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의 베이커리 1 한밤중의 베이커리 1
오누마 노리코 지음, 김윤수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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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잡다한 품종의 새끼들이 난폭하게 내던져진 커다란 둥지다. 그 안에서 세상 물정 모르는 새끼들은 어울리고 놀고 배우면서 누군가를 확실하게 밀쳐 짓밟고 이유도 모른 채 지저귄다. 때로는 같은 병에 걸리고, 때로는 이단을 발견해서 공격하고, 또 때로는 동료 새끼를 집요하게 쪼고 괴롭히며 장난삼아 죽여 버린다. 노조미는 또 다른 생각도 한다. 혹은 세상 자체가 커다란 둥지인지도 몰라. 둥지 안에서는 서로 먹이를 빼앗고 장소를 빼앗아. 그게 바로 자란다는 것이고, 자라는 일에 지치거나 질리면 지는 거야. (47쪽)
 
밤 11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만 문을 여는 기이한 빵가게 ‘블랑제리 구레바야시’. 오누마 노리코의 <한밤중의 베이커리>는 이 빵가게를 배경으로 하나같이 사연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뻐꾸기 엄마로부터 버림 받은 채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하는 노조미,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은 빵가게 주인 구레바야시, 구레바야시의 아내를 오랜 시간 연모한 제빵사 히로키, 순수함의 상징인 어린 고다마와 고다마의 대책 없는 엄마 오리에, 은둔형 외톨이로 사람을 엿보는 게 취미인 선한(?) 변태 마다라메, 여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어쩌다 남자로 태어나버린 게이 소피아 등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제각기 깊은 상처 하나씩을 껴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엄마로부터 버림받고 세상 속으로 내동댕이쳐졌다고 생각하는 노조미가 바라보는 세상이란 더없이 차갑고 사나운, 한없이 두려운 세계이다.
 
히로키는 빵은 완벽한 존재라고 믿는다. 완벽한 배합과 완벽한 순서와 완벽한 기술로 완벽하게 본떠진다. 사람도 어딘지 모르게 그와 비슷하다. 다른 사람과 섞이고 형태를 바꾸어 숙성되고 개개인이 되어 간다. 다만 거기에는 슬프게도 완벽함이 빵만큼 필요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사람은 그 불완전함을 사랑하기도 하는 실로 성가신 생물이다. (264쪽)
 
이 책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 펼쳐진 세상 그리고 이 책 밖에 존재하고 있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두렵고 난폭한 세계를 마주하고 있다. 이타심이나 배려보다는 좀 더 이기적인 자세로, 나와 다른 것을 배척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 난무한 세계 속에서 상처 입은 채 또 상처 입힌 채 살아가고 있다. 저자는 등장인물들과 얽혀 있는 사건들을 하나 둘 풀어내면서 이들이 안고 있는 깊은 상처와 이 상처들을 치유해 가는 과정을 담백하면서도 위트 있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부족하고 불완전한 상처투성이 인물들은 한밤중에 문을 여는 블랑제리 구레바야시를 들려 따뜻하고 달콤한 빵을 먹는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사람의 온기와 사랑을 통해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 간다. 저자 오누마 노리코는 <한밤중의 베이커리>를 통해 상처 하나 없는, 과오 하나 없는 완벽한 삶도, 완벽한 사람도 없다고 위로한다. 사람은 누구나 상처 하나씩, 허물 하나씩 짊어지고 살아가는 법이라고.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그 불완전함을 사랑하는 것이 또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인간의 구원은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필요한 게 아니라 따뜻한 빵 하나일 수도 있으며 귀 기울여주는 마음, 따스한 눈빛일 수도 있는 것이라고.
 
