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끼호떼 1 - 기발한 시골 양반 라 만차의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민용태 옮김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너무나 투명해서 그 순수함이 부러워지는 유리(琉璃)는 쉽게 깨지는 위험을 보호막으로 세워 그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한다. 쉽게 깨질 수 있기에 더 투명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유리가 아닐까? 『돈 끼호떼Ⅰ』속 돈 끼호떼, 그를 유리라고 하겠다. 유리는 돈 끼호떼의 이상적인 세계이며 그를 순수한 상상 속에 발을 묶어둔 매체이다. 그가 유리를 깨트리지 않으려고 조심했을 수도 있으나 혹 깨져도 자신의 믿음으로 조각 난 유리를 새로이 더 투명한 생명을 줌을 거듭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제52장에서 돈 끼호떼는 고행 수사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그의 집으로 돌아간다. 이어 잠들어 있는 그를 지켜보는 조카딸과 가정부는 건강이 좋아지면 또 다시 자기들만 남겨 둘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는데, 그녀들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해 버린다. 끝내 돈 끼호떼는 깨어져버려 현실이라는 조각이 되어버린 유리를, 자신의 끝없는 믿음과 용기로 떨쳐낼 수 없는 이상의 갈망이라는 마술로, 다시 맑고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유리는 돈 끼호떼를 자신에게 봉한 채 또 방랑기사의 삶을 풀어 놓을 것이다. 항상 붙어 다니며 주인의 유리를 깨트리려던 산초 빤사를 비웃는 속삭임을 내뱉으며 말이다. 현실이 자신을 무너뜨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현실이 밀어냄에 유리로써 얼굴 내민 이상도 동시에 밀어낼 것이라는 경고를 하며 말이다.

방랑기사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착각 속에 빠진 돈 끼호떼, 그가 수도 없이 되 뇌이던 이름은 잊을 수가 없다. 엘 또보소 지방의 둘시네아! 돈 끼호떼가 만들어낸 인물임에 산초 빤사에 의해 실존인물 임이 밝혀지며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둘 다 그녀를 만나지는 못 했지만 말이다. 그녀를 생각함에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들, 그 중에서도 제25장 시에르라 모레나 산중에서 이 라 만차의 용감한 기사와 산초 빤사 간의 대화며 사랑을 위해 기사 아마디스의 고행을 흉내 내며 고행하던 그의 모습이며 잊히지 않는다. 특히 그가 둘시네아에게 쓴 편지를 읽을 땐 경건하면서도 우스꽝스러움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망설이게 만들었다. 하늘처럼 높으신 아씨께 죽는 날까지 당신의 사랑으로 불쌍한 몰골의 기사로 남고 싶음을 보인 그 편지를 마주쳤을 때 말이다. 반면, 이 편지에 놀라면서도 새끼 당나귀 3마리에 대한 증서를 명확한 서명과 함께 기재해 달라고 촉구하던 산초의 모습이 함께 강한 인상으로 남아졌다. 우스워 보이지만 자신의 정신적 세계를 지향할 줄 아는 불쌍한 몰골의 기사와 현실을 볼 줄 알지만 자신에게 올 물질적인 세계에만 급급한 산초, 과연 누가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이에 세르반떼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순간 세르반떼스가 돈 끼호떼의 몸을 빌려 늙은 몸으로 젊은 둘시네아를 갈망하여 쉽게 허락될 수 없는 이상을 쫒는 뒷면에는 산초 빤사의 몸을 빌려 현실에 급급한 아이러니로 똘똘 뭉쳐진 모습이었다. 투명한 이상을 꼭 봉한 채 현실을 온 몸으로 밀어내는 유리(琉璃)의 환영과 함께 맞물려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이 환영은 제 38장 문(文)과 무(武)에 대해 돈 끼호떼가 벌인 담론에서 내 주위를 맴돌았다. 文은 방랑기사를 이야기한 작자의 힘을, 武은 이야기 속 돈 끼호떼와 같은 기사를 떠올리게 하였는데, 불쌍한 몰골의 기사는 武를 찬양했지만은, 결국은 이야기에 갇혀 현실을 봐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비록, 유리에 갇힌 우리들의 이상은 값어치 있는 것이지만 유리를 감싸는 현실을 바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에 돈 끼호떼가 건네 준 아이러니한 유리를 비춰보며 살아가라는 속삭임이 들렸던 듯하다. 이것이 내가 만난 『돈 끼호떼Ⅰ』가 준 삶의 선물-유리(琉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미오와 줄리엣 - Shakespeare's Complete Works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윤기.이다희 옮김 / 달궁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산 정상에 올라 고함쳐본 일이 있는지, 간절한 외침이 터져 나오면 산뜻하고 가벼워지는 몸을 느끼는 순간 산이 보내는 응답에 전율을 느끼며 자연과 내가 대화하듯이 그 산울림처럼 이상적인 사랑이란 서로의 외침에 응답하고 전율을 보내며 함께 하는 것이 아닌지, 그렇기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전해준 사랑의 감동을 산울림이라 부르려한다. 로미오가 줄리엣을 본 순간 로잘린을 잊고 다른 사랑을 향하는 순간 그는 ‘제가 지금 사랑하는 여자는 정은 정으로 보답할 줄 알고 사랑에는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여자예요. 로잘린은 그렇지 못했어요.(제2막 3장)’라고 신부에게 고하며 그들의 결혼을 허락해 주기를 바란다. 줄리엣은 로잘린과 달리 로미오의 마음에 반응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한 것이다. 로미오의 외침이 산울림이 되어 로미오에게 전달되듯이 말이다.

