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노피에 매달린 말들 - 톨게이트 투쟁 그 후, 불안정노동의 실제
기선 외 지음, 치명타 그림, 전주희 해제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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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자리에서 밀려나거나 그 불안을 지녀본 사람들이라면, 누가 지금 자리하지 못하고 있는지, 이 자리가 누군가를 밀어내고 마련된 건 아닌지 살피고 감지하게 된다. 누구나 마주보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이들이 춤을 출 때, 서로를 보기 위해 끊임없이 크고 작게 찌그러지고 펴지는 원을 만든다. 누구든 언제든 손잡을 수 있는 거리가, 맞은편에 자리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의 거리가 원의 크기와 개수를 결정했다. 민주주의와 공존의 조건은 이런 것 아니겠는가.

캐노피에 매달린 말들/  p14

 

 2019년 7월, 한국도로공사는 자회사 고용을 거부하는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 1500명을 해고했다. 당시 나는 기존 용역업체 소속이던 노동자에게 자회사 소속은 좋은 기회인데 왜 거부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지인들과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대화에 참여했던 나와 지인들은 많은 부분을 언론보도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폭력적인 시위 현장과 시민들의 불편에 대해서만, 언론이 던져주는 보도와 기사를 받아먹으며 앵무새처럼 따라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노력 따위는 하지 않았으며 언론이 보여주는 화면에서의 그들에 대해 오히려 비난조의 말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세상의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마음과 진실과 가까운 곳에 마음을 두고 싶어하는 것은 나이와 그다지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진실에 닿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며 불편한 진실을 피하지 않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간명한 답"보다 여러 측면에서 추출할 수 있는 답을 내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간명한 답을 내놓는 것은 노력을 동반하지 않기 때문에 쉽다. 그런 의미에서 불편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 불편하다는 것은 현재 상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대체 진실이 무엇이냐고 질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한마디로 언론이 주는 간명한 답에는 진실이 없었다는 것이다.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 중에서 자회사 전환을 거부해서 해고된 1500명은 도로공사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한국에서 가장 넓은 25차로 톨게이트 지붕(캐노피) 위로 올랐다. 그들은 '정규직'이라는 허울 뿐인 이름 뒤에 넓게 펼쳐져 있는 기만적인 한국 노동정책의 실제를 간파하고 이를 거부했다. 개부분 중장년층 여성인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싸우는 과정을 따라가면 이 노동자들의 현실, 우리나라 노동의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캐노피로 올라가서 직접고용을 외쳤던 노동자들은 결국 98일간의 싸움을 마치고 정규직이 되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규직이었으니 이제는 모든 것은 해피엔딩일까. 아쉽지만 그런 세상은 쉽게 오지 않으며 노동환경이 열악한 노동자에게는 더욱 쉽지 않다.

정규직이 된 노동자들에게는 본래 맡았던 요금 수납 대신 담배꽁초를 줍거나 풀을 뽑는 일 등이 주어졌다. 다른 직무로의 전환이 아니라 모욕을 주는 것으로 도로공사는 그들에게 보복을 한 것이다.

 2017년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화’ 선언 이후, 비정규직의 무기계약직화, 계속되는 간접고용 등 노동의 불안정성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2019년, 불안정노동 문제 개선과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캐노피로 올라가 투쟁을 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은 열악한 처우와 불안정한 노동환경 속에 있는 다른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이어진다. 2020년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2021년에 국민건강보험공단 콜센터 노동자들의 투쟁으.

 『캐노피에 매달린 말들』은 한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였던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대책’의 경과를 톺아보고 그 실제를 파악하기 위해, 상징적인 투쟁의 주인공들인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구술기록 형태로 묶어낸 기획이다. 톨게이트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한부모 가정, 장애여성, 북한이탈주민, 경력단절자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노동 이전의 삶, 노동 현장의 경험, 투쟁의 순간, 복귀 이후의 일터까지 수십 년에 걸친 노동과 투쟁의 경로를 상세히 쏟아낸다.

 덕분에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는 비정규직 투쟁의 복잡한 맥락들을 입체적으로 조망해 볼 수 있다. 지금껏 이들의 투쟁은 “로또취업”, “공정공평이 무너진다”라는 왜곡된 ‘공정’, ‘능력주의’ 담론을 앞세운 날 선 비난을 받아왔고, 노동자를 숫자로 셈하고 성과만을 내세우는 정치 진영의 싸움으로 쉽게 오해받았다.

 『캐노피에 매달린 말들』은 언론이 전하는 피상적이고 간명한 보도 너머에 진짜 사람들이, 노동자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톨게이트여성노동자 구술기록팀’은 성, 장애, 이주, 노동권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한 활동가들로 구성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투쟁의 풍경을 선명한 빛깔로 그려낸 치명타 작가의 그림과 한국 노동시장의 맥락에서 구술자의 말들을 정리한 전주희 작가의 해제는 한국의 불안정한 노동의 현황과 캐노피 투쟁이 갖는 의의를 살피는데 큰 도움을 준다.

 이 책을 읽다보면 IMF 이후 국가가 어떻게 체계적이고 합법적으로 불아정노종인구를 양산해 왔는지 돌아보게 되고 노동의 자동화담론에도 질문에 닿게 된다. 그리고 온정주의 통치가 뿌려놓은 정책에 휩쓸려 노동을 바라보는 온정주의 시선에 대해서도.

진실에 닿는 노력은 언제나 힘이 들고 불편하다. 하지만 진실이 바로 보지 않으면 노동의 현실은 암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것은 불안정 노동을 지속하고 있는 개인적인 상황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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