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 1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이 재미있을까 없을까는 애초부터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김별아의 '미실'을 무척이나 인상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김별아의 유려한 이야기 전개와 징그럽도록 현란한 어휘력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이 '논개'였기 때문에 무조건 읽고 싶었다.

'논개'의 2권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다시 1권의 첫번째 장인 '序'의 내용을 되짚어 본 사람은 아마도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왜 1권의 첫번째 문장의 시작이 뜬금없이 "날아올라"로 시작했는지를 2권의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 "날아오르듯"을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논개의 죽음을 죽음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던 작가의 염원과 논개의 숭고한 죽음을 죽음이 아닌 비상(飛上)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작가의 바램 그리고 독자들로 하여금 뜨거운 감동을 이끌어 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가의 의도가 어찌되었건 간에 적어도 나에게는 제대로 성공했다. 오랫만에 소설책을 보면서 '감동'이라는 순수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으니까 말이다. 

논개든 황진이든 어우동이든 조선시대의 기생들에 관한 이야기를 역사적 사료를 통해 복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실 기생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근현대사 이전의 여성들에 관한 정확하고 풍부한 역사적 사료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저 실존했었다는 사실 하나를 붙잡고 오로지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서 재탄생되는 역사 속 여성에 관한 이야기는 그래서 더더욱 흥미롭고 영화나 소설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이다. 어떻게 재창조 할 것인가. 김별아는 논개를 어떻게 재창조 했을까. 내가 느낀 논개는 고집쟁이지만 지혜롭고 아름답지만 강하며 예쁘다는 말보다는 멋있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고 비겁하고 독선으로 가득찬 벼슬아치들보다 용감하고 현명했지만 '영웅'이라기보다는(게다가 '웅'자는 수컷 웅雄이 아닌가) 지조와 용기와 절개가 있는 '여인'이라는 느낌이었다. 여인...아무런 기록도 사료도 없이 벼슬도 칭호도 얻지 못하는 조선시대의 여인말이다. 작가는 영웅이 아닌 여인 '논개'를 창조했다.  

성전(聖戰)이라 일컬으며 자신의 신념을 고집하기 위해 무고한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자살폭탄 테러나 인질을 잡아 죽이는 행동을 통해서는 그 어떤 숭고함도 설득력도 찾을 수 없다. 자기 나라를 침략하고 노략하는 적들의 우두머리 장수를 자신의 품안에 끌어안고 물속으로 뛰어든 논개의 죽음이 이토록 숭고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죽음이야 말로 진정한 성전이기 때문이 아닐까. 누가 알아주기 때문도 아니고 자신의 안락만을 위함도 아닌 모국에 대한 사랑과 자신이 신념을 개진하기 위한 그 순수한 마음과 용기가 '논개'라는 위대한 조선의 여인을 있게 한 것이고 이렇게 '논개'라는 소설을 만날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단지, 여타의 기생들과 마찬가지로 언제 태어났는지 조차 모르는 논개지만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가 임진왜란 중 1593년 사망했기 때문에 기생 논개의 사망년도가 1593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든다.



고단하다. 애달프다. 그러나 세상의 동정과 연민을 구하지 않겠다. 바라던 것을 주지 않았다고 원망하지도 않겠다. 논개는 순간 혼신의 힘을 모두 기울여 잔학한 세상을 들어 밀쳤다. 그 무게가 태산만큼 무거운 듯, 새털처럼 가벼운 듯도 하였다. 기쁨과 슬픔 사이, 순경과 역경 사이, 그리고 죽음과 삶 사이. 세상의 틈새를 향해 발을 굴러 몸을 던졌다.