하나의 산울림이기에 사물처럼 눈에 선명하지도 손으로 잡히지도 않지만, 그래서 더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미묘한 감정이지만 공간의 울림 곧, 마음의 울림이 교감을 이루면 쉽게도 혹은 선명하게도 느껴질 수 있는 것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결해주던 끈(사랑의 산울림)이 아니었는가 한다. 이러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의 산울림은, 두 사람에게는 부부로의 재탄생만이 아닌 죽음의 길을 열어주고 이승에 남은 자들에게는 슬픔과 동시에 화해를 통한 평화를 안겨주었으니, 이는 이들의 젊은 생기 혹은 패기와 정열이 담겨져 더 구슬프고도 아름답게 전해져왔다. ‘자연의 어머니인 대지는 자연의 무덤인 동시에 자연의 모태이기도 해.(제2막 3장)’라는 신부의 말처럼, 자연에서 태어난 산울림은 두 사람의 마음을 연결하는 하나의 끈이면서 그들의 사랑의 시작과 결말을 함께한 것이다. 4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갇힌 산울림, 그렇기에 더 간절한 떨림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받도록 도와왔는지 모른다. 그들의 생기발랄한 젊음 속에 피어난 사랑이 산울림에 봉인되어 죽음과 함께 자유로운 몸을 얻은 후, 산과 산만을 오가는 것이 아닌, 세상과 세상을 혹은 시간과 시간을 떠도는 산울림이 되어, 셰익스피어와 현대의 독자들 사이에 진한 울림으로 하나를 만들어 주는 것만 같다. 결혼식을 재촉하는 로미오에게 천천히 하라며 급히 달리면 넘어지게 마련이라는 신부의 말과 같은 행복 뒤 그들의 죽음을 암시하는 셰익스피어의 고함 외, 여러 아이러니를 툭 던져놓고 가는 그의 모습은, 그들의 행복과 슬픔을 모두 가진 산울림의 paradox(역설;아이러니)로 녹아 들려왔다. 결혼식에 쓸 로즈메리가 장례식에 쓰인 것과 같이 말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이를 비극이라고 말하려 하는 자에게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과 그들의 일생을 간직한 산울림의 paradox를 다시 한 번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생기발랄한 젊은 두 남녀의 추억을 담아 시공간을 넘나들어 감동을 전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산울림, 그것은 ‘연인은 여름 바람에 흔들리는 거미줄 위로도 떨어지지 않고 걸어 다닌다지. 그처럼 사랑의 기쁨은 가벼운 것이지.(제2막 6장)’라는 신부의 말처럼 그 많은 아픔과 기쁨을 안고도 사랑이라는 힘으로 가벼운 몸이 되어 지금까지 그 울림을 전해주는 산뜻한 몸짓이 아닌가 한다. 해묵은 증오의 결실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생을 빼앗아 가고 그들의 아침에 서글픈 평화를 안겨다 주던 추억쯤이야 사랑이라는 힘으로 가뿐히 웃어넘기겠다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보낸 산울림의 속셈인지도 모른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은 사랑의 메신저이며 죽음의 길인 산울림이 몬태규, 캐퓰릿, 영주 측의 사람들을 두 명씩 공평하게(?) 희생시켜 자신의 고귀한 가치를 돋보이게 한 것이다. 이에 사랑의 대화, 산울림을 다시 한 번 떠올리도록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리아스
아우구스테 레히너 지음, 김은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꼭두각시 인형극을 본 적이 있는가? 인형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이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힘, 그 뒤에는 인형들의 손과 발을 꽁꽁 묶은 실이 인형을 조작하는 사람들의 손가락에 걸려있다. 한 사람의 손이 2~3개의 인형을 움직이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의 손가락이 튕겨져 오를 때마다 그들의 운명에 순응하듯이 삐걱삐걱 춤을 추는 꼭두각시 인형, 사람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작은 손가락의 움직임에 온 몸을 맡기고 삐거덕 거리는 그들의 모습과, 인형을 조작하는 사람들의 모습, 이들의 주종(主從)관계를 필연이라고 고집하며 가느다랗고 연약한 부드러움 속에 고무줄같이 끈질긴 집요함을 숨겨두어 결코 놓아주지 않는 꼭두각시 인형의 운명의 줄, 여기서 나는 『일리아스』를 쫓아본다.

