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그냥 즐기지 못할까 - 성취 중독 사회, 이유 없이 즐거운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고쿠분 고이치로 철학 강의 시리즈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박영대 옮김 / 유유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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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늘 "왜?", "무슨 의미가 있어?", "뭐에 도움이 돼?"라고 묻는 걸까. 고쿠분 고이치로의 《우리는 왜 그냥 즐기지 못할까》는 이 물음에 정반대의 질문을 던진다. 이유 없이 즐거운 행위 자체의 가치를 되묻는 책이다.

'그냥'이라는 말은 결코 무책임한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수단화된 삶, 성취 중독 사회에 대한 저항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모든 것을 목적-수단의 틀에 가두려 한다. 바쁜 일상에서 노을을 봐도 "아, 노을이네" 하고 스쳐 지나간다. 그 순간 우리가 잃는 것은 단순한 여유가 아니다. 감각이 대상과 부딪히면서 예상치 못한 형상을 빚어내는 힘—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고, 낯선 것에서 뜻밖의 의미를 길어 올리는 그 능력—이 막힌다. 고쿠분은 이것을 구상력이라 부른다.

이 현상은 관계와 창작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대화 상대를 미리 '저런 부류'로 분류해 놓으면, 그 사람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개념이 감각보다 먼저 도착한다. 눈앞의 사람은 '지금의 사람'이 아니라 과거의 상처를 관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뀐다. 글을 쓸 때도 마감과 평가 압박이 있으면 기존 개념을 재배열하는 글만 나온다. '글이 글을 밀고 가는' 자유로운 쓰기는 먼 이야기가 된다. 구상력이 닫히면, 관계도 언어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의 반복으로 굳는다.

소비사회는 이 문제를 더욱 강화한다. "저 맛집에 가봐야 해"라는 생각은 이미 '답'을 미리 정해 놓은 상태다. 답을 아는 지성이 앞서서, 경험 자체에 들어갈 틈을 없앤다. 이런 경계와 분류가 습관이 되고, 반사가 되고, 결국 자동회로가 된다. 이는 단순한 의지 부족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목적-수단 강박에 갇힌 구조적 문제다.

그렇다면 모든 습관은 나쁜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탁월성 개념은 여기서 중요한 반전을 제공한다. 처음에는 누구나 규칙을 배워야 한다. 의식적으로 따르고, 반복해서 익혀야 한다. 그러나 진짜 탁월성은 규칙을 억지로 붙드는 데서 오지 않는다. 규칙이 몸과 감각 속으로 충분히 스며들어 더 이상 의식하지 않아도 될 때, 행위는 자연스러움을 얻는다. 그때의 행위는 계산된 수단이 아니라 숙성된 리듬이 된다.

이 점에서 방어적 습관과 탁월성은 정반대의 방향을 향한다. 방어는 경험을 미리 닫아버린다. 반면 탁월성은 경험을 충분히 통과한 뒤에 비로소 열린다. 우리가 쾌락을 얻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쾌락을 얻기 위해 만든 수단들이 어느 순간 방어 장치로 굳어버리는 데 있다.

이 책은 '그냥' 즐기는 행위를 통해, 우리 삶의 완고한 자동회로를 깨우는 철학적 초대장이다. 목적이라는 안전장치를 풀고 무방비하게 나설 때, 세계는 다른 얼굴을 보인다. 오늘 저녁, 노을 앞에서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그 붉은 빛에 마음을 통째로 내맡겨 보는 것—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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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의 생성 : 중동태와 당사자연구 - 심문과 자책의 언어에서 인책과 책임의 언어로
고쿠분 고이치로.구마가야 신이치로 지음, 박영대 옮김 / 에디토리얼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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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라는 독박, 책임이라는 장소


2016년 사가미하라. 한 남성이 지적장애인 복지시설에서 19명을 살해했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조금도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문제였다. 범인은 맥락도, 관계도, 타자의 실존도 지운 채, 오직 자신의 의지로 판단하고 청소하듯 사람을 죽였다고 말했다. 구마가야 신이치로가 짚는 불편한 지점은 바로 여기다. 그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의지를 부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의지를 너무 철저히 긍정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범인을 찾고, 동기를 밝히고, 처벌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다. 스스로의 의지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인정하면 사법적 책임은 완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과도한 의지'가 오히려 용서받을 수 없다면? 이 역설에서 출발해 고쿠분과 구마가야의 대담을 따라가다 보면, 자명해 보이던 의지의 사기성이 서서히 드러난다.
이 의지주의의 폭력성은 사가미하라 범인처럼 극단적인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일상의 두 가지 증상으로 살고 있다. 하나는 '칠 가이(Chill Guy)'다. "스트레스 받지 마, 별일 아냐"라는 자기 방어. 다른 하나는 성인 ADHD 진단 수요의 폭발적 증가다. "나 ADHD래"라는 말이 커밍아웃처럼 발화되는 장면을 요즘 자주 본다. 그것은 단순한 진단 공유가 아니다. '내 의지로 안 되는 것들이 있다'는 고백이고, 그 고백을 의학적 언어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당사자 연구의 선구자 아야야 씨는 이것을 '고해상도의 입자'라는 말로 표현했다. 신체 안팎에서 밀려드는 과도한 어포던스 때문에 그것을 '~하고 싶다'는 하나의 의지로 묶어내지 못하는 상태. 실은 우리 모두가 이미 그 안에 있다. 무수한 선택지 속에서 오직 '내 의지'만으로 살아남으려다 주체는 형성되지 않고 영혼만 지쳐가는 것, 그것이 Chill Guy이고 자처된 성인 ADHD다.