길가나 공원, 빵은 어디서든 먹을 수 있잖니. 마주할 식탁이 없어도, 누가 옆에 없어도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어. 맛난 빵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맛난 거란다. (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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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하비 리벤스테인 지음, 김지향 옮김 / 지식트리(조선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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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에 소개된 많은 인물들이 당대에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영양학자들이었고, 정부 소속으로 일했던 전문가들도 자신의 분야에서는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이었다.(…)이들이 지금까지 만들어 낸 공포의 대부분은 전혀 사실무근이거나 적어도 지나치게 과장된 것들이었다.(…)식품 산업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상 외로 거대한 자본이 몰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먹거리에 대한 공포를 유발하는 데 이 거대 자본이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말이다. (서문 중에서)

 

 

인간은 하루에도 몇 번씩 먹고 마시기를 반복한다. 배가 고파서, 목이 말라서와 같은 생리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음식물을 섭취하기도 하지만 기분 전환을 위해서,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 때론 단지 먹고 마시고 싶어서 음식물을 섭취하기도 한다. 그리고 건강을 위해서 일부로 특정 음식물이나 건강보조식품 등을 섭취하거나 복용하기도 한다. 오늘날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건강에 대한 관심도가 대단히 높으며 이 ‘건강’이라는 화두는 필연적으로 ‘먹거리’와 결부되어 왔다. 매일 먹어야만 하는 음식물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것이 몸에 이로운지 혹은 해로운지를 두고 과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의견이 참으로 분분하다. 과거에는 분명 해로운 것으로 알려졌으나 지금에 와서는 사실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가 없다거나 또는 무해하다거나 혹은 환경이나 시설이 개선되면서 더 이상 해롭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또는 그 반대의 경우도 있어 왔다. 대체 어떤 기관의, 어떤 전문가의 말이 사실인지 일반 대중들은 알 길이 없다. 그저 정부나 의학 관련 단체, 언론 매체, 기업의 상품 카피 문구에 기대는 수밖에.

 

 

비타민의 정확한 측정이 가능해지자 비타민 정제와 물약을 생산하는 제약업체들은 파괴된 영양소의 보충을 약속하며 비타민 함량까지 정확히 명시된 약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인체가 어느 정도의 비타민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 과학자들 사이에 명확한 합의가 없었지만 비타민 보조제는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 그 결과 1983년, 미국인들이 비타민 구입에 쓴 돈은 연간 1억 달러에 달했고, 최대의 수혜자는 비타민 보조제 판매업체들이었다. (171쪽)

 

 

한 카피 문구가 떠오른다. ‘생명 연장의 꿈, 메치니코프’ 1900년대, 과학자로서 이미 명망 높았던 메치니코프는 그의 저서 <생명의 연장>을 통해 생명을 무한정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고 주장했다. 생명 연장의 해답은 당시에는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요구르트’라는 식품 안에 있었다. 요구르트에 번식하는 미생물 즉 그가 발견한 ‘생명 연장 박테리아’는 인간을 무한히 오래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 뿐만 아니라 메치코프의 주장에 발맞춰 뉴욕타임스에서는 요구르트는 특정 질환을 예방하는 능력-결핵, 장티푸스, 당뇨 심지어 암까지-도 있다고 밝혔다. 이것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메치니코프는 자신이 140세까지 살 것이라 장담했지만 71세에 심장병으로 사망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역시 너도 나도 요구르트를 원하고 있으며 기업에서는 여전히 생명 연장의 꿈을 외치며 요구르트를 대량 생산하고 있다. 비타민 열풍은 또한 어떠한가. 파괴된 비타민을 보충하고, 생기와 활기를, 넘치는 에너지를, 명석한 두뇌를, 깨끗한 피부를 원한다면 우린 반드시 비타민제를 복용해야만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비 리벤스테인은 그의 저서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를 통해 인간이라면 반드시 섭취할 수밖에 없는 ‘먹거리’를 이용하여 사실과는 다르게 과장하거나 은폐, 왜곡하여 대중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거나 혹은 그 반대로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경제적 이득을 누리는 ‘무리들’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똑같은 먹거리를 앞에 두고 이해관계에 따라, 목적에 따라 매번 전문가들의 의견과 견해가 달라진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특정 음식물에 대해 과도한 공포심을 조장하거나 그 반대로 지나친 찬미와 예찬이 이루어질 때는 반드시 누군가는 이를 통해 이익을 챙기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저자는 먹거리에 얽혀 있는 이해관계의 역사와 이와 관련된 여러 사례들, 인물들, 기업과 단체들을 통해 이와 같은 사실들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일 같이 먹어야만 하는 먹거리들을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 걸까. 하비 리벤스테인의 제시한 해답은 매우 간단명료하다. 과유불급, 다양하게, 적당히, 즐겁게, 우리에게 주어진 음식들을 맛있게 먹으면 된다.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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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여행자 - 북위 66.5도에서 시작된 십 년간의 여행
최명애 글.사진 / 작가정신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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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지면 나타나고 끊어지면 또 나타나는 이 작은 빙하들은 아이슬란드를 덮고 있는 거대한 빙하 바트나요쿨의 ‘손가락’이라고 불렸다. 빙하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어떤 빙하들은 휠체어를 타고도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고, 어떤 빙하들은 그 앞까지 달려가 고인 호수에 발을 담글 수도 있었다.(…)이만큼 ‘빙하 접근성’이 좋은 곳은 세계적으로도 많지 않을 것이다. (52쪽)