마치 『일리아스』 속 영웅, 군사, 백성 등 수 많은 인간들은 자신의 의지와 패기대로 여생을 살아가는 듯하나, 이는 신(神)들의 한 마디 말로 생(生)과 사(死)를 오가는 인간의 부질없는 삶과 이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자신의 생명줄을 그들의 예언에 순종하듯 맥없이 따르며, 오히려 그 운명에 대단한 사명감을 부여하여 꿋꿋이 죽음을 맞이하는 등장인물들의 태도를 갑갑하게 지켜보아야만 했다. 이는 마치 神들의 손가락이 가벼이 튕기어 나가는 순간, 아가멤논이 이끄는 그리스군과 헥토르가 이끄는 트로이군의 수많은 손과 발이 神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거대하고 웅장한 한 편의 꼭두각시 인형극의 막을 향해 초조한 마음으로 함께 달려온 기분이었다.

수많은 결투와 승리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적장의 갑주 제구를 벗겨 돌아오며, 생명을 담보로 얻었기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능력에의 증거물이라 뿌듯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만족감을, 잔인하고 냉정하게 맺은 죽음 위에 뿌려놓고 오는 그들의 모습에서 더욱 거칠고 강렬한 비극의 꼭두각시 인형극으로 치달음에 전율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인간들 자신들에 의하기 보다는 神의 조종으로 전쟁에 동참하고 있다는 생각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일리아스』의 주역인 아킬레우스 역시 헥토르와 싸워 그를 무찌르고 그의 갑주 제구를 벗겨내는 것이 자신의 생(生)을 단축시키는 것을 알면서도 무용(武勇)을 갖고 당당히 맞서나간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비참함에 神들은 각기 자신들의 소중한 인간들에게 애착을 보이며 그들의 말로에 눈물짓기도 한다. 이처럼 비참한 인간에의 삶임에도 불구하고 神들은 영원불멸의 생존 권리에 만족하지 않고 이들을 부러워했기에 이러한 전쟁을 유도한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짧은 인간의 생명줄이나, 그토록 짧기에 신들이 내린 그들의 운명에 순응하고 자신의 죽음 앞에서 꿋꿋하고 당당한 여유를 부리는 그들만의 아름다움을 말이다. 그들의 삶은 장편의 詩가 되어 우리들의 곁에 여전히 살아갈 것임을 예측했는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인간과 같이 다투고 시기하고 사랑할 줄도 아는 神들에게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베어 나온 인간의 모습이 수북하게 쌓여 감을 神, 자신들도 당황스러워 하면서 말이다. 인간을 다스린다는 神, 그들이 인간을 닮아가고 있으니 이에 더 분노하였는지도 모른다. 물론, 제우스의 막강한 힘과 여러 神들에 의한 전쟁이라고 말하고 있는 면이 없지 않으나 말이다.

『일리아스』, 이 속에는 자연과 인간을 오묘하게 대립시켜 묘사하면서 이들의 전쟁에의 비극을 더욱 더 잔인하게 그려냄에도, 가슴 깊이 퍼져오는 잔잔한 아름다움이 있다. 꼭두각시 인형이 되어 정해진 운명의 줄에 얽매여 있음에도 그들의 임무를 충실히 해내며 흥겹게 뱉어내는 그들의 詩, 그러한 역설적인 노래는 『일리아스』로부터 슬그머니 스며오는 색다른 감동일 것이다. 이러한 그들이 소극장으로 옮겨져 꼭두각시 인형들의 詩, 슬프면서도 웅장한 노래를 부르며, 과연 그들과 神은 주종(主從)관계에 갇힌 것인지, 우리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존재는 무엇인지, 자아(自我)의 부르짖음이 거대한 파동을 만들어 인간(人間)의 존재를 뒤흔들어 인류에 물음표를 던짐에 『일리아스』, 이곳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모습이 거울에 비치듯 눈앞에 선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우스트 밀레니엄 북스 4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김정진 옮김 / 신원문화사 / 200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타인의 무관심이 무서운 세상이다. 그러나 관심을 더 무서워하는 이들이 있다. 신체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 그들을 뚫어지게 바라본 적이 있다. 나와 다른 신체를 가졌다고 해서 그들에게 두려운 시선을 보낸 적이 있다. 그 때 그들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사람은 평생 동안 장님이지요. (비극 제2부 제5막)

그 때는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나도 그들처럼 장애를 갖고 있었음을. 단지 신체의 이상이 없을 뿐 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고 사회적 편견에 때 묻은 막이, 태생이 선물해준 순수한 눈을 가리어 편견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지금 우리는 장애를 갖고 있는 난쟁이들의 세상에 서있다. 진실 된 모습을 바라보지 못 하고 사회가 만들어낸 그물 속에 갇히어 허둥대는 정신적 장애를 앓고 있다. 하물며,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매일 바라보는 자신의 얼굴이, 자신의 눈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우리는 장애를 앓고 있는 난쟁이들이다. 이렇게 우리는 난쟁이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 갇혀 미로에 놓인 탈출구를 갈망한다.

