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조그 1 펭귄클래식 116
솔 벨로우 지음, 이태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그는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듯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다.(…)그러고는 그 시골구석에 파묻혀 신문사와 저명인사, 친구와 친척과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초라한 시신에게, 그리고 마침내는 고인이 된 위인들에게까지 이상야릇한 편지를 끊임없이 써댔다.(1권, 9쪽)
 
제법 명망 있는 학자로, 경제적으로는 궁핍함 없이,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러운 딸을 둔 중년의 남자 ‘모지스 허조그’는 꽤나 괜찮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한 허조그의 평탄한 삶은 아내의 불륜으로 인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분노와 배신감, 좌절과 회의는 비관주의과 허무주의로 점철되어 가고 그의 정신은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이러한 정신의 붕괴는 소심하고 나약한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침잠한 채 대상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편지 쓰기’라는 편집증적인 형태로 발산된다. 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편지들-이를테면 마음에 담아둔 여자, 자신을 기만한 변호사, 옛 친구, 경찰청장, 대통령 심지어는 킹 목사, 니체 등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전달될 리 만무한 인사들을 향한 부치지 못한 편지들-은 일종의 병적 행위의 결과물이자 몸부림이었고 동시에 상처 입은 영혼에 대한 치유의 행위였다.
 
 
아, 불쌍한 녀석! 그리고 허조그는 순간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신을 경멸해 보았다. 자신도 허조그를 비웃고 경멸할 수 있다. 그러나 끝내 한 가지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허조그이다. 나는 그일 수밖에 없다. 누구도 허조그가 될 수 없다. 자신을 비웃어도 결국에는 자신으로 되돌아가 진상을 파악해야만 한다. (1권, 108쪽)
 
소설 <허조그>는 현대 미국 문학의 거장이자 197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솔 벨로의 자전적 소설이다. 실제로 솔 벨로는 아내와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아내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부정한 관계였음을 알게 되고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소설 속 허조그는 솔 벨로 자신을 온전히 투사한 존재였으며, 허조그의 광적인 편지 쓰기 행위는 결국 솔 벨로의 글쓰기 행위를 그대로 투영한 것이다. 허조그가 편지 쓰기를 통해 상처 입은 영혼의 정화를 이루고자 했다면 솔 벨로는 집필을 통해 자신이 겪은 고통을 예술의 경지로, 문학의 세계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책 속 ‘나는 허조그이다. 나는 그일 수밖에 없다.(…)자신을 비웃어도 결국에는 자신으로 되돌아가 진상을 파악해야만 한다.’라는 허조그의 독백은 결국 저자 솔 벨로의 독백이자 처절한 자기반성이며 이 소설이 어떤 식으로 끝을 맺을지 더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그는 병원에 입원하는 걸 거부한 것 말고 자기가 제정신이라는 증거가 뭔지 생각해 보았다. 아마 편지 쓰기를 그만두는 것일 테지. 그렇다, 사실, 다음에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그를 사로잡았던 그 마법이 무엇이었든, 이제 그 마술은 그를 지나가고 있었다. 실제로 사라지고 있다. (2권, 208쪽)
 
소설을 읽는 내내 소설 전반에 자리한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분위기로 인하여 그리고 점점 더 고조되고 격해지는 허조그의 심리상태로 인하여 이 소설의 결말이 복수, 살인 혹은 자살과 같은 비극적 결말로 치닫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게 된다. 그러나 솔 벨로는 허조그를, 자기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몰지 않는다. 아니, 절망의 바다 끝까지 허조그를 끌어내리지만 결국 허조그는 깊은 절망을 떨쳐내고 좀 더 원숙한 인간으로, 좀 더 강한 인간으로, 좀 더 따뜻한 인간으로 성장하고 변모해 간다. 아내와 자신의 친구에게 살의까지 품었던 허조그는 인간이 가진 다양한 양면성을 깨닫고 스스로를 구원하게 된다. 또한 학문적 욕망과 독단, 자만심으로 점철된 자신의 상아탑과 나약하고 소심한 내면세계를 깨치고 나와 인간에게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바로 그 관계와 소통 속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저자 솔 벨로는 소설 <허조그>를 통해 결코 완벽할 수 없는, 한없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일 수만은 없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용서, 절망과 좌절 가운데서 성숙해지는 인간 존재에 대한 긍정 그리고 관계와 소통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이제, 절망의 바다를 헤치고 나온 허조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한가로이 저녁 식사를 준비할 뿐이다. 더 이상은 편지를 쓰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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