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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평점 :
벌써 두 달이 훨씬 지났는데도 이태원은 텅 비어 있었다. 상점이나 음식점들도 비어 있고, 시야에 들어오는 길거리 행인은 다섯도 되지 않았다. 흡사 유령 도시였다. 해밀턴호텔 옆 골목에는 젊은 친구들이 제법 있었는데 녹사평역삼거리 합동 분향소에는 조문객이 아무도 없었다. 분향소 주위에 현수막이 빽빽이 둘러쳐져서 바깥에선 분향소가 보이지 않았따. 영한이 현수막을 세어보니 모두 열네 개였다. '이재명 상습 거짓말쟁이. 구속 수사하라.' '이태원 참사 희망자의 명복을. 이태원 참사를 즐거워하는 이재명.' '국민들에게 더 이상 슬픔을 강요하지 말라.'
모두 '신자유주의연대'라는 단체의 이름으로 돼 있었다. 신자유주의는 국경 없는 세계적 규모의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원리를 이르는 말인데 신자유주의연대는 무엇을 위해 연대하는 단체이길래 이태원 분향소에 혐오 스피치의 철벽을 두르고 있는 것일까. 요새는 자유니 공정이니 하는 근사한 개념들이 엉뚱한 곳에 잘못 쓰이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봄, p254-255
다시 10월이다. 이제 10월에는 29일이 떠오른다. 4월에 16일이 저절로 따라붙는 것처럼. 어제 뉴스에는 올해 할로윈 축제에서 인파가 몰려 발생할 수 있는 사고를 예방하도록 정부와 지자체와 총력전을 벌여 실전훈련까지 하고 있는 장면이 나왔다. 서울시가 지난해 이태원 참사 이후 인파 밀집 사고 등에 대비하고자 만든 ‘지능형 피플 카운팅 시스템’을 활용한 유관기관 합동훈련이라고 했다. 어떤 정보도 없이 화면만 봤을 때는 다시 이태원이 반복되는 것인지 알고 심장이 덜컥했다.
미국에서는 이태원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크러시>가 공개되었다. 국내에서는 서비스가 되지 않아 볼 수 없는 <크러시> 공식 예고편은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기 직전 할로윈 축제에 갈 생각으로 들떠있던 사람들의 영상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급작스럽게 바뀌는 상황..좁은 골목에 끊임없이 사람들이 밀려들면서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린다.
《그리고 봄》은 이태원 참사를 다룬 소설이 아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각자 다른 계절처럼 한가족이지만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삶을 만들어가는 정희 하민 동민 영한 4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야기 속에는 이태원이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태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태원 참사에서 느꼈던 가슴 답답한 울분이 가득 들어차 있다. 사계절을 지나고 다시 봄으로 돌아왔을 때 소설 속 가족인 4명의 갈라졌던 관계도 회복세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세대 갈등, 이데올로기 갈등 등으로 4명의 분열이 4명의 독립으로 전환점을 맞이한 것이다.
《세 여자》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의 삶을 재현하며 요산김정한문학상, 허균문학상, 노근리문학상을 연이어 수상했던 작가 조선희가 이번에 보여주는 《그리고 봄》은 작가가 답답한 세상을 향해 던지고 싶은 말들이 살아있는 소설이다. 하고 싶은 말을 대신 쏟아내주는 등장 인물들이 있어서 속 시원한 면도 있고 소설치고는 다소 거친 것이 아닌가 하는 면도 있었다. 하지만 작가의 말을 보면 소설이 이러한 방식을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2022년 4월부터 1년을 다뤘고 집필은 8월에 끝났지만 그 시점에도 정치 상황은 빠른 속도로 더 나쁜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대통령이 되기 가장 위험한 개인에게 대통령직을 맡긴 다음, 불안과 불편은 그에게 대통령직을 허락한 국민 대중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하지만《그리고 봄》에는 변증법의 희망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 군사정권 이후 가장 어두운 시기로 접어들고 있지만, 질서와 가치와 상식이 무너지는 정치 IMF를 경험하고 있지만, 공이 높이 튀어 오르려면 바닥을 세게 쳐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봄, 작가의 말
가족 이데올로기에 갇혀서는 가족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것 같다. 너무 가까이 붙어 있으면 분열이 시작되고 존중하며 거리를 둘 때 독립이 시작된다.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는 소설이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아서 소설적 재미가 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거의 읽어갔을 때는 소설이라서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나 대신 시원하게 질문하고 쏟아내는 말들이 흘러넘치는 것이 좋아 그것들이 흐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등장인물 중에서 동민의 말과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서 잠시 그에 대해 적개심을 느끼기도 했는데 ㅎㅎ 나중에는 동민 때문에 울컥했다.
시원하고 슬프고 다시 봄으로 돌아와서 좋았던 소설이다. 겨울을 지나고 다시 봄, 이렇게 봄이 희망이라는 식으로 돌아오는 방식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이 필요하다. 시원하게 소리쳐 줄 목소리와 함께. 나에게 없는 것이 가득 들어찬 소설이라서 다시 읽었다. 겨울 다음에는 봄이 온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당연한 목소리에 기대를 걸어본다.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