파우스트, 그는 어떠하였는가? 위 대목은 몹시 늙은 파우스트에게 근심의 정령이 입김을 쐬어 그를 맹인으로 만들지만, 심안(心眼)이 더욱 밝아지고 견실한 노력의 반복으로 인류의 행복을 꾀함에, 미래에 낙원이 실현될 때야말로, 이러한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멈춰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비극 제2부 제5막)”라고 최고의 순간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며 숨을 거둔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라던 말처럼 지상에서 인간의 욕망을 메피스토펠레스를 통하여 맛 본 그가, 내기에서 승리한 것으로 착각하는 악마를 방치한 채 천사들과 함께 천상으로 영혼이 올라감으로써 그는 난쟁이의 허울을 벗어 던진 것일까? 정신적 장애로 절뚝거리는 마음을 벗어던지고 초월의 세계로 간 것일까? 파우스트 역시 나약한 사람이었기에 메피스토펠레스가 보여주는 세상의 유혹에 고귀하게 여겨지던 영혼은 절룩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에 그의 심안(心眼)은 어둠 속에서 한 가닥 한 가닥의 빛을 모아 밝혀갔으며, 절룩거리는 영혼에 노력의 보호막이 드리워져 그는 난쟁이의 몸을 일으킨 것이다. 꼽추의 등이 기이하고 신비한 힘으로 바로 세워진 것과 같은 고귀한 잔영으로 남겨져서 말이다.

아직도 세상은 난쟁이들이 모여 있는 장애로 가득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은 필연적인 生에 갇힌 고정된 상자는 아니다. 우리의 노력이 어둠을 뚫고 한 가닥 한 가닥의 빛줄기를 발할 때, 파우스트가 구제되었듯이 우리는 난쟁이의 몸을 딛고 일어서 신선한 향기가 베어나는 세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난쟁이의 몸속에 갇히어 장애로 절룩거리는 영혼을 꺼내어, 은연중에 가야만할 그 곳을 향하여 걸어가게 되리다. 파우스트, 그가 보낸 한 줄기 빛에 기대어 우리의 빛을 모아 난쟁이들이 모여 사는 세상을 밝힐 태양을 만들 수 있으리다. 사람은 평생 동안 노력과 함께 할 때, 이 세상에 장애를 가진 난쟁이는 사라지리다. 사람은 평생 동안 장님일 뿐인 것이 아니라, 사람은 평생 동안 노력하는 장님이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용소의 노래 - 북한 정치범수용소 체험수기
강철환 지음 / 시대정신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세상은 독충들로 가득하다. 북한에 뿌려진 침묵의 씨앗들은 독충의 배설물을 먹고 두 얼굴의 야누스로 성장해가고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主體思想)을 토대로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가 실시되고 있는 사회주의 정권의 하늘 아래,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국가보위원들의 냉랭한 인권침해와 수용자들의 두려움에 질려 다물어진 입을 한데 뭉뚱그려 침묵 속에 감추고 있다. 수용소는 인권침해 하는 자의 얼굴과 인권침해 당하는 자의 얼굴을 묵묵히 지켜내느라, 40여 년간 입을 열지 못했다. 북한이 장기간 고집해온 수용소의 침묵은 내부와 외부의 소통을 두절시킨 것이다. 그렇기에 수용자들의 피 비린내, 아픔의 호통, 덕지덕지 말라붙은 기생충들을 감싸고 흘러내리는 땀, 등을 분출시키지 못하고 제자리에 맴돌아 침묵 속에서 썩어감으로써 그 퀴퀴한 내음은 탈북자들의 체험 수기를 타고 세상을 떠돌게 한 것이다. 그 내음의 독성으로 세상 사람들을 인상 찡그리게 하고 심지어 눈물까지 자아낸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독충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인권침해를 자아내기에 퀴퀴한 내음을 꼬리 달고 다니는 독충들은 세상 사람들을 진저리 치게 만든다는 걸 『수용소의 노래|평양의 어항|』을 통하여 새삼 느끼게 될 것이다.

1990년대 후반 북한은 수백만의 아사자를 냈고, 아무리 적게 잡아도 백만 명 이상이 굶어죽었다고 한다. 전쟁도 아닌 평화 시기에 이러한 일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며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인민들이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들은 말하지 못하였는가? 굶어 죽으면서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원망조차 하지 않은 그 관용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5천년 역사에서 오늘과 같이 우리나라가 만방에 빛을 뿌린 적이 일찍이 없었다. 수령님이 탄생하시어 일제를 때려눕히시고 미제를 타도하였으며 오늘과 같은 사회주의 강국으로 발전시키신 것이다. 또 어버이 수령님께서는 주체사상을 창시하여 인류가 나아갈 앞길을 환히 밝혀주고 계신다.”