날아오르듯,   

- '논개' 중에서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셔널 갤러리 마로니에북스 세계미술관 기행 2
다니엘라 타라브라 지음, 박나래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의 서문에도 나와 있지만 내셔널 갤러리는 런던을 대표하는 미술관이며 동시에 역사적으로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미술관이다. 지금이야 아무 때나 근처의 미술관에 걸음만 하면 아무런 제재 없이 회화들을 감상할 수 있는 시대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미술관은 아무나, 아무 때나 들어가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격식에 맞는 복장을 하고, 과연 이 미술관에 입장할 수 있는지 그 자격을 시험하는 간단한 테스트를 거쳐야 했으며, 아이들의 출입은 금지 되었다.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두 달 전쯤 르네마그리트전을 보러 서울시립미술관에 갔을 때의 내 복장이라 하면 청바지에 컨버스화를 신고 어슬렁거리며 그림들을 감상했는데 말이다. 게다가 만약 관람 자격시험을 보았다면 과연 몇점이나 받았을까? 퍽이나 골치 아픈 상황과 마주해야 했을 것이다. 여하튼 당시의 미술관들은 이러한 전통을 고수했었는데 바로 이 내셔널 갤러리는 방문자들의 자격을 테스트하지도 않았고 출입 허가증을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어린이들의 방문을 허가한 최초의 미술관이었고 무료입장이라는 훌륭한(?) 원칙을 고수했다. 고지식하고 원칙을 따지기 좋아하는 영국에서 그것도 신분의 계급구조가 남아있던 1800년대에 이러한 시도는 책에도 나와 있듯이 ‘근대적인 혜안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셔널 갤러리에는 어떤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을까. 예상했던 대로 대부분이 종교적인 그중에서도 기독교 교리와 기독신앙과 관련된 그림들과 신화의 내용을 담은 그림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내셔널 갤러리를 가장 대표하는 그림은 아마도 이 책의 표지이기도 한 얀 반 에이크의 1400년대 작품인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일 것이다. 이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의 포문을 연 최초의 그림으로서 의미가 크다. 신 중심의 회화에서 인간 중심의, 인간의 삶에 초점을 맞춘 그림이다. 하지만 이 그림이 유명한 것은 그림의 중안 상단에 걸려있는 거울 속의 배경인물들의 뒷모습을 그려놓고 이들의 앞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거울의 상징성에 대해서 자연과 대우주가 있다면 인간과 소우주(거울)가 존재함을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관람객이 등장인물들과 같은 위치에 있는 듯한 효과를 내는 획기적인 기법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하고 여하튼 말도 많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르네상스의 정신을 개진하고 있다는 것이 이 그림의 가장 큰 의미일 것이다. 바로 이 유명하고 말 많은 그림이 내셔널 갤러리를 대표하는 그림이자 르네상스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그림인 것이다. 

 

 

책이라는 게 이래서 위대한 것일까. 영국 런던에 위치한 내셔널 갤러리에 가본 적은 없지만 이렇게 책을 통해서 바다 건너에 있는 갤러리에 전시된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림들을 설명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고 행복하다. 하지만 책을 보면 볼수록 원 그림을 직접 두 눈으로 감상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생기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특히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안나와 성 요한과 함께한 성모자’는 정말이지 직접 보고만 싶다. 책자에 인쇄된 그림도 이렇게 아름답고 신비스러운데 이 그림을 직접본다면...스탕달 신드롬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마 아름다움에 취해 온 몸이 전율에 휩싸일 것만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피홀릭
권지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권지예라는 소설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02년 이상문학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뱀장어 스튜’라는 소설을 통해서였다. 그전에도 그 후에도 그녀의 글을 읽지 못했다. 작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워낙 다작을 하는 작가가 아니라 그다지 많은 책들을 내지 않았고 그래서였는지 ‘해피 홀릭’이 이제야 두 번째로 읽는 권지예의 작품이자 첫 번째로 읽게 된 산문집이다.  

해피 홀릭? 정말 해피 홀릭 할 수 있을까? 인생이 그토록 해피하단 말인가? 하긴 깔끔한 외모에 권지예만의 독창적이고 신선한 내용과 문장력으로 소설가라면 한 번쯤은 꼭 받고 싶은 이상문학상을 그것도 대상을 받은 여성 작가가 아닌가. 이청준, 박완서, 이문열, 양귀자, 윤대녕, 은희경, 이인화, 신경숙 같은 당대 최고의 작가들이 모두 이상문학상 대상 작사들이란 말이지...그러니 오죽이나 인생이 해피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도대체 얼마나 해피한 인생인지 볼까 하는 질투어린 마음으로 책을 펼쳐들었는데 난 그만 깔깔거리며 웃고 말았다. 첫 번째 챕터부터 솔직한 일상의 표현과 유쾌한 글발로 나를 몹시 웃겨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저 웃기기만 하거나 가벼운 농으로 일관된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그녀의 깊이 있는 성찰과 보고 싶은 이들에 대한 그리움, 삶에 대한 아픔과 반성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녀가 해피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 때문이다. 남편, 친구들, 선배들, 시어머니, 어머니, 아버지, 선생님, 짧은 만남으로 이름만 기억하는 사람 등등 그녀 주변의 사람들로 인해 그녀는 화가 나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로 인하여 그녀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인생이 해피할 수 있었다. 관계성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인간은 이 지긋지긋한 관계성으로 인하여 분노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권지예는 이러한 인간의 관계성에 대해서 솔직하고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다. 

