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는 누군가의 자녀이고 학생이지만 각자가 우리 세계의 어엿한 구성원이기도 하다는 걸 잘 알면서. 어린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회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어린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

들어가며. - P7

지금 어린이를 기다려 주면, 어린이들은 나중에 다른 어른이 될 것이다. 세상의 어떤 부분은 시간의 흐름만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나는 어린이에게 느긋한 어른이 되는 것이 넓게 보아 세상을 좋게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기다려 주는 순간에는 작은 보람이나 기쁨도 있다. 그것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린이와 어른은 함께 자랄 수 있다.

시간이 걸릴 뿐이에요 - P20

어린이의 허세는 진지하고 낙관적이다. 그래서 멋있다.

선생님은 공이 무서우세요? - P27

어린이의 부풀리기는 하나의 선언이다. 여기까지 자라겠다‘고 하는 선언.

선생님은 공이 무서우세요? - P28

착하다는 게 대체 뭘까? 사전에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고 설명되어 있지만, 실제로도 그런 뜻으로 쓰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어른들의 말과 뜻을 거스르지 않는 어린이에게 착하다고 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니 어린이에게 착하다고 하는 건 너무 위계적인 표현 아닌가.

착한 어린이 - P32

그러면서 칠판에 "서로 몸이 달라도 ____자"라고 썼다.
내심 ‘존중하자‘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예지의을 기다렸는데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예지야, 그럴 때 ‘무시‘의 반대말을 떠올려 보면 좋아."
"아! 알았다!"
유일한 답이라는 듯, 예지는 이렇게 썼다.
"서로 몸이 달라도 같이 놀자."
그 순간 나는 예지에게 백오십 번째로 반했기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존중‘이라는 단어를 가르치겠다는 일념으로 다시 기회를 줬다. 예지는 이번에는 이렇게 썼다.
"서로 몸이 달라도 반겨 주자."
백오십 한 번째 반한 상태로 나는 두 문장 옆에 각각 하트를 그리고, 조그맣게 ‘존중하자‘라는 말도 적었다.

착한 어린이 - P36

어린이는 착하다. 착한 마음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어른인 내가 할 일은 ‘착한 어린이가 마음 놓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나쁜 어른을 응징하는 착한 어른이 되겠다.

착한 어린이 - P37

어린이도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며, 품위를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으로서 어린이도 체면이 있고 그것을 손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도 남에게 보이는 모습을 신경 쓰고, 때와 장소에 맞는 행동 양식을 고민하며,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어린이의 품위 - P42

"요즘 아이들은 놀 시간이 없다" "친구가 없다" "게임만 한다"고 한탄하는 어른들도 있다. 그렇게 안타까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처럼 말하지만 어린이들 입장은 그렇지 않다. 어른들의 어린 시절과 환경이 많이 달라지긴 했어도 어린이들이 놀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 내고 친구를 불러내고 일을 만들어 내면서, 어린이들은 논다.

놀이 아니고 놀기 - P57

아니, 정말 소득이 없을까? 그때그때 필요한 규칙을 만들고 고치고 응용하면서 배우는 것이 없을까? 여럿이 어울려 놀다가 억울한 처지가 되어 보고, 박수도 받아 보고, 믿기지 않는 승리나 아까운 패배를 경험하는 것은 어떤가. 같은 편이 되고 싶지 않던 아이와 한편이 되어 보고, 힘을 합치고, 의외로 손발이 맞아 가까워졌다가 다시 실망하고 다시 기대하는 것도 소득이 아닐까? 복잡한 감정들을 곱씹으며 집에 갔다가 다음 날이면 모든 것을 깨끗이 잊고 어린이는 다시 놀이터로 달려 나간다. 나는 이런 순간들이 어린이가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한,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자양분이 된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르고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고 자기가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노는 그 순간이 어린이의 현재를 빛나게 한다. ‘놀기‘에는 아주 큰 소득이 있다.

