 꿈을 안고 서울에 상경했던 40여 년 전 여공드의 삶과, 최저 임금을 간신히 준수하는 월급으로 장시간 노동에 임하는 디지털 단지 노동자의 삶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누군가는 "그래도 옛날보다 좋아졌지"라고 말하겠지만, 정말로 모두가 노동자로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냐고 묻는다면 확신에 찬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구로동 헤리티지

나는 이방인과 소수자에 대한 3부를 읽으면서 차별과 혐오가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며 상업적으로 이용하는지, 그렇게 양산된 차별과 혐오가 한꺼번에 몰려드는 종착지에는 어떤 사회가 존재하고 있을지. 작가는 홍세화 작가의 "강자의 폭력이 구조적이고 일상적이라면 약자의 폭력은 삽화적이고 선정적이기에 더 쉽게 표면으로 드러난다" 는 주장을 인용하며, 재외 동포의 폭력적인 모습을 통해 관객에게 불안을 심어 주는 관련 영화가 만들어 내는 혐오 시선을 비판한다. 혐오를 담아 공포를 심어주는 영화들에는 범죄의 원인을 악한 소수자에게 찾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시스템의 문제를 고찰하지 않은 채 유능하고 힘이 센 사람에 의해 범죄가 해결될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영화는 혐오를 내재화한다.

구로동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작가의 시선과 생각이 담긴 이 책은 읽기 편하면서도 생각할 지점들을 제공한다. 교과서처럼 딱딱한 원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하면서도 낯선 동네를 여러 시선으로 관찰하고 자신이 경험하고 배워간 구로동을 만져가며 체득한 진심이 담긴 책에는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다채로운 시선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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