타인의 삶을 그것도 굉장히 은밀하고 내면적인 일상을 몰래 들여다보는 기분으로 글을 읽는 재미도 좋았지만 나와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성에 대해서 그리고 이들로 인해 내가 얼마나 해피한지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는 사실이 나를 해피하게 해주었다. 어쩌면 이들에게 나는 참 큰 빚을 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또 내가 이들을 해피하게 해주고 있는지 아니 오히려 이들을 화나게 하고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4월의 햇살로 따뜻해진 육체와 ‘해피 홀릭’이라는 책 한 권으로 따끈해진 마음까지 참 기분 좋게 따스한 봄날이다.  

그러나 요즘엔 ‘행복은 불행이 감싸인 씨앗’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삶에도 행복한 순간은 있게 마련이며 그 순간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사실 가장 무서운 건 불행보다는 불행의 반복이 가져주는 ‘희망 없음’이 아닐까...나는 그동안 행복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알고 보면 나는 ‘행복’이 아니라 ‘행운’을 꿈꿔왔는지도 모르겠다...행복과 불행은 빛과 그림자처럼 서로 상대적이라는 것이다...겸허하게 인생살이의 쓴맛도 받아들이면서 그 속에 든 삶의 진실을 따뜻한 눈으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주 평범한 행복의 비결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 해피 홀릭 중 ‘ 행복에 대한 오해’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과부마을 이야기 1
제임스 캐넌 지음, 이경아 옮김 / 뿔(웅진)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남미소설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과부마을 이야기’라는 제목만으로도 기대감은 충분했다. 어렸을 적 브라질 작가인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보고 가슴 한 귀퉁이가 뻑적지근할 정도로 뭉클했던 기억이 난다. 커서는 칠레 작가인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그토록 가슴에 오래 남았었다. 콜롬비아 작가인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은 다 읽고 난 후에 나를 백년은 폭삭 늙게 만들었고 시인인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시집은 지금까지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집 중에 하나다. 최근에는 인기 작가인 브라질의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읽고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진정한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포루투칼 작가인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또 얼마나 흥미진진하게 읽었던가. 아마도 이것이 내가 읽은 남미소설의 전부일 것이다. 이 몇 권의 남미 소설과 시는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강렬해서 그리고 아름다워서 여지까지도 내 뇌리 속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콜롬비아 출신의 제임스 캐넌이라는 작가의 ‘과부마을 이야기’라는 소설은 기대했던 대로 남미소설 특유의 강렬함과 이국적인 향취(한국인인 내가 느끼기에)가 물씬 풍겼고 대담했다. 중간에 책을 내려놓을 수 없을 정도로 흡인력 있는 전개와 인물들의 독특함은 아, 역시 남미소설이다라는 감탄을 안 할 수 없었다. 내전으로 인해 남자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마을, 마리키타는 오로지 여자들만 존재한다. 물론 남자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소년들과 성직자의 위선을 상징하는 라파엘 신부와 같은 소수의 남성이 존재하기는 한다. 단지 라파엘이라는 신부는 마리키타라는 공동체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니 마리키타에 상처만 남기는 방해물일 뿐이다. 결국 소년들은 죽고 라파엘이 떠나고 나서야 이 마을에는 오로지 여자만이 존재하게 된다. 처음에는 많은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녀들은 사나워지고 조금은 비이성적이 되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이성을 되찾고 나름의 질서를 잡아가며 여유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간다. 시간이 지나 네 명의 남성이 이곳으로 돌아와 가족을 만들고 염원하던 아이가 탄생하면서 이 소설은 마무리 된다.  