놀이 아니고 놀기 - P61

지난 봄부터 어린이들은 어린이집에도 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당연히 마음껏 놀지도 못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에 가장 헌신적으로 협조한 집단이다. 물론 어린이는 실내에서도 어떻게든 놀 거리를 찾아낸다. 그렇지만 어디든 나가서 잠깐이라도 뛰놀고 와야 칩거 생활을 견딜 수 있는 게 어린이다. 그 점을 생각하면 어린이가 사회를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 어른들도 알아야 한다.

놀이 아니고 놀기 - P62

"이 책이 선생님한테 있잖아요? 하지만 다 똑같은 책이어도 이 책엔 제 마음이 있어요."

읽고 쓴다는 것 - P72

어린이를 만드는 건 어린이 자신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는 즐거운 추억과 성취뿐 아니라 상처와 흉터도 들어간다.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어린이의 것이다. 남과 다른 점뿐 아니라 남과 비슷한 점도, 심지어 남과 똑같은 점도 어린이 고유의 것이다. 개성을 ‘고유성‘으로 바꾸어 생각하면서 나는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 순간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간다고 할 때, ‘다양하다‘는 사실상 ‘무한하다‘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 P91

어떤 어린이는 여전히 TV로 세상을 배운다. 주로 외로운 어린이들이 그럴 것이다. 어린이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들이 이기는 모습을, 함께 노는 즐거움을, 다양한 가족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가족이 아니어도 튼튼한 관계를, 강아지와 고양이를, 세상의 호의를 보여 주면좋겠다. 세상이 멋진 집이라고 어린이를 안심시키면 좋겠다.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 P102

가해자가 성장 과정에서 겪은 일을 범행을 정당화하는 데 소비하는 것은 학대 피해 생존자들을 모욕하는 일이다. ‘학대 대물림‘은 범죄자의 변명에 확성기를 대 주는 낡은 프레임이다. 힘껏 새로운 삶을 꾸려 가는 피해자들을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예비 범죄자‘로 보게 하는 나쁜 언어다. 가정에서 아이를 학대해선 안 되는 이유는 아이를 아프게 하고, 존엄을 무너뜨리고,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하다.

삶을 선택한다는 것 - P162

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 문제 해결은 여전히 요원하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날마다 살기로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나처럼 선택의 순간을 가졌든 아니든 간에,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은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사람은 무엇이든 어떻게든 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삶을 선택한다는 건 나아가겠다고 선택하는 것이니까. 나아가려면 외면할 수 없으니까. 나아가려면 맞서야 하니까. 삶을 선택한다는 건 그런 것이니까.

삶을 선택한다는 것 - P164

어린이들은 부모님의 사랑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지 않는다. 다만 서툴러서 어린이의 사랑은 부모에게 온전히 가닿지 못하는지 모른다. 마치 손에 쥔 채 녹아 버린 초콜릿처럼.

남의 집 어른 - P179

어린이는 어른보다 작다. 그래서 어른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큰 어른과 작은 어린이가 나란히 있다면 어른이 먼저 보일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가 어른의 반만 하다고 해서 어른의 반만큼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아무리 작아도 한 명은 한 명이다. 하지만 어떤 어른들은 그 사실을 깜빡하는 것 같다.

한 명은 작아도 한 명 - P197

그림책 작가 안노 미쓰마사는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에서 그것을 원근감의 차이로 설명한다. 멀리 떨어진 사물의 크기는 비교하기가 어려운 법인데, 어린이는 어른보다 두 눈 사이가 좁기 때문에 ‘비교하기 어려운 지점‘이 어른보다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범위가 어린이 쪽이 더 좁다는 뜻이다. 어린이가 돌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통제 불능이어서가 아니라 감각이 다른 탓도 있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 어린 시절 살던 곳에 가 보면 동네가 좁아 보이는 것 역시 공간 감각의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한 명은 작아도 한 명 - P200

어린이가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는 사이에 늘 새로운 어린이가 온다. 달리 표현하면 세상에는 늘 어린이가 있다. 어린이 문제는 한 때 지나가는 이슈가 아니다. 오히려 누구나 거쳐 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하는 일이다.