그들의 몸을 혹사시키더라도 인류의 길에 호롱불을 켜 앞장서시는 ‘어버이 수령님’이기에 자신들의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는 것인가? 인류의 길에는 그늘진 곳이 있을지언정 이미 태양이 내려쬐고 있는데 호롱불을 켜서 앞장서시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 대한 은혜를 깊이 느꼈다는 것인가? 이는 그의 힘이 드리워진 영역을 알게 한다. 북한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건설이라는 체제적 목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수령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이 사활적 의의를 갖는 중요한 문제로 간주되면서 수령의 유일적 영도가 제도화되어 있는 특성을 보인다. 그렇기에 생존 시의 김일성 북한 전 국방위원장이나 그의 지위를 계승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수령으로서 어느 국가기관에 대해서도 책임질 필요가 없는 절대 권력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선사시대의 대표적인 거석문화인 지석묘는 고인돌사회 그 자체이며, 단군조선, 청동기시대의 시작, 노예순장제사회, 한국 최초의 국가성립 등의 여러 이면을 엿보게 한다. 이러한 선사시대 힘의 증표가 지석묘라면 북한의 힘의 증표는 ‘정치범수용소’가 가장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에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자들은 북한정권에 관용을 베풀 수밖에 없었기에 그들의 침묵만이 남겨진 것이다.

사상과 기술의 주인은 우리라
사대주의 수정주의 짓 부셔 버리자
사상 기술 문화 혁명 더욱 다그쳐
혁명의 주인답게 혁명의 주인답게
살아나가자……

수용자들에게 침묵하는 법을 가르친 북한의 혁명은 얼마나 위대한 것일까? 위는 매일 아침 집합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 뒤에, 학교로 향하는 학생들의 행군 속에서 기계처럼 울리던 ‘수용소의 노래’의 일부이다. 그들의 혁명은 사대주의와 수정주의를 벗고 사상 기술 문화 혁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참히 국민들이 죽은 뒤에 남을 사상 기술 문화 혁명의 성과는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사람들의 생명보다 고귀한 대우를 받는 혁명사상의 추진에 있어 그 정당성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에 북한의 학생감독들이 ‘혁명화의 노래’라 일컫던 ‘수용소의 노래’를 되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혁명의 주인답게 살아나가자”라는 노래 뒤에는 무언의 명령이 숨겨져 있다. 혁명의 주인답게 살아나가기 위해, 혁명을 위해서라면 인간의 생명을 거리낌 없이 퍼부어야 한다는 절대명령 말이다.

가는 길 험난해도 해도
시련의 고비 넘으리
눈구름 휘몰아쳐도
생사를 같이 하리라
천금주고 살 수 없는
동지의 한없는 사랑
다진 맹세 변치 말자
한 별을 우러러 보네
- 동지애의 노래

북한에서는 ‘동지애의 노래’를 가사에서 보이듯 적지에 들어가 포로라든가 부상병이 되느니 동지를 따라 자폭하라는 교양적인 노래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혁명을 위해서 국민들의 인권쯤은 고려의 여지없이 내어줄 수 있다는 절대 힘의 형상화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 적합한 국민들이란 수용자들과 같이 지배권력 밖의 사람들만이 해당된다. 이러한 인식은 절대적이면서도 본래 태생이 그러하다는 불변의 이념이 되어 박혀있기에 국가보위원과 같은 권력자들은 수용자들에게 가하는 구타와 살인에 대하여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사건 하나하나들은 본보기로 삼아 수용자들에게 선전한다. 그러한 인식이 전제된 상태이기에, 수용소에서 공개처형을 시행할 때에는 생사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나무토막처럼 고꾸라져 나뒹구는 처형자의 머리를 권총을 꺼내 힘껏 내리치기까지 한다. 필자의 ‘토끼사 당번’이나 ‘갈매기 자전거’ 등의 경험은 수용자들이 짐승이나 기구 혹은 사물보다 못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인식화가 바탕이 되어진 수용소에서 수용자들은 국가보위원들의 인권침해를 견디다 못하여 자살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살한 사람의 시신은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 현장에서 차에 싣고 어디론가 가지고 간 후에, 인부들을 시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파게하고 시신을 묻는다. 봉분은 물론 없으며 그곳은 예전처럼 평평한 길로 만든다. 이는 아무도 묘를 찾을 수 없게 하려는 것이며 수용소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평토해치운다’고 말한다. 권력자들의 인식 상태를 잘 말해주는 또 다른 하나는 ‘용평’이다. 북한의 ‘독재대상구역’이라 불리는 이곳은, 보위원들의 말을 빌리면 조선인민공화국에서 살아서는 안 될 악질분자인 ‘완전타도대상’들이 가는 곳이라고 한다. 곧, 보위원들이 반동분자, 간첩, 반혁명분자, 위험분자 등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가는 수용소로써, 한 번 들어가게 되면 살아서 나오리란 희망을 걷어 치워야만 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는 ‘종자씨 말리기 작전’일 뿐이다.