 

북극이라는 단어는 ‘미지의 세계’라는 이미지로 다가온다. 알지 못하는 곳, 알 수 없는 곳 혹은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 몹시 추운 곳 그래서 북극곰이나 사는 곳. 이 책의 저자인 최명애는 <북극 여행자>를 통해 북극에도 사람이 살고 있으며 그곳에도 다양한 삶과 희로애락이 있음을 전해준다. 그리고 정작 북극의 상징이자 오직 북극에서만 서식하는 북극곰을 비롯 북극고래, 물범 등 북극 동물들의 수효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살고 있는 곳의 기온이 너무 높으면 북극곰의 털 속에 남조류가 번식해 이끼가 낀다.(…)지난 백 년간 지구의 평균 기온은 0.74도 올랐다. 북극곰의 생활 무대인 북극해의 바다 얼음은 십 년마다 이삼 퍼센트씩 줄어들고 있다.(…)바다 얼음이 줄어들면서 그 위에서 살아가는 물범도 줄어들었고, 또 그만큼 북극곰의 먹이도 줄어들었다.(…)제대로 먹지 못해 체력이 약화된 북극곰이 수영하다 지쳐 익사하게 되는 것이다. (220-221쪽)

 

저자는 북극선 즉 북극의 기준으로 삼는 북위 66.5도를 따라 러시아와 핀란드, 아이슬란드, 스웨덴, 노르웨이와 캐나다 그리고 알래스카를 여행하며 소소한 사건과 난관에 부딪히면서 북극에 삶의 터전을 둔 북극의 사람들과 북극곰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저자는 인간의 욕심과 과오로 인하여 환경과 생태계가 파괴되어 가고 이 폐해는 고스란히 죄 있는 인간에게 그리고 죄 없는 인간과 북극곰에게 되돌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기온의 상승으로 바다 얼음이 녹아 그 위에 있어야 할 물범 무리가 사라지고 물범을 잡아먹고 사는 북극곰은 배고픔에 지쳐 죽어간다. 북극곰이 헤엄을 치다 잠시 쉬어가던 이 바다 얼음이 녹아 북극곰은 먼 거리를 헤엄치다 익사하고 만다. 저자는, 배고픔에 지쳐 마을로 내려와 쓰레기 매립장을 뒤지는 북극곰 가족과 마주한다. 또한 부의 축적이 아닌 생존을 위해 포경을 하는 알래스카 원주민들의 삶과 마주한다. 지구 온난화로 고래잡이 기간이 점점 짧아지고 다국적 정유사의 가스 개발로 인해 북극의 바다는 파괴되어 가고 있다. 고래가 잡힌 것이 아니라 잡혀주는 것이라고 믿는 이 순박하고 욕심 없는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그렇게 잃어가고 있었다.

 

<북극 여행자>는 이러한 환경과 생태 문제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결코 무겁게도 심각하게도 부정적으로도 이끌어가지 않는다. 책은 유쾌한 에피소드들과 문장마다 넘치는 위트로 가득하다. 다만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밝혔듯이 자신의 여행이 자연을 해치지 않고 여행을 통해 자연을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에코 트래블’ 즉 생태 여행이라는 또 다른 여행법이 있음을 전하고자 했다. 자연을 생각하고 지구별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행하는 여행자가 되어보자는 것, 이것이 십 년 동안 북극을 여행한 한 북극 여행자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환경과 여행의 행복한 공존을 도모하는 ‘에코 트래블’, 즉 생태 관광에 관심을 갖게 됐다.(…)세계의 많은 곳에서 여행자들은 자연에 미치는 자신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자신의 여행이 산업 개발로부터 자연을 지켜내고, 또 현지 주민들의 삶의 여건을 개선할 수 있도록 애쓰고 있다. 그런 갸륵한 노력을 우리는 생태 관광이라고 부른다.(…)어떻게 하면 여행자와 자연을 함께 지키고 성장시킬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나의 여행이 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것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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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조그 1 펭귄클래식 116
솔 벨로우 지음, 이태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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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듯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다.(…)그러고는 그 시골구석에 파묻혀 신문사와 저명인사, 친구와 친척과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초라한 시신에게, 그리고 마침내는 고인이 된 위인들에게까지 이상야릇한 편지를 끊임없이 써댔다.(1권, 9쪽)
 
