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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꼭두각시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평점 :
아일랜드 소도시 페르모이, 킬네이라 불리는 저택에 사는 퀸턴가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어제와 다름 없는 오늘을 보내고, 다시 비슷한 내일을 보내면서 평온한 나날을 지켜보면 내가 살던 소도시도 그렇게 평온한 풍경으로 그려지는 듯한 착각이 들곤 한다.
윌리엄 트레버는 지난 시간들의 풍경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곱씹고 지켜보고 곱씹다가 그 안에 들어가서 과거의 풍경과 과거의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윌리엄 트레버의 《여름의 끝》을 읽고 고요한 호수가 뜨거운 불을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 책의 처음에서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고요한 호수는 독자의 눈길을 끌지만 호수가 품고 있는 뜨거운 불은 독자의 마음을 끈다.
언젠가는 내가 이 제분소를 물려받으리란 걸 알았다. 여기서 일하게 된다는 것과 아버지가 곡물이나 제분기에 대해 배운 것을 나도 배우게 된다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았다. 난 제분소 자체가 좋았다. 제분소의 회색 돌들은 담쟁이덩굴로 부드러워졌고 다락과 창고 문들의 적갈색 페인트는 세월이 흐르면서 햇볕에 그 빛을 바랬다. 지붕 한가운데의 초록색 시계는 언제나 1분이 빨랐다. 나는 이곳의 냄새를 사랑했다. 옥수수의 따뜻하고 건조한 냄새를, 공기 중에 먼지가 떠돌지만 그 청결함을 사랑했다. 나는 흐르는 물줄기 위로 톱니가 맞물리며 커다란 바퀴가 회전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활송로의 목재는 닳아서 매끄러웠고 가죽끈들이 열렸다 뒤로 떨어졌다 다시 열렸다. 자루에는 우리 이름인 Quinton이 원을 그리며 적혀 있었다.
아무런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던 호수의 상태일 때 윌리가 묘사한 제분소의 풍경이 좋았다. 같은 풍경이라도 작가의 역량에 따라 그곳은 온기가 스며드는 추억의 공간, 독자를 끌어들여 함께 추억을 공유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제분소의 회색 돌과 담쟁이 덩굴, 옥수수의 따뜻하고 건조한 냄새, 햇볕과 공기 중에 떠도는 먼지.
이러헌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1차 세계대전 직후 고조되는 독립투쟁을 막고자 영국이 아일랜드에 파견한 첩자가 킬네이 주택에서 혀가 잘린 상태로 목매달린 채 발견되면서 제분소의 따뜻한 공기와 냄새는 파괴되고 윌리의 어린 시절은 막을 내리게 된다.
그 이후는 냉혹한 현실과 잔인한 운명의 연속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삶은 깨어졌고 그들의 보금자리는 폐허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작가는 그들을 좇는 시선을 멈추지 않는다.
군인들의 학살 이후 킬네이가 그랬듯 그 결정적인 순간들 이후 우리는 모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난도질당한 삶들, 그림자의 피조물들. 그의 아버지의 말처럼 운명의 꼭두각시들. 우리는 유령이 되었다.
비극이 우리의 운명을 뒤흔들어 삶을 파괴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깨진 삶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햇볕이 남아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의 뒷모습으로 햇볕이 고인다.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