북한의 보위원들은 몰래 작업이나 수업에 빠지고 자기 일을 하거나 노는 것을 자유주의라 몰아가고, 제 잇속만 챙기는 행위를 자본주의라 몰아간다. 그들은 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이것에 대한 국가 권력의 간섭을 배격하려고 하는 사상적 입장이며, 자본주의가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 및 기업가 계급이 그 이익 추구를 위해 생산 활동을 하도록 보장하는 사회경제체제임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공산주의가 일반적으로 생산수단의 사회적 공유를 토대로 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유물 변증법으로 비판하며 계급투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하는 것임을 보편적인 시각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그들이 말하는 공산주의는 어떤 것일까? 그들의 주관성으로 일구어진 사상이 북한 내에서 정당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간다.

“너희들은 죄인의 자식들임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어버이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넓고 깊은 은덕으로 학교 교육을 받고, 이제부터는 노력자(勞力者)로 일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학교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일이 없도록 일을 잘하여야 한다.”

이는 학교 교장의 상투적인 연설을 옮긴 것이다. 여기서 그들의 공산주의가 이루어낸 혁명사상 아래의 수용자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북한사회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있어서 가치관과 의식구조에 혁명관 ․ 윤리관 ․ 인생관 등은 그대로 투영되는데 그 일면을 보이는 연설인 것이다. 북한은 김일성 북한 전 국방위원장 사후 ‘김일성을 영원한 수령으로 높이 받들어 모셔야 한다.’면서 평양에 김일성 영생탑을 세우고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원년으로 하는 주체 연호를 제정한 바 있고, 김일성민족 ․ 김일성조선 ․ 태양민족 ․ 태양국이라는 신조어를 쓰면서 김일성 생일을 태양절로 정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그에 대한 믿음을 내면화시키기 위하여 육체적 생명보다 정치적 생명을 중시하도록 요구하고 있는데, 여기서 정치적 생명은 혁명에 대한 정신적 풍모에 따라 결정되며 이 정신적 풍모의 높이는 김일성에 대한 충실성의 정도에 따르는 것으로 규정되고 있다. 결국 북한 주민에게 있어 삶의 행복은 김일성이 바라고 당이 의도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위대한 어버이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넓고 깊은 은덕’을 운운하며 이에 보답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북한 주민들에게 정치적 생명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여, 물질적 만족이나 이기심의 충족보다는 집단에의 충성과 혁명에 가치를 부여하는 주체의 인생관 확립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통치하에서도 여전히 요구하게된 것이다. 이러한 삶 속에의 인식 투여는 수용소의 ‘연대처벌’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연대처벌은 수용자끼리 서로 투쟁하게 함으로써 서로를 감시하게 하거나 작업의 능률을 올리는데 그 목적이 있는 체벌이다. 이것은 하루 종일 혹사를 당하며 있는 힘을 노동에다 쓰는 수용자들의 피로를 더 부추기는 기능을 하며, 집에 돌아가는 수용자들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어 걸음조차 제대로 옮길 수 없게 만든다. 곧 개인의 휴식과 건강은 집단에의 충성과 혁명의 가치성에 짓눌려 버리고 만 것이다. 이러한 가치판단에 따른 인권침해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북한정권을 위하여 주민들이 혹사되어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 뒤에, 북한정권은 누구를 통치하겠다는 것일까?