제법 명망 있는 학자로, 경제적으로는 궁핍함 없이,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러운 딸을 둔 중년의 남자 ‘모지스 허조그’는 꽤나 괜찮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한 허조그의 평탄한 삶은 아내의 불륜으로 인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분노와 배신감, 좌절과 회의는 비관주의과 허무주의로 점철되어 가고 그의 정신은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이러한 정신의 붕괴는 소심하고 나약한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침잠한 채 대상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편지 쓰기’라는 편집증적인 형태로 발산된다. 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편지들-이를테면 마음에 담아둔 여자, 자신을 기만한 변호사, 옛 친구, 경찰청장, 대통령 심지어는 킹 목사, 니체 등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전달될 리 만무한 인사들을 향한 부치지 못한 편지들-은 일종의 병적 행위의 결과물이자 몸부림이었고 동시에 상처 입은 영혼에 대한 치유의 행위였다.
 
 
아, 불쌍한 녀석! 그리고 허조그는 순간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신을 경멸해 보았다. 자신도 허조그를 비웃고 경멸할 수 있다. 그러나 끝내 한 가지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허조그이다. 나는 그일 수밖에 없다. 누구도 허조그가 될 수 없다. 자신을 비웃어도 결국에는 자신으로 되돌아가 진상을 파악해야만 한다. (1권, 108쪽)
 
소설 <허조그>는 현대 미국 문학의 거장이자 197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솔 벨로의 자전적 소설이다. 실제로 솔 벨로는 아내와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아내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부정한 관계였음을 알게 되고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소설 속 허조그는 솔 벨로 자신을 온전히 투사한 존재였으며, 허조그의 광적인 편지 쓰기 행위는 결국 솔 벨로의 글쓰기 행위를 그대로 투영한 것이다. 허조그가 편지 쓰기를 통해 상처 입은 영혼의 정화를 이루고자 했다면 솔 벨로는 집필을 통해 자신이 겪은 고통을 예술의 경지로, 문학의 세계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책 속 ‘나는 허조그이다. 나는 그일 수밖에 없다.(…)자신을 비웃어도 결국에는 자신으로 되돌아가 진상을 파악해야만 한다.’라는 허조그의 독백은 결국 저자 솔 벨로의 독백이자 처절한 자기반성이며 이 소설이 어떤 식으로 끝을 맺을지 더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그는 병원에 입원하는 걸 거부한 것 말고 자기가 제정신이라는 증거가 뭔지 생각해 보았다. 아마 편지 쓰기를 그만두는 것일 테지. 그렇다, 사실, 다음에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그를 사로잡았던 그 마법이 무엇이었든, 이제 그 마술은 그를 지나가고 있었다. 실제로 사라지고 있다. (2권, 208쪽)
 
소설을 읽는 내내 소설 전반에 자리한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분위기로 인하여 그리고 점점 더 고조되고 격해지는 허조그의 심리상태로 인하여 이 소설의 결말이 복수, 살인 혹은 자살과 같은 비극적 결말로 치닫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게 된다. 그러나 솔 벨로는 허조그를, 자기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몰지 않는다. 아니, 절망의 바다 끝까지 허조그를 끌어내리지만 결국 허조그는 깊은 절망을 떨쳐내고 좀 더 원숙한 인간으로, 좀 더 강한 인간으로, 좀 더 따뜻한 인간으로 성장하고 변모해 간다. 아내와 자신의 친구에게 살의까지 품었던 허조그는 인간이 가진 다양한 양면성을 깨닫고 스스로를 구원하게 된다. 또한 학문적 욕망과 독단, 자만심으로 점철된 자신의 상아탑과 나약하고 소심한 내면세계를 깨치고 나와 인간에게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바로 그 관계와 소통 속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저자 솔 벨로는 소설 <허조그>를 통해 결코 완벽할 수 없는, 한없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일 수만은 없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용서, 절망과 좌절 가운데서 성숙해지는 인간 존재에 대한 긍정 그리고 관계와 소통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이제, 절망의 바다를 헤치고 나온 허조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한가로이 저녁 식사를 준비할 뿐이다. 더 이상은 편지를 쓰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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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곶의 찻집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샘터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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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소중한 것을 잃지만, 또 그와 동시에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얻기도 하지요. 그 사실만 깨닫는다면, 그다음부턴 어떻게든 되게 마련이에요. (53쪽)