한 명은 작아도 한 명 - P202

어린이는 어른을 보고 배울 기회가 필요하다. 어린이는 가만히 서서 키만 자라지 않는다. 어린이에게는 성장할 공간이 필요하다. 공공장소에서도 어린이는 마땅히 한 명으로 대접받아야 한다. 어린이라는 이유로 배제할것이 아니라 어린이도 누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쪽으로 어른들이 지혜를 모으는 게 옳다. 어린이는 그런 공간에서 배우며 자랄 것이다. 안전하게 자랄 공간도 필요하다. ‘스쿨존‘은 최소한의 공간이다. 어린이가 어른과 다른 시야를 가졌다는 이유로 자동차로부터 위협당하지 않을 공간, 어린이가 어른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 명은 작아도 한 명 - P203

이런 태도가 차별과 혐오의 소산이라는 것을 안 뒤에는 의식적으로 어린이의 소음을 무시했다. 기차에서 아기가 울면 아기가 피곤한가 보구나‘ 하고, 식당에서 아이가 보채면 ‘집에 가고 싶은가 보구나‘ 하고 말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내가 편안해졌다. 눈살 찌푸릴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손님들이 이런 관용을, 내가 너무 늦게 갖기 시작한 이런 관용을 조금씩 갖는다면 어린이도 배울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물론 한 번씩 어린이의 고함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릴 때가 있고, 이 점이 가게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당황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런 순간들을 공유하면서 어린이를 가르칠 수 없을까?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누린 사람이 잘 모르고 경험 없는 사람을 참고 기다려 주는 것. 용기와 관용이 필요하지만, 인간으로서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다.

쉬운 문제 - P212

사회가, 국가가 부당한 말을 할 때 우리는 반대말을 찾으면 안 된다. 옳은 말을 찾아야 한다.

어린이가 ‘있다’ - P219

우리가 어린이를 위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린이 스스로 그렇게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약자에게 안전한 세상은 결국 모두에게 안전한 세상이다. 우리 중 누가 언제 약자가 될지 모른다.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한다. 나는 그것이 결국 개인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는다.

어린이가 ‘있다’ - P219

언제나 절망이 더 쉽다. 절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고, 무엇을 맡겨도 기꺼이 받아 준다. 희망은 그 반대다. 갖기로 마음먹는 순간부터 요구하는 것이 많다. 바라는 게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외면하면 안 된다고, 심지어 절망할 각오도 해야 한다고 우리를 혼낸다. 희망은 늘 절망보다 가차 없다. 그래서 우리를 걷게 한다.

어린이가 ‘있다’ - P219

어린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꼭 어린이를 존중한다고 할 수는 없다. 어른이 어린이를 존중하지 않으면서 자기중심적으로 사랑을 표현할 때, 오히려 사랑은 칼이 되어 어린이를 해치고 방패가 되어 어른을 합리화한다. 좋아해서 그러는 걸 가지고 내가 너무 야박하게 말하는 것 같다면, ‘좋아해서 괴롭힌다‘는 변명이 얼마나 많은 폐단을 불러왔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어린이를 감상하지 말라. 어린이는 어른을 즐겁게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어른의 큰 오해다.

오해 - P227

"만약에 통일이 된다면, 그때는 지금 어린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어 있을 텐데 그때 가서 문제가 발견되면 어떡해요? 좋은 점만 알고 대비를 못 했다가 ‘아, 이건 아니다‘ 하고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잖아요. 그때 가서는 저희가 해결해야 될 텐데, 왜 어린이한테는 의견을 안 물어봐요?"

어린이는 정치적인 존재 - P231

어린이는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을 위해서 살아 있다.

내가 바라는 어린이날 - P247

오월은 푸르고 어린이는 자란다. 나무처럼 자란다. 숲을 이루게 해주자.

내가 바라는 어린이날 - P247

어린이가 가르쳐 주어서 길을 아는 게 아니라 어린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고심하면서 우리가 갈 길이 정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를 가르치고 키우는 일, 즉 교육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 된다. 가정과 학교는 교육의 출발점일 뿐 결국 책임은 사회가 져야 한다. 그러기 싫어도 사회의 몫으로 돌아오고 만다.

길잡이 - P254

어린이와 무관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어린이라는 세계‘는 당신이 잊고 있었던, 신중하고 용감했던 당신의 세계다.

