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태어난다.

.. 그런데 의사도 간호사도 반응이 이상하다

허둥지둥.. 당황, 경악,,,, 심지어 짜증까지.. 자신의 명예와 커리어에 큰 재앙이 될거라고 하는 협박까지..

이게 뭐야? 왜 이런 반응이지?

아이가...... 할아버지다.....

~~~ 아니 으악~~~~~~

....너는 .... 아니 이 아이는 누구지요?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온거지요?

이 할아버지 아이는 말한다. “ 내가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소. 왜나하면 난 태어난 지 겨우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내 성은 분명히 버튼이요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의무를... 부모로써의 의무를..

할아버지 아이를 집으로 데려온 아버지 버튼은 아이를 거부한다.

우유병을 가져다 주고 유동식을 먹이고 아동복을 입히고..... 일반적으로 기르고 싶어 하지만 이미 어른의 뇌와 몸, 얼굴을 가진 이 아이.. 어쩌지......

아이는 이미 노년인데 아버지는 아이를 여타의 아이처럼 기르고 싶어하고... 아이는 따라주는 척하고.. 아닌가.. 이부분은 기억이 가물가물.. 어째든 벤자민은 성장한다. 나이를 먹어간다.

벤자민은 점점 젊어져?? 아니 나이가 들어 사업도 물려 받고 여자도 만나 결혼을 한다. 근데 이 여자도 독특하다, 중년의 남성을 더 좋아하는 여자 힐데가르트.. “ 당신은 아주 낭만적인 나이이지요. 쉰 살. 스물 다섯 살은 너무 처세에 능하고, 서른 살은 과로로 활기가 없는 편이죠, 마흔 살은 온갖 사연들이 많은 나이라 시가 한 대를 다 피우며 이야기를 해야 하고요, 예순 살은, . 예순살은 거의 일흔 이잖아요. 하지만 쉰 살은 원숙한 나이이지요 나는 쉰살을 사랑해요

쉰 살을 사랑하는 여자.. 안정된 삶을 사랑하는 여자..

벤자민은 점점 젊어지는데... 힐데는 점점 나이가 들고 벤자민은 점점 활기가 넘쳐 지는데 힐데는 할머니가 되어가고.. 심지어 벤자민의 아이까지도 나이가 들고.. 벤자민의 사업도 물려 받게된다 ..

그 사이 벤자민은 청년이 되어 장교가 되어 전쟁터에도 나가고 못 갔던 대학생이 되고 초등학생, 유치원생, 갓난 아이가 되고 그리고 그는 사라진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채..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지난번에 먹었던 우유가 따뜻했는지 차가웠는지 또는 어떻게 나날들이 지나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아기 침대와 니나라는 친숙한 존재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배고프면 울었다. 그게 다였다. 낮에도 밤에도 그는 그저 숨을 쉬었고, 그의 위에서 부드러운 중얼 거림과 소곤거림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그리고 희미하게 구본되는 냄새들. 빛과 어둠...

그리고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하얀 아기 침대와 그의 위에서 움직이던 흐릿한 얼굴들. 우유의 따뜻하고 달콤한 내음.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그의 마음에서 희미해지다 사라졌다. “

 

이미 어른으로 태어난 벤자민이 점점 나이가 어려지면서 사회에서 세상에서 지워져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의 미국의 사회적 분위기가 그랬으니 타인의 시선이 중요하고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상류층 사회의 모습..

심지어 그가 사랑했던 여자마저도 사랑하고픈 모습만 사랑하고 그의 아이도 타인과 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는 했다.

그러나 벤자민 역시 자신의 모습이 젊어가면서 그와는 반대로 늙어가는 힐데가르트를 보면서 실망하고 젊은 여대생들을 만나고 젊음을 만끽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벤자민이 자신의 다른 모습을 가족들이나 지인들에게 받아들일 수 있게 노력한 것은 뭐지?

무조건 받아 들여라? 그런 건가? 그를 받아 들이지 못하는 사회도 문제이긴 하지만 그는??

그래도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만한 나이대가 되었을 때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누리고 살았다는 건데.. 그 외의 나이대의 그는? 자신의 상황을 모르는 것도 아닐텐데.. 미리 준비하고 이해시키고 이런 과정들은 필요 없는 걸까?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만을 탓해도 되는 걸까?

자꾸 의문이 든다. 이미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의 사회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그 모습은 뭐지? 버튼이니까??

모두가 원하는 나이가 들수록 어려지는 운명이니 좋아해야 하는 걸까?

과연 벤자민은 행복할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어린 아이이니 행복한 걸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치매라는 것이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기억이 지워지면서 백지가 되어가는 것. 어린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결국 이는 기억이 지워지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알츠하이머나 치매나.. 주위에서 보는 사람이나 돌보는 사람에게는 힘든 일이겠지만 본인은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이것 또한 원하든 원하지 않던 또 하나의 삶의 선택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고 치매에 걸린 본인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들이 힘들어 하는 것은 멀쩡할 때와 그렇지 못할 때의 기억을 다 가지고 있을 때 라고 하니 아예 잊어버린 기억에 대해서는 불행인지 아닌지 그 기준마저 본인이 아닌 그를 둘러싼 주위의 판단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를 보살펴야하는 사회적 비용을 부담하고 있으니 당연한건가...

어째든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면 벤자민에 대한 연민이 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벤자민의 가족들. 그를 둘러싼 사회나 벤자민이나 다를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과 영화와의 다른 점이었다. 영화는 그래도 무기력 하지만 낭만적이고 헐리우드 특유의 인간미를 느끼게 하지만 소설속에서는 건조하고 냉소적이어서 이게 뭐지?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생각보다 피츠제랄드의 소설은 냉소적이다.

 