늘 보던 이가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되어도 침묵을 지키는 수용자들, 그들은 과연 인간인가? 그들은 매일 누더기만 입는다. 그들의 옷이란, 사람의 체격에 맞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들에게 맞추어져야만 한다고 위세를 부리는 것들이다. 그들의 음식이란, 사람의 기호와 영양에 맞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들의 여건에 맞추라고 위세를 부리는 것들이다. 그들은 식량으로 하루 350g의 옥수수쌀을 배급받는데 이를 ‘옥쌀’이라 한다. 이것은 잘 익지도 않을뿐더러 소화도 힘들어서 수용소에 들어 온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설사병을 통례적으로 겪는다. 이러한 불충분한 음식으로 인하여 영양부족에서 오는 일종의 피부병인 ‘펠라그라’는 제일 잘 걸리는 병으로 활약하기도 한다. 또한 그들의 영양부족은 ‘게걸병’을 부르기도 한다. 이는 통상적인 게걸스러움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과 먹을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닥치는 대로 입에다 처넣는 병적인 증상으로 개구리 ․ 뱀 ․ 나무열매 ․ 쥐 등 먹는 것에의 종류를 가리지 않게 만든다. 이는 소름끼치는 식문화가 아닌, 살아남기 위한 죽음과의 처절한 싸움일 뿐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친구들과 함께 쥐굴을 습격하여 살찐 쥐 몇 마리와 쥐들이 모아 놓은 강냉이까지 덤으로 얻어먹어 포식했다는 기쁨을 고백하게된 것이다. 그의 기억 속의 유철호라는 인물은 쥐를 먹기 위해 집안에 쥐를 키우며 혹시나 쥐들이 달아날까 상전 모시듯 끔찍한 배려를 베풀기도 한다. 그의 별명은 쥐토벌대장, 쥐참모 등이다. 필자의 기억에서 유철호의 집안에서 친구들과 함께 쥐를 사냥한 경험은, 인간이 인류의 기원에서 최근의 선상에 있음에, 원시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야생동물처럼 사는 생활의 일면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수용소의 노래’에서 사상 기술 문화 혁명을 부르짖던 북한정권의 그 혁명에 따르는 혜택은 어디로 간 것일까? 혁명은 앞에 가 섰는데, 북한 주민의 인권은 무거워 떨쳐내고 혁명과 북한정권만이 앞으로 나아간 것인가? 하물며 그들이 부르짖는 사상 기술 문화 혁명에의 성과마저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다. 북조선이 자랑하는 김일성이 개발하였다는 ‘주체농법’은 수용소에서 하는 그 어느 노역보다도 몇 배 힘이 든 일로 여겨지고 있다. 봄에 하는 ‘농촌 지원 전투’에는 강냉이 영양단지 만들기, 강냉이 이식전투, 모내기 등이 있으며 이러한 ‘농촌 지원 전투’는 온종일 허리도 펴지 못하고 한 자리에서 앉았다 일어섰다 하는 것을 수백 번 반복하고 나면 수용자들의 눈앞은 캄캄해지고 하늘이 노래질 정도로 만든다. 인권이 침해되는 공간에서 그들의 혁명에의 행진이 거북이걸음으로 나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필자 강철환의 가족은 1963년 북한의 허위선전에 속아 북송된 재일 북송교포 가족으로서 조총련 교토지부 상공회 회장을 지냈던 할아버지가 민족반역죄로 국가안정보위부에 끌려간 후 온 가족이 1977년 8월에 함경남도 요덕군에 위치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0년간의 수감생활 끝에 출소하게 된다. 이에 북한 주민들은 “15호 관리소에서 살아나온 영웅들이군.”, “그 지긋지긋한 관리소 생활을 잘도 견뎠군.”, 등의 별의별 말을 하는데, 그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그의 가족은 추운 것도 모르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긴장하며 잔뜩 겁을 먹고 서있었다고 한다. 왠지 자꾸만 주눅이 들고 눈이 부셔서 고개를 들고 서있을 수가 없었다고 필자는 말한다. 그들의 출소하는 모습만 떠올려도 그들의 인권존중의 정도를 가늠해볼 수가 있는 것이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은 것일까? 이들을 끌고 가는 보위원들은 구체적인 이유를 말할 수 있었을까? 국가보위원들이 필자의 집에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필자의 할머니의 ‘내 탓’은 왜 나온 것이며, 언제까지 할머니의 입에 오르내릴 것인가? 이 속에 핵문제보다 더 중요한 북한의 인권문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인간학살 사태를 토로하고 북한의 현실도 인식하지 못한 채 추진되었던 햇볕정책이며 대북정책의 위상을 다시 한 번 밟고 가게 하는 외침이 있다. 히틀러 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수용소가 북한 곳곳에 만들어져 있어 인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저항 정신을 말살시켜 ‘침묵’을 고집하는 현실을 보라는 외침 말이다.

아무리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한계가 있게 마련이었다. 더구나 한 번 발생한 발진티푸스는 그 전염성이 강했다. 매일같이 한 두 아이가 고열과 함께 쓰러졌다. 우리는 이미 슬픈 감정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지 않았다. 매일같이 눈만 뜨면 얼굴을 대하고 같이 일하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죽어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소리 없는 충격을 던져주었다.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한 북한을 단적으로 보여준 말이다. 이는 그들의 인권문제로 확대해서 보는 것에 문제되지 않는다. 또한 한국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17일 EU와 미국, 일본 등이 공동 제출한 대북인권결의안이 우리나라가 찬성한 가운데 유엔총회 제3위원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있기 이전, 한국은 지난 2003년부터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3차례 연속 채택된 북한 인권규탄결의안 표결에 기권 혹은 불참했고, 지난해 총회 차원에서 처음으로 채택된 대북인권결의안 표결에서도 기권한 바 있다. 필자는 『수용소의 노래』에서 자신의 체험을 고백함에 앞서, “더 많은 국민들이 탈북자들의 수기를 읽고 우리 형제들의 아픔을 함께 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학수고대합니다.”라고 말하였다. 필자는 이 한 마디에 그동안 북한 인권문제에 무심하던 ‘반쪽 민족’을 향한 질책을 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의 질책에 동요된 것일까. 며칠 전의 대북인권결의는 반기문 전 외교통상장관이 유엔 차기사무총장으로 확정된 후 한국이 처음으로 찬성표를 던진 가운데 채택되어 더 주목되었으며, 북한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고문과 공개처형, 강제노력, 탈북자 강제송환과 처벌, 여성의 인신매매, 심각한 영양실조 등 광범위한 인권침해 사례에 대하여 강한 우려를 표하면서 이에 대한 실태조사와 북한의 인권개선 노력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북한이 그간 유엔 결의에 강하게 반발해온 데다 지난 달 북한의 핵실험 강행 이후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1718호와는 달리 구속력을 갖지 못하기에 실질적 효과를 거두기는 힘들 것이다. 다만 유엔 총회가 북한 인권에 대하여 지속적인 조취를 취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고 전 회원국의 의사가 반영됐다는 측면에서 북한 인권상황에 경종을 울리고 압박을 가하는 정치적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표면상으로 노력을 보였다는 위안으로 북한 인권문제에 관심을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평양선 요즘도 귀국자 집들이 자꾸 어디론가 없어진다고 하더군요.”
그 즈음 수용소에서는 거의 매일 새로운 사람들이 왔는데, 대부분 귀국자와 외국 유학생들이었다.
“이러다간 북송 귀국자는 다 몰살을 당하겠구나.”
“2차 대전 때 히틀러가 유태인 대학살을 시킨 것과 같은 거지요.”