추천의 글
김지은(어린이문학 평론가)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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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비뼈 밑의 공간이 부풀어 올랐다. 실내가 이상할 정도로 환하게 느껴졌고 산소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23

아무 연고도 없이, 그 누구도 원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사람도, 어쩌면 다른 사람들처럼 열정적인 사랑을 줄 수 있으리라. - P386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서로에 대해 배울 것이다. 나는 엄마가 딸아이를 사랑하듯 그 아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비록 불완전하고 뿌리 없을지라도. - P387

‘이끼는 뿌리없이 자란다.’ p363
(이끼: 엄마의 사랑) -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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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사람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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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솔직하게 말하겠다. 아마 이 책은 서평단 모집으로 나에게 오지 않았다면 읽지 않았을지도 모를 책이다. 아니 내 손에 들어와 읽을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을 것이다. 사람은 늘 익숙한 것에 마음이 가고 끌리지 않는가.


내가 지금은 책 읽는 것을 즐기지만 예전에는 그러지 못해서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들이 많다. 그래서 신간보다는 예전에 나온 책들을 더 많이 찾아 읽는 편. 게다가 나는 저자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마 인스타그램 이벤트에 당첨되지 않았다면, 이 책이 내게 도달할 때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이제 책은 다 읽었고, 서평단 이벤트 조건인 서평을 쓸 때가 와서는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게 만들 수 있을까?’

내가 읽고 좋았던 책은 지인에게 추천하거나 선물하고 싶게 마련이다. 하지만 글을 쓸 때가 와서 내게 그런 힘 있는 글을 쓸 깜냥이 부족하다는 걸 새삼 깨닫고 그냥 내 힘이 닿는 한에서 써보기로 했다. 서평단에 당첨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내가 이 책을 손에 넣어 다 읽게 되었다면, 분명 이 글을 썼을 테니.



책 소개 및 줄거리.

이 책을 읽기 전에 ‘옮긴이의 말’을 먼저 읽어보길 권한다. 이 책을 번역한 이은선 님이 쓴 ‘옮긴이의 말’은 저자를 덕질하는 팬이 쓴 글 같은 느낌이다. “고백한다.” 시작하는 이 글은 시작처럼 번역가가 저자에게 팬임을 고백하는(?) 느낌.


옮긴이의 말에 나오는 문단을 읽고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를 알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마지막에 옮긴이의 말을 읽었는데, 이 글을 읽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자는 평범한 불안함들에 대해 쓰고 싶어한 것 같다.


줄거리를 조금 소개하자면, 새해를 이틀 앞둔 날, 은행에 강도가 든다. 하지만 은행 강도는 그 은행에 현금이 없다는 걸 몰랐을 정도로 허술했고 은행 직원이 신고를 하려 하자 은행 건너편 아파트로 도망친다. 이 아파트에는 마침 매물로 나온 집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어 문이 열린 곳이 있었고, 은행 강도는 그곳으로 들어가 인질극을 벌이게 된다.


결국 인질극은 끝나고 인질들은 모두 무사히 풀려나 아파트에서 나오게 된다. 하지만 인질을 잡고 있던 그 집에서 “탕!” 하고 총소리가 난 후 경찰이 진입하자 집에는 피가 흥건한 상태였지만 범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밖으로 뛰어내린 것도 아닌 상황. 경찰은 사라진 범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인질로 잡혀 있던 사람들의 진술을 듣고 조사하기 시작한다.



이 책의 매력.

이 책은 여러가지 매력을 갖고 있는데, 첫 번째는 ‘유머’이다. ‘불안’ 같은 자칫 무거울 수도 있는 주제를 무겁지 않게 풀어내는 매력이 있는 책. 등장인물들 간의 티키타카도 아주 재미있고 책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저자의 유머러스함을 읽는 것도 즐겁다. 예를 들면 이런 것.


그리고 거짓말도 하면 안 된다. 물론…… 가끔 예외는 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여기서 왜 초콜릿 냄새가 나요? 아빠 초콜릿 먹고 있어요?˝라고 물을 때.(P87)


이 문장은 작가의 경험이 담긴 유머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감사의 글’에 이런 글이 나오기 때문이다.