문득.. 왜 나이가 든 할아버지의 모습일까? 모습만 할아버지가 아니라 그 나이대가 가질수 있는 사고를 가진 진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벤자민을 태어나게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겉모양만이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고마저 아이의 그것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보면서 갓난아이가 되어 세상에서 사라지는 소설의 끝을 보면서...

만약 벤자민의 겉모습은 아이의 모습으로 생각은 어른의 것으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다들 좋아하지 않았을까? 성숙한 어린이.. 요즘 우리가 원하는 아이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답지 못한 아이가 늘어가고 어른 답지 못한 어른이 늘어가고 있는 것. .

너무 많은 지식과 통제 그리고 어른의 욕망으로 덧 입혀진 애어른을 사회는 원하고 있다. 그런 애 어른이 자라면서 자신만의 의지를 표현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때는 어른이 아닌 애의 모습으로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거르지 못하고 표출하고 있는 것이 요즘 우리의 모습임을 생각하면서 벤자민은 그런 사람의 욕망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래서 벤자민은 시간이 지날수록 현명해지고 마음이 여유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나이대의 그 모습을 그대로 해지는 것이고 벤자민의 가족들도 벤자민을 자기들 만의 시선으로 인지하듯이 벤자민도 자신만의 시선으로 그들을 받아 들이고 그 이상의 가족을 만들지 못한다. 아들과 아내는 나이가 들고 아버지는 어려지고... 가족은 벤자민을 거부하고 벤자민도 가족들과 섞이지 못하는 불행. 어렸을때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한 아이라고 거부당하고 나이가 들어서는 아이라고 거부다하는 벤자민을 보면서 결국 현대인들이 지금 벤자미처럼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벤자민에게 연민이 든다.

벤자민이 그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노력할 이유는 없는 거다.

사회는 벤자민이 태어나기도 전에 존재해왔던 것이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난 벤자민을 그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무시해서도 거부해서도 없는 것처럼 취급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사회에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벤자민이 아닌 것이다.

사회가 벤자민이 어떤 모습을 하더라도 받아줘야 하는 것이다. 받아주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어떤 모습을 하더라도 받아줘야 하는 것이 사회다.

하지만 사회는 그것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 의해 가치체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결국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에 의해 벤자민이 판단되고 거부되는 것이다. 그 사회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그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어제 조이스의 더블리너를 읽으면서 소설가 김영하가 쓴 더블리너에 대한 글을 보았다. 김영하는 더블리너라는 것은 더블린이라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사는 곳이 더블린이라고 했다. 뉴욕에 살고 있어서 뉴요커가 아니라 뉴욕에 사는 사람들이 뉴요커를 만드는 것이라면서 아일랜드라는 나라에서 태어나 그 나라의 운명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더블린이라는 이야기겠지. 그들이 더블린이라는 도시를 떠난다고 해서 그들이 그 나라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고 그들이 더블리너가 아니라고 할 수 없드시..

그런 의미로 보면 벤자민이 한창때의 나이에 그렇게 오만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그가 살면서 그 사회에서 배운 것은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그는 인정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그였기에 인정받지 못하고 소멸되어가는 것을 굳이 보지 않아도 되는 어린아이.. 갓난 아이가 되는 것도 당연할지 모르겠다. 어린아이 벤자민은 그 사회에서는 필요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유나 빨고 있는....

 

잠깐 드는 뻘 생각..

태어나서 세금내면서 사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했던가..

우리 동네 소아과 의사가 그랬다던데..

그때는 세금내고 사는 것이 제대로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는 그 의사 말에 동의했었는데..

지금은 좀 다른 생각이 든다. 그럼 세금 내지 않고 사는 사람은 사람답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인가.. 꼭 세금을 내고 살아야 하나? 그 세금 누가 매긴건데? 왜 일방적으로 세금을 매김을 당하면서 내고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회에 적응해 사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일까?

이미 사회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세금을 내고 있는데

물건 하나를 사도 세금을 내고 있고...

경제활동을 해서 소득세를 내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다는 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말인데.. 그 끝이 씁쓸하다...

잉여들... 그 옛날에는 자산이었고 힘이 될 원천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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