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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의 여행 바이러스 - 떠난 그곳에서 시간을 놓다
박혜영 지음 / 넥서스BOOKS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누구든지 나에게 “어디로 여행을 떠나고 싶으냐?”는 질문을 던지면 난 두 번 생각도 안 하고 대답하는 곳들이 있다. 그리스의 산토리니,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체코의 프라하, 쿠바의 하바나.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추억도 없고 기억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여행책자에서 보았던 숱한 사진들이 전부이며 영화에서 본 장면들 그리고 그곳에 대한 환상뿐이다. 전문가의 기술이 발휘된 멋들어진 사진들과 영화에서 본 매력 넘치는 장면들과 내가 만들어낸 환상만으로도 일단은 견뎌내고 있지만 도저히 참기 힘들어 지면 여행책자들을 보며 손가락으로 꾹꾹 그곳들을 짚어보고 여행자의 글을 보면서 위안과 대리만족을 느낀다. 나도 언젠가는 갈 수 있겠지, 언젠가는 이 사진 속 바로 그 장소에서 발을 딛고 서 있겠지,이 여행가가 느낀 그런 황홀한 기분을 나도 느낄 수 있겠지라며 희망을 갖는다. 그래서 여행책자나 여행 에세이 같은 책은 나에게 있어서 일종의 산소통 같은 구실을 한다. 아니...대마초나 마리화나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요즘 여행 관련 책자들의 대세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워낙 인터넷이 발달되어 있는 세상이고 하루에도 수 천 권의 책이 출판되는 세상이고 마음만 먹으면 페키지로 저렴한 가격에 다른 나라의 유명 관광지를 가볼 수 있는 세상이다 보니 근래에는 유명 관광지를 소재로 한 책자보다는 그렇지 않은 곳, 제2의 장소, 알려지지 않은 곳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많아진 것 같다. 히피의 여행 바이러스가 일종의 그런 책인데 히피의 여행 바이러스를 받아들고 쿵쾅 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책을 읽어내려 갔는데...이런 젠장...이 책은 또 왜 잔잔한 나의 일상에, 지루하리만치 평화스러운 나의 일상에 돌을 던져 파장을 일으키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리 요즘 대세가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책은 대세에 휩쓸렸다는 느낌보다는 저자가 오랜 시간 자신의 발로 세상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는 곳들에 관해 진심을 담아 이야기 한다. 특히나 ‘골목’에 관한 저자의 애착과 사랑은 비록 그녀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나에게 환상이 아닌 진심을 전해주었다.
태국의 골목, 이탈리아의 골목, 런던의 골목, 베트남의 골목에서부터 마지막 쿠바의 골목에 이르기까지 그 소박한 세상을, 따뜻한 세상을, 삶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세상을 저자는 글에 담고 사진에 담아 지루함과 각박함이 공존해 있는 세상 속에 찌들어 있는 나에게 잠시나마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물론 이 지독한 여행 바이러스까지 심어 주었지만 말이다. 아마도 이 여행 바이러스의 백신은 결국 ‘여행을 떠남’일 것이다. 무한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낯선 풍경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사람 냄새가 물씬 느껴지는 그런 여행 말이다. 솔직히 이 책을 세 번이나 읽어버렸다. 내 손에는 아직 백신이 주워지지 않았기 때문에...백신대신 진통제로 사용하고 있는데...병 주고 약 주고가 딴 게 아닌 듯 싶다. 쿠바 뒷골목에서 나부끼는 낡은 청바지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지금 이 순간...미치도록 여행이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