원숭이와 개구리. 나는 좋은 아빠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 진짜야. 하지만 너희가 차 안에서 점프하면서 ˝이거 무슨 냄새예요? 아빠 사탕 먹어요?˝라고 물었을 때 아빠가 거짓말했다. 미안.(감사의 글, P480)


두 번째 매력은 ‘나의 편견의 발견’이다. 이 책은 나의 편협한 생각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건 저자가 의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쓰지 않겠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책의 서두에 나오는 등장 인물란을 읽어보면 어떤 것은 힌트가 있을 수도.


세 번째는 가독성이다. 500페이지에 가까운 꽤 두꺼운 책임에도 읽는 데 며칠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독성이 좋았다. 내용이 좋고 재밌어서 오히려 책이 끝나고 있다는 게 아쉽게 느껴질 정도.


무엇보다 이 책의 등장인물들 모두 어느 정도 불안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이 느끼는 불안이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회사에서 은퇴한 후 자신의 자리를 누군가 대체할 수 없어 곧 다시 자신을 찾게 될 거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라던가, 곧 출산하게 되는데 내가 이 아이에게 좋은 보호자가 될 수 있을까 걱정하는 것이라던가, 혹은 아이들의 보호자로서 겪는 고충이라던가 하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그런 평범한 불안들을 안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인질극이라는 평범하지는 않은 사건을 통해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간다.



맺음말.


사람은 누구나 늘 불안하다. 일이 너무 잘 돼도 언젠가 끝날 것을 알기에 불안하고, 안 돼도 언제까지 안 풀릴지 모르니 불안하다. 맛있는 걸 먹어도 내일 아침에 몸무게가 늘어나 있진 않을까 불안하고, 굶어도 건강이 안 좋아지는 건 아닐까 불안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불안을 안고 살고 있는 것이 사람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잘 살고 있는 것만 같다. 우리는 인스타그램에 행복을 ‘전시’하고 그 전시된 행복을 보며 또 불안해한다. 나도 행복을 ‘전시’ 해야 할 것만 같아서.

이 소설은 누구나 느끼는 불안을 주제로 쓰여졌다. 이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지극히 평범해서 그들의 감정에 이입하는 게 어렵지 않다. 왜냐, 우리도 이들과 비슷한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니까. 책을 읽는 며칠간 소설 속 사람들과 불안을 나누며 나도 함께 위로 받는 느낌이었다. 읽는 내내 피식거렸고 힐링하는 시간이었다. 앞으로 이 책을 읽을 모든 이들도 나와 같은 행복을 느끼기를. 여기서 줄인다.


#서평단이벤트 #불안한사람들 #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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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인간의 성격은 경험의 총합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게 전적으로 맞는 말은 아니다. 과거가 모든 것을 규정한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절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어제 저지른 실수들이 우리의 전부는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의 선택, 다가올 미래도 우리의 전부라고 말이다. - P462

하지만 오늘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거든, 오늘 하루가 끝나고 밤이 우리를 찾아오거든 심호흡을 한 번 하기 바란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지 않은가.
날이 밝으면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 P478

진실, 세상에 진실은 없다. 우리가 우주의 경계에 대해 어찌어찌 알아낸 게 있다면 우주에는 경계가 없다는 것뿐이고, 신에 대해 아는 게 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목사였던 어머니가 가족들에게 요구한 것은 간단했다. 최선을 다하라는 것.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으라는 것.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구하라는 것. - P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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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성별을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니잖아요, 안나레나. 어떤 바보를 사랑하게 되는 거지." - P258

"우리는 세상을 바꿀수 없어. 심지어 사람조차 바꿀 수 없을 때도 많지. 조금씩 천천히가 아닌 이상. 그러니까 기회가 생길 때마다 어떻게든 도우면 돼.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살리면서. 최선을 다해. 그런 다음… 그걸로 충분하다고 수긍하고 넘어갈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해야지. 실패하더라도 그 안에 매몰되지 않게." - P292

"모든 아이를 좋아할 필요는 없어요. 한 아이만 좋아하면 1지. 그리고 아이들한테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부모는 필요 없어요, 자기 부모면 되지. 솔직히 아이들한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운전기사예요."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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