일찍이 불가에서 인생은 곧 고苦라고 했던가. 그러하기에 삶의 여정 가운데는 더없이 따스한 위로가 필요할지 모른다. 모리사와 아키오의 <무지개 곶의 찻집>은 여러 화자들과 여러 사건들을 통해 상처 입은 영혼들을 향한 위로와 좀 더 나은 내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어느 외진 해안 절벽에 다다르면 엉성하지만 묘하게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이 감도는 작은 찻집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사랑하는 아내이자 엄마를 떠나보낸 어린 딸과 젊은 도예가, 취업난에 절망하며 방황하는 청년, 사업에 실패하고 아내와 자식과도 이별한 채 도둑이 되어버린 칼갈이 장인,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고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채 바라보기만 하는 애달픈 중년의 사내.

 

그곳으로 이끌린 사람들은 하나같이 삶의 희망과 용기를 잃고 자기만의 깊은 상처를 안은 채 신음하고 있다. 그들 앞에 나타난 곶 찻집의 주인 에쓰코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세상에서 가장 정성스럽게 만든 커피와 각자에게 특별한 의미가 되어줄, 희망이 되어줄 음악을 선물하며 그들의 상처를 보듬고 그들의 영혼을 위로한다. 인생은 많은 것을 잃기도 하지만 또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산다는 건, 기도하는 거예요.(…)인간은 말이죠, 언젠가 이렇게 되고 싶다는 이미지를 품고, 그걸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동안에는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만 꿈과 희망을 다 잃고 더 이상 기도할 게 없다면, 자신도 모르게 잘못된 길로 가기도 하지요. (146쪽)

저자 모리사와 아키오의 문체는 지극히 소박하고 담담하다. 그럼에도 자칫 무미건조할 수 있을 이러한 문체가 마치 이슬을 머금은 잎사귀처럼 촉촉하고 싱싱하다. 또한 곳곳에 녹아 있는 많은 은유와 상징들이 읽는 이를 즐겁게 한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자마 <카페 ‘곶’ 여기서 좌회전>이라는 팻말이 느닷없이 나타나 발견한 이를 당황스럽게 만든다는 설정은 곧 인생이라는 고단한 긴 터널 가운데 때론 생각지도 못한 유쾌한 사건을, 소중한 인연을, 인생의 전환점을 만나게 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소제목으로 사용한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인생의 절기를 뜻한다. 행복의 두근두근 네 살의 노조미는 봄으로,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청년 겐은 여름으로, 다시 한 번 좌절을 딛고 일어설 쉰 살의 사내는 가을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다니는 겨울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주인공 에쓰코의 이야기가 담긴 마지막 챕터가 ‘여름’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 이 책을 읽은 모든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을 마지막 챕터에서의 에쓰코는 정황상 칠순이 넘은 노인이다. 더 이상 찻집을 운영하기도 힘들 만큼 노쇠해진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녀가 그토록 간절히 기다렸던 무지개의 정체를, 무지개의 의미를 깨달은 후 다시 주방 앞에 서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만든다. 칠순이 넘은 에쓰코의 이야기를 ‘여름’에 담은 저자의 의도가 숭고하기까지 하다. 에쓰코는 그곳에서 여전히 상처 받은 이들의 영혼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며 위로할 것이다. 산다는 건 기도하는 것이며 희망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고 말이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건 자신이 살아온 여정을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아닐까? 괴로웠던 일까지 포함하여 여태까지의 인생을 통째로 긍정하기 때문에 너희는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그 당시를 추억할 수 있는 거란다. 겹겹이 쌓아온 과거의 시간이 바로 지금의 너희니, 과거를 그리워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을 긍정하고,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해. (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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