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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도서관 - 황경신의 이야기노트
황경신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12월
평점 :
상상력으로 가득한 소설집이다.
첫 이야기는 남들을 대신해 여행을 해주는 여자의 이야기다. 과연 비용을 들여가며 그런 일을 의뢰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라는 질문에 대한 그녀의 조목조목한 대답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집을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는 있지만 남들과 어울리기 위해 여행을 하기는 해야하는 상황, SNS에 여행 사진을 올리고 싶은 욕망, 또는 공식적으로 여행한다고 발표해놓고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사람 등등. 지금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지만 내용이나 형식을 따지자면 커다란 상상력의 세계로 은유들이 많아 이해하기 버거운 부분들도 몇몇 눈에 띄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국경의 도서관>은 가장 마지막 단편이다. 그 도서관에서 셰익스피어는 일년에 한번씩 낭송회를 갖고 있다. 도서관에 실린 책들을 모두 읽어보고 거기서 거주하기로 약속한 조건으로 낭송회를 하고 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지금 찾아 읽고 있는 책은 댄 브라운의 <인페르노>. 이런 식의 상상력들이 책의 곳곳에 존재한다. 에밀 싱클레어로부터 초대장을 받고 독일 여행을 떠나게 된 이야기, 슈베르트와의 인터뷰, 베르테르의 사랑에 대한 샤로테의 입장, 줄리엣의 유언장 등등...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즐겁게 작가의 상상력을 따라 여행할 수 있을 듯하다.
두 아이를 기르는 워킹맘, 생활인으로서 자주 등장하는 남녀간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에는 아무래도 한발짝 떨어져 보게 되었다. 그래도 이런 감성적인 글을 읽어줘야 삶에 찌들어가는 여인네의 일상에도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 주겠지, 그러면서도 너무나 옛날옛적 고릿적때를 회상하려니 간지러운 느낌이 들고, 뭐 그랬다.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과 예민한 감수성으로 인해 책을 읽는 동안 아주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읽던 책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한창 연애중인 젊은이들이 읽으면 뼈가 되고 살이 될 내용들일 것이다. 하지만 사고가 경직되기 쉬운 나이에 접어든 사람들에게도 이런 말랑말랑한 소설은 꼭 필요하리란 생각이다. 중간지대에서 이쪽으로 갈까, 저쪽으로 갈까 매일 흔들리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상상의 세계를 맛보게 해주는 특이하고도 고마운 책이었다.
만약 내 인생을 한 권의 사전으로 축약한다면, 일어난 일들과 흘러온 길들과 종종 되새기는 상념들을 짧은 음절들의 단어들로 요약한다면, 그 사전의 두께는 필시 덧없을 만큼 얄팍하리라. (31p)
더 큰 고통이 오기 전에 죽음이 나를 데려가주었고 결국 나는 평화를 얻었고. 그것은 자비가 아닐까. 고통이 평화가 되고 슬픔이 기쁨이 되는 것. 삶은 그런 거라고 믿어. 그렇게 믿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으니까. 그보다, 이 아다지오는 참으로 아름답군. 안 그렇소? (69p)
삶이란 뜻하지 않은 지루함과 뜻하지 않은 놀라움이 교차되는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를테면 언제나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힘겨운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어디선가 강아지 한 마리가 달려온다. 자세히 보니 강아지는 노랗고 보드라운 들꽃 같은 것을 입에 물고 있다. 강아지가 떨어뜨리고 간 들꽃을 주워 집으로 가지고 와서 작은 꽃병에 꽂아둔다, 지금까지 없어도 그만이었지만 꽃이 거기 있으니 자꾸 눈길이 간다. 그리고 꽃은 시든다, 같은 식이다. 시든 꽃을 버리는 일, 꽃병을 씻어 원래 있던 자리에 넣어두는 일의 쓸쓸함 같은 것을 겪다 보면, 훌쩍 세월이 가고 훌쩍 나이가 든다. 꽃병을 다시 꺼낼 날이 언제 또 올 것인가, 오기는 올 것인가. 삶은 너무나 구체적인 동시에 너무나 추상적이다. 없어도 그만이었던 것이 사라지고 나면, 외로움은 좀 더 외로워지고 어둠은 좀 더 어두워진다. (84p)
깊은 바다에 살던 물고기가 갑자기 힘찬 몸짓으로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르듯, 그 기억이 떠올랐다. (90p)
헤르만 헤세는 꽃을 즐겨 그렸다.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말했다. 꽃병 속에서 천천히 시들어가는 꽃들을 유심히 관찰해보라고, 서서히 빛이 바래 죽어가는 꽃을 바라보며, 자신은 죽음의 춤을 체험한다고. '죽음이야말로 아름다운 꽃피움이여 너무도 사랑스러운 것'이라고. (94p)
함께 간직하는 것은 오로지 실물 크기의 기억, 실물 크기의 따뜻함, 그리고 실물 크기의 희망이다. 그건 또한 실물 크기의 안녕이다. 헤어짐의 안녕과 만남의 안녕이 그 자체의 크기와 무게로 존재한다. (154p)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고,
밤은 그 강력한 침입으로 나를 엄습했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
내 화살의 활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벼렸다.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 파블로 네루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