기존의 우리의 무관심한 태도로 돌아간다면 계속되어 늘어나는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수용자들을 더 학대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곧,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표리부동한 두 얼굴의 야누스가 40여 년간 묵혀온 인권침해의 곰팡이로 더욱 퀴퀴하고 낡아져가 인간이 살 수 없는 공간이 될 것이다. ‘관리소’라는 명분 아래서 ‘인권침해’를 냉랭하게 가하는 paradox를 범하게 될 것이다.

E. H. Carr는 역사를 “현재와 과거 사이의 대화”라고 하였다. 곧 역사는 현재와 과거를 잇고, 나아가 미래와 현재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와 같은 것이다. 이는 과거의 역사교훈을 통해 현재 삶의 안목을 길러 계획하고, 현재의 삶을 토대로 미래의 윤택한 삶을 설계함을 말한다. 이에 우리는 동독과 서독의 통일을 통하여 끊임없는 교류와 양측의 균등한 경제 성장을 위하여 지원의 필요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의 햇볕정책은 통일의 길에 바람직하게 다가섰는가의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마치 9․11 전대미문의 사건과 같아서 이라크 파병을 꾀함에 세계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워 세계를 분열시키려는 파멸의 발상의 측면에 서있다고 하겠다. 북한에 지원되는 자원은 북한과 남한의 균등한 경제성장을 꾀하는 길이 아니라,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수용자들과 국가보위원들의 양측의 삶의 질적인 면에의 극대화를 부추긴 정책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북한 수용자들의 인권침해를 부추겼을 여지가 없지 않다고 본다. 그렇기에 우리는 북한과의 관계 면에서 북한의 현실을 바로 보아, 좀 더 신중한 대응을 해야만 한다.

멕시코의 북미자유무역협정 협상주역 중 한 사람인 루이스 데 라 카예(Luis de la calle)는 모든 나라가 “자기성찰을 하는 능력”이 필요하며, 이는 “어떠한 나라도 자신이 어디에 있고 한계가 무엇인지에 관해 엑스레이 검사를 받지 않고는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발전이라는 이룸의 차량에서 떨어진 국가는 술 취한 사람과 같아서, 다시 그 차를 얻어 타기 위해서는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볼 줄 알아야 하며, 발전은 자발성에 바탕을 둔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결정이 필요하며, 이는 자기성찰을 통해서만 시작할 수 있다. 그렇다. 남한 측의 우호적인 관계만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독재적인 정치에서 인권을 생각하는 여지를 마련하는 길은 아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자신은 물론, 북한이 걸어온 길에의 자기성찰에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간을 갖은 후에, 그들은 수십 년의 때가 더덕더덕 붙어가 마침내 썩어가기에 이르는 정치범수용소에 대한 현실자각이 필요하며 인권 존중의 필요성을 인식할 시기를 맞았다. 이제 북한정권은 수용소가 침묵으로써 키워왔던 야누스의 얼굴을 벗을 때가 되었다. 수용소가 묵묵히 지키어 오던 국가보위원들의 인권침해와, 그로 인한 두려움에 수백만의 아사자가 나옴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던 수용자들과 북한 주민들의 삼켜버리던 외침을 분출해낼 때가 되었다. 그렇게 수용소가 북한정권을 바탕으로 침묵으로써 키워온 야누스의 얼굴을 벗어, 인권침해에의 눅눅한 때를 벗을 때가 된 것이다. 이는 타국의 압박보다는 자국의 정권세력 자체에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하겠다.

잠이 들지도 않았는데 나는 자꾸만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소리도 막 질러보고 싶었다. 출소했다는 확실한 사실에 가슴은 마구 뛰었다. 참으로 희한하게도 그 순간에 나는 어머니 품에서 자던 어린시절의 환상을 보았다.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나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필자 강철환의 자신의 북한 정치범수용소 경험에 대한 마지막 고백 부분이다. 인권을 존중받는 삶에의 기쁨이 여실히 느껴진다. 이 기쁨을 북한정권이 인식하고, 이를 토대로 북한 자국에의 번영을 꾀하는 원동력이 됨을 하루빨리 깨닫고 수용소에 피 비린내가 가시는 상큼한 바람이 불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퀴퀴한 야누스의 얼굴은 쓰라린 고통을 담은 소중한 역사적 교훈으로 삼고 새롭게 일어나, 북한과 남한에의 우호적인 관계 또한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