이 상태를 혼맹(魂盲)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영혼은 있으나 자기를 자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 타인과 연결되어 잘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문득문득 일상이 지치고 내가 누구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길을 잃는 상태. 맥락이 거세된 삶은 필연적으로 타자와의 진짜 만남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여기서 고쿠분과 구마가야의 대담이 끌어오는 개념이 중동태(中動態)다. 중동태는 주어가 능동적으로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 자체가 장소가 되어 자기가 구성되는 과정이다. 침팬지 실험이 이를 증명한다. 거울 앞에서 자기를 인식하는 능력은 고립되어 자란 침팬지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유리창 너머로 다른 침팬지들을 '보기만' 한 침팬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순한 관찰로는 '되기(Becoming)'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타자와 실제로 부딪히는 구체적인 장소 없이, 주체는 구성되지 않는다.

당사자 연구가 취하는 핵심 태도는 바로 이 장소를 회복하는 일이다. 문제의 행동과 그 사람을 분리하고, 사고를 개인의 사악한 의지로 환원하는 대신 그것이 발생한 메커니즘을 함께 추적한다. 범인을 격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관점을 통해 어떻게 관계 맺고 해결할 것인가를 도모하는 장(場)을 만드는 일이다.

사가미하라의 범인이 용서받을 수 없는 이유는 이제 분명해진다. 그는 관계라는 장소를 부정함으로써 자기 자신도 지웠다. 의지만 남기고 주체를 지운 자리에는 책임이 생성될 수 없다. 책임은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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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 인공지능을 만든 생각들의 역사와 철학 Editorial Science : 모두를 위한 과학 2
잭 코플랜드 지음, 박영대 옮김, 김재인 감수 / 에디토리얼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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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기계는 가능한가
— 인간의 사유에 대해 다시 묻다


아이는 시리와 말했다. 원하는 것을 얻었고, 원하지 않는 것을 받았을 때 짜증을 냈다. 그리고 말했다. "나중엔 칩을 심으면 되잖아."
말은 가볍게 지나갔다. 나는 지나가지 못했다.
칩을 심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뇌에 무언가를 더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뇌의 일부를 교체한다는 뜻인가. 교체된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이는 그 질문을 묻지 않았다. 불편함을 없애는 방법을 말했을 뿐이다. 그 가벼움이 오히려 오래 남았다.
검색창에 묻는다. 답이 온다. 우리는 그 답을 받아 적는다. 질문은 사라진다.
기계는 정말로 생각할 수 있는가.


앨런 튜링은 그 질문을 돌려놓았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 대신 물었다. 기계가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느냐고. 속을 들추지 말고 겉을 보라고.
하지만 겉을 본다는 것은 이미 어떤 포기다. 우리는 기계의 손짓은 볼 수 있다. 안은 볼 수 없다. 그리고 안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서로에게도 이미 알고 있다.
기계가 언어를 다루면, 우리는 그 자리를 채웠다고 말한다. 기계가 학습하면, 또 채워졌다고 말한다. 창의적인 것을 만들어내면, 또. 그런데 채워질 때마다 그 자리는 다시 비어버린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그 안에 없고, 우리는 그 안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조차 말하지 못한다.
기계는 그 빈자리 앞에 서 있다. 그 빈자리를 느끼는 것이 누구인지는, 아직 모른다.


글을 쓸 때 손은 먼저 움직인다. 생각이 손을 이끄는가, 아니면 손이 생각을 만드는가. 잘 모르겠다. 손이 쓴 문장을 눈이 읽고, 눈이 읽은 것을 손이 다시 고친다. 그 순환 어딘가에서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 느낌이 어디서 오는지는 모른다.
의식은 언제나 조금 늦게 도착한다. 사고는 의식보다 먼저 있다. 그렇다면 의식이 없어도 사고는 가능한가. 아니면 의식이 없다면 그것을 사고라고 부를 수 없는가. 나는 내 손이 먼저 쓴 문장 앞에서, 이 질문을 피하지 못한다.
 