 

이 소설을 통해 제임스 케넌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 전쟁으로 인한 참상? 남성들의 권위주의 타파? 여성공동체의 낙관적인 비전? 글쎄...틀린 말은 아닌 것 같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전통주의에 대한 도전과 정치에 대한 풍자 그리고 조화와 탄생일 것이다. 제임스 케넌은 결코 어렵지 않은 이야기를 통하여 심지어 유머까지 곁들여 가며 그의 철학과 사상, 그가 바라는 희망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전쟁이 없는 세상, 남녀가 평등하게 조화를 이루는 세상, 이런 세상을 작가는 대담하고 거침없이 그려내고 싶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또 한편의 남미소설은 기대했던 대로 내 뇌리 속에 오랜 시간 머물게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히피의 여행 바이러스 - 떠난 그곳에서 시간을 놓다
박혜영 지음 / 넥서스BOOKS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누구든지 나에게 “어디로 여행을 떠나고 싶으냐?”는 질문을 던지면 난 두 번 생각도 안 하고 대답하는 곳들이 있다. 그리스의 산토리니,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체코의 프라하, 쿠바의 하바나.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추억도 없고 기억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여행책자에서 보았던 숱한 사진들이 전부이며 영화에서 본 장면들 그리고 그곳에 대한 환상뿐이다. 전문가의 기술이 발휘된 멋들어진 사진들과 영화에서 본 매력 넘치는 장면들과 내가 만들어낸 환상만으로도 일단은 견뎌내고 있지만 도저히 참기 힘들어 지면 여행책자들을 보며 손가락으로 꾹꾹 그곳들을 짚어보고 여행자의 글을 보면서 위안과 대리만족을 느낀다. 나도 언젠가는 갈 수 있겠지, 언젠가는 이 사진 속 바로 그 장소에서 발을 딛고 서 있겠지,이 여행가가 느낀 그런 황홀한 기분을 나도 느낄 수 있겠지라며 희망을 갖는다. 그래서 여행책자나 여행 에세이 같은 책은 나에게 있어서 일종의 산소통 같은 구실을 한다. 아니...대마초나 마리화나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요즘 여행 관련 책자들의 대세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워낙 인터넷이 발달되어 있는 세상이고 하루에도 수 천 권의 책이 출판되는 세상이고 마음만 먹으면 페키지로 저렴한 가격에 다른 나라의 유명 관광지를 가볼 수 있는 세상이다 보니 근래에는 유명 관광지를 소재로 한 책자보다는 그렇지 않은 곳, 제2의 장소, 알려지지 않은 곳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많아진 것 같다. 히피의 여행 바이러스가 일종의 그런 책인데 히피의 여행 바이러스를 받아들고 쿵쾅 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책을 읽어내려 갔는데...이런 젠장...이 책은 또 왜 잔잔한 나의 일상에, 지루하리만치 평화스러운 나의 일상에 돌을 던져 파장을 일으키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리 요즘 대세가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책은 대세에 휩쓸렸다는 느낌보다는 저자가 오랜 시간 자신의 발로 세상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는 곳들에 관해 진심을 담아 이야기 한다. 특히나 ‘골목’에 관한 저자의 애착과 사랑은 비록 그녀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나에게 환상이 아닌 진심을 전해주었다.  

 

태국의 골목, 이탈리아의 골목, 런던의 골목, 베트남의 골목에서부터 마지막 쿠바의 골목에 이르기까지 그 소박한 세상을, 따뜻한 세상을, 삶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세상을 저자는 글에 담고 사진에 담아 지루함과 각박함이 공존해 있는 세상 속에 찌들어 있는 나에게 잠시나마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물론 이 지독한 여행 바이러스까지 심어 주었지만 말이다. 아마도 이 여행 바이러스의 백신은 결국 ‘여행을 떠남’일 것이다. 무한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낯선 풍경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사람 냄새가 물씬 느껴지는 그런 여행 말이다. 솔직히 이 책을 세 번이나 읽어버렸다. 내 손에는 아직 백신이 주워지지 않았기 때문에...백신대신 진통제로 사용하고 있는데...병 주고 약 주고가 딴 게 아닌 듯 싶다. 쿠바 뒷골목에서 나부끼는 낡은 청바지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지금 이 순간...미치도록 여행이 가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