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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른 귀신을 불러오나니 - 여성 호러 단편선
김이삭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7월
평점 :
어렸을 때부터 무서운 이야기를 참 좋아했다. 할머니는 여름이면 저녁을 드시고 옥상에 돗자리를 깔았다. 창문이 적어 바람이 잘 통하지 않았던 집안과 달리 계단 몇 개만 올라갔을 뿐인데 옥상은 바람이 시원하게 솔솔 잘도 불었다. 마루에 접어놓았던 돗자리를 깔고 모기향을 피우고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이 검어지면서 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시간이 다가오면 나는 할머니 옆에 누워 무서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평소 무뚝뚝하던 할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이야기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우리가 다른 귀신을 불러오나니」를 읽으면서 어린 시절 할머니가 들려주셨던 무서운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산을 넘어가야 하는데 해가 져서 어디서라도 하룻밤 묵어가야 하는 여인들, 전쟁통에 떠난 벗을 기다리다가 죽었지만 죽은 줄도 모른 채 어린 모습 그대로 어른이 된 친구를 쫓아다니는 여자아이 등.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무서운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 여자였다. 그러고보면 어릴 때 봤던 책이나 텔레비전에 나왔던 귀신들도 다 여자였다. 그때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말하지 못했고 살지 못했던 여자들의 꾹꾹 눌러담은 한이 귀신이야기를 탄생시켰고, 그런 이야기는 오래도록..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다만 이 책에서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한 채 억울하게 죽은 여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여자들이 생존을 위해 힘껏 싸우고 투쟁하고, 때로 짓밟는다.
<창귀>는 특히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생존에 대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소설이다. <그를 사랑하는 단 하나의 마법>도 최근 수많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불법 동영상을 촬영한 뒤 웹에 영원히 박제시킨 뒤 협박하여 영혼을 파괴시킨 다크웹도 관한 내용이다. 주인공이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으로 위기를 모면하지만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옛날 민담을 연상시키는 <큰언니>의 설정도 흥미로웠다. 탈출구와 모성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너의 자리>는 계약직이자 여성이라는 허약한 기반에서 비롯된 불안이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정말 호러 장르라고 할까.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섬뜩함이 느껴졌다.
<무진도 탈출기 게임 환불 요구서>는 다른 여성 서사가 결이 다르다. 여성의 이야기로 한정짓기보다는 미디어에 통제되어 50년 동안 거짓 세계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어디선가 본 듯한 이야기인데 재미있다. 자본의 양극화와 착취당하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여성 호러 단편선'이라는 부제가 붙은 『우리가 다른 귀신을 불러오나니』는 가벼운 호러 같지만 현실과 밀접하게 얽혀있다는 점에서 가볍지만은 않은 소설 모음집이다. 모두 10편의 소설이 들어있으니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독서를 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남자가 한 말은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중국집에서 단무지를 먹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말했어요. 단무지 씹는 소리가 참 경쾌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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