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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 당신과 문장 사이를 여행할 때
최갑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다 읽고 덮으니 제목이 더욱 다가온다.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을 꿈꾸며 산다. 작가의 말대로 어떠한 문장을 놓고 사랑이라는 단어 자리에 여행이라는 단어로 치환해도 의미가 통하고 말이 된다. 우리가 꿈꾸고 이상향처럼 바라보며 사는 그것, 사랑과 여행은 같은 말이었다.
사진과 글이 함께하는 여행에세이를 워낙 좋아라한다. 그런데 여기 이 책엔 내가 좋아하는 한가지가 더 있었으니 바로 최갑수 작가가 만난 책 속 문장들이었다. 멋진 사진에 멋진 문장이라니! 정말 금상첨화다. 사진들이 깨끗하게 이뻐서 참 마음에 들었다. 일상의 때묻음과 남루함이 덮여지고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최갑수 작가는 사진을 더욱 잘 찍고 싶고, 사진을 정말 사랑하는 마음에 갖고 있던 카메라와 렌즈들을 모두 처분했다는데, 그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한다. 어떤 전환점을 맞고 싶을 때 그럴 수 있을 것도 같다. 문장을 더욱 잘 쓰고 싶어 책장을 싹 물갈이하는 그런 기분일까? 아무튼 난 지금의 그의 사진들도 너무 좋은데, 앞으로 그의 발전이 더욱 기대된다.
버스 안에서 틈틈이 가오싱젠을 읽었어요. "사변은 창작 충동을 압살하여 예술가를 서서히 죽음에 이르는 독약과 같다. 회화가 시각적 감수성을 버리고 사변으로 달아나버리면, 사변이 시작되는 그 자리에서 회화는 끝난다. 너는 예술론을 쓰기보다 너만의 구체적인 경험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다" 같은 구절에 밑줄을 북북 그었죠. 서안 취재여행에서 읽을 만한 책은 아니었지만, 급하게 떠나다 보니 다른 책을 가져가지도 않아서 어쩔 수 없었어요. (66p)
어째서 나는 예술가도 아니면서 이 말에 그렇게나 동의하며 밑줄을 그었을까? 어쨌든 생각만 거창하게 하기보다는 내 생활 자체로 들어와 거기서 몸에 닿는 감각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머리로만 이상적인 삶을 꿈꾸지 말고 현실의 구체적 경험에서 살자. 또한 내가 만약이라도 재밌는 꺼리도 없는 곳으로 장기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내가 갖고 있는 어떤 책이라도 더욱 의미있게 곱씹을 수 있겠구나 하는 달콤한 상상을 하며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아, 그런 시간이 얼마 만이었는지. 빗속, 버드나무가 점점 짙어지는 연록의 시간을 바라본 적이 도대체 언제였는지. 그동안 말을 많이 하고 살아온 것 같아 스스로 부끄러웠습니다. 한 일은 많았지만, 정작 하고 싶은 일은 미뤘던 것 같아요. 밖은 보려했지만 안은 외면하려 했던 것 같아요.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책을 읽어내리다가 "너는 논리를 그리지 마라"에서 다시 밑줄. 비는 어느새 그치고 한 무리의 패키지 여행객들이 쏟아져 들어오기에 화청지를 빠져나왔답니다. (69p)
그렇다. 여행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실상 여행이 현실적으로 쉬운 일도 아니고, 다만 버드나무가 점점 연록이 되는 것을 산책하며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나의 일상에 가깝다. 여행 에세이를 읽으며 나처럼 책을 읽으며 밑줄 긋고 있는 독서가를 만나는 것도 의외의 반가움이고 더군다나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생활 가까운 곳에서 안을 바라보며 집중하라는 교훈을 얻게 되는 것 역시 즐거운 일이다. 무조건 여행을 떠나라고 재촉하는 책보다 훨씬 와닿고 마음에 든다. 여행을 떠나게 되면 떠난 대로, 못떠나고 여기 있으면 여기 있는대로 최대한 즐기면 되는 것이다. 내 안에 집중하여 거기서 나오는 소리를 무시하지 말고 들어주자.
죽음을 몇 달 앞둔 여든한 살의 테라스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 같은 건 들지 않을 것 같다. 다시 돌아가 봐야 최선을 다하지 않으리라는 걸, 최선을 다해봐야 그다지 바뀌는 것이 없다는 걸 그때쯤이면 알고 있을 테니까. 다만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쉽고 더많이 사랑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플 것이다. 즐거움과 사랑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인데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놓치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84p)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위로를 받은 멋진 문장이다. 그동안 그 때 최선을 다했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 이러한 생각들로 마음에 짐을 쌓아두고 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읽고 내려놓기로 했다. 그때로 돌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해도 그다지 크게 바뀌는 건 아니겠구나, 이 사실을 죽을 때가 되서가 아니라 지금 알게 해줘 너무 고맙다. 문득문득 찾아드는 그러한 후회로 내자신에 대한 믿음을 백프로 갖고 살지는 못하는 나였는데, 이제는 더 즐기고 사랑하는 일에 전력을 쏟아야겠다.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어린 날들은 이제 놓아주자.
손바닥을 비비며, 돌이켜보건대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나.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타닥타닥, 석탄이 타는 소리, 다시 돌이켜보건대, 즐겁지 아니한 시절이 있었나.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감정이 힘없이 시들어가고/예전에 밝게 타오르던 사상의 불꽃도 이울어가니/세상이 앗아가는 기쁨도 없고/세상이 줄 수 있는 기쁨도 없네"라고 했던 이는 바이런이었나, 러셀 영감은 "행복한 인생이란 대부분 조용한 인생이다"라고 말했던가. (117p)
나는 이런 생각을 사랑한다. 뭔가 어른스럽다. 작은 일에 기뻐하지도, 크게 슬퍼하지도 않는 것이 어른스러움이라고 생각한다. 즐거울 것도, 그렇다고 즐겁지 않을 것도 없는 인생이다. 인생에 뭔가 거창한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조용한 인생이 내가 바라는 삶이다.
인생에서 사실 친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살다 보면 세상은 어차피 혼자서 헤쳐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
서른 지나면 친구는 점점 멀어져. 희미해지다 수평선 너머로 훌쩍 사라지는 거지.
영원한 우정...... 이런 건 뭐, 영화에나 존재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해. (154p)
우리가 목적지에 닿는 유일한 방법은 왼발 앞에 오른발을 두고, 다시 오른발 앞에 왼발을 두는 일, 그것 말고는 없다. 읽고 쓰는 일, 보고 찍는 일, 그것이 최선인 것이다. (209p)
그러니까 취향과 식견, 시선인 거예요. 사람은 그게 다예요. 예술에 대한 취향과 세상에 대한 식견, 삶을 바라보는 시선. 이것이 나를 존중받게 만들어줘요. (228p)
산다는 것은 경험하는 것이지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 파울로 코엘료, <알레프> 인용
멋진 사진과 멋진 글로 가득한 멋진 책.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어디를 여행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행지에서 말랑말랑해진 감성으로 찍은 사진과 읽은 책과, 거기서 나온 글들이 여기 내 집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까지 울림을 준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나의 여행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최근의 여행은 구정 연휴, 시부모님 모시고 다녀온 후쿠오카, 유후인이다. 당시에 기록을 남겼다면 더 좋겠지만 묵히고 묵혀 숙성시킨 뒤 잊지 말고 꼭 글로 남겨놓아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