기계가 생각하는가,라고 묻는 동안 인간은 생각하기를 멈춘다.
그 사이, 기계는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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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 거짓과 혐오는 어떻게 일상이 되었나
미치코 가쿠타니 지음, 김영선 옮김 / 돌베개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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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즈>의 서평을 담당했던 작가의 이력. 이 한 줄의 소개가 책에 끌리게 만들었다. 뉴욕 타임즈 내에서 북리뷰를 가장한 뉴욕 타임즈를 비판하는 글을 썼을까? 아니면 냉철한 이성으로 순수 북리뷰 만을 했을까? 미지의 분야와 사람에 대한 상상력이 잠시 솟구쳤다. 책을 읽고 글로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직업에 몸담고 있었으니 배울 것이 많겠다는 기대감으로 책을 만났다.

 

이 책은 진실의 쇠퇴에 대해 경종을 울린다. 가장 크게는 '을 이야기한다. 이 웹이 주의가 산만하고 정보 과부하가 걸리게 된 주범이라고 말이다. 웹이 학습을 할 수 있게 하는 좋은 점이 있지만 동시에 악당들에게 이용되어 잘못된 정보와 허위정보, 무자비함과 편견을 퍼뜨릴 수 있다는 치명적 무책임성에 집중 한다.

두 번째는 텍스트는 해석하기 나름이라 할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하여 인터넷과 만나게 되어 어떻게 변화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하면 개인 나름의 준거를 통해 주관적 결론을 내리는 것, 온갖 허무주의에 대한 책임은 없는 행태를 총칭 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인터넷과 결합하게 되어 진실에 혼란을 더하고 있음은 물론 과학계에도 침투하여 압도적 다수가 동의하는 과학자들의 의견 또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하니, 이제 앞으로는 증명된 모든 것들을 의심하며 과학이라는 분야 또한 권위가 떨어지게 될 것인가? 과학뿐만이 아니라 역사 또한 포스트모더니즘과 만나게 되면 위험해진다. 이 책의 묘사를 빌려 오자면 아래와 같다.

 

과거에 대한 지식은 단지 집단 정체성을 확고히 하거나 강화해주는 신화를 역사화해서 특정한 이해집단을 돕기 위한 이념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의 기록은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시사하는 것처럼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기억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이 기억되지 않는 역사를 모두로 볼 것인가 부분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는 분명 아니다.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가 정체성에 혼란을 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약 내가 믿고 배우며 살아온 자양분의 모든 것이 허구였다고 한다면, 심지어 이해집단을 돕기 위한 구성물의 기록일 뿐이라고 하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말이다.

이에 더해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은 문학, 영화, 건축, 음악, 회화 등의 영역에 침투하고 때에 따라서는 탈바꿈 시키기도 하며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경제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는 정치에도 침투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특징 중 하나는 트럼프는 이 책의 저자인 미치코 가쿠타니라는 지식인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곳곳에 트럼프가 대통령 후보일 때 또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 웹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혼란성에 기름을 들이 붓는 인물로 트럼프를 비난한다. 그리고 정치에 균열을 일으키는 인물로 묘사한다. 온갖 무례함과 모순이 트럼프로 인해 가중되었고 이를 분별하지 않으면 진실은 매장된다는 식이다. 트럼프의 프로파간다는 진실에 대한 물 흐리기, 연막 피우기, 침소봉대하기 등 전략인지 주의력 결핍장애인지 모를 특징도 넘쳐난다. 이 저자의 말만 들으면 미국의 패권은 트럼프로 인해 멸망 직전이다. 내가 아쉬웠던 부분 또한 이 부분이다. 왜 유독 트럼프로 인한 물 흐려짐, 연막 피우기만 부각 시키는지 의문이고 아쉬움이다. 힐러리 또한 사소한 말실수에서 부터 국가 보안을 위반한 이메일 스캔들 까지 있지 않았나?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을 우선시하고, 유색인종을 차별하고, 여성을 비하하고, 이민자들을 쫓아내는 정책들, 그리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무역분쟁을 일으키고,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부담했던 비용을 축소하려 한 행위들이 문제가 된다면 힐러리 또한 동등한 실적 또는 무엇이 진실인지 구별 할 수 있는 사례를 함께 비교 제공했어야 한다. 모든 가짜 뉴스와 그 폐해를 트럼프 시대 안으로 몰아넣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진실을 알고자 하는 노력의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 누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진실을 조롱하고 있는지, 거짓과 편파 보도를 일삼는 썩은 매체는 무엇을 말하는지 유심히 살펴야 한다. 알면 알수록 암에 걸릴 것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말이다.

미치코 가쿠타니의 마음을 얻지 못한 트럼프의 예를 제외하면 진실을 위한 냉혹한 비평은 마음에 담아 두어야만 한다.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등 많은 사이트가 알고리즘을 이용해 우리가 보는 정보를 개별화 한다....우리 대다수는 검색 엔진이 편향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 사람들은 점점 더 협소한 콘텐츠 저장탑과, 이에 상응하게 벽으로 둘러싸인 더 작은 생각 정원 속에서 산다.”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의 집단은 극단주의 운동의 온상이 될 수 있다

 

전체주의 심리란, .. 어떤 주제와 관련해 서로 상반되는 메시지를 맞닥뜨리면 가장 먼저 받은 정보를 선호하는 심리경향을 이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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