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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아우구스테 레히너 지음, 김은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꼭두각시 인형극을 본 적이 있는가? 인형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이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힘, 그 뒤에는 인형들의 손과 발을 꽁꽁 묶은 실이 인형을 조작하는 사람들의 손가락에 걸려있다. 한 사람의 손이 2~3개의 인형을 움직이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의 손가락이 튕겨져 오를 때마다 그들의 운명에 순응하듯이 삐걱삐걱 춤을 추는 꼭두각시 인형, 사람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작은 손가락의 움직임에 온 몸을 맡기고 삐거덕 거리는 그들의 모습과, 인형을 조작하는 사람들의 모습, 이들의 주종(主從)관계를 필연이라고 고집하며 가느다랗고 연약한 부드러움 속에 고무줄같이 끈질긴 집요함을 숨겨두어 결코 놓아주지 않는 꼭두각시 인형의 운명의 줄, 여기서 나는 『일리아스』를 쫓아본다.
마치 『일리아스』 속 영웅, 군사, 백성 등 수 많은 인간들은 자신의 의지와 패기대로 여생을 살아가는 듯하나, 이는 신(神)들의 한 마디 말로 생(生)과 사(死)를 오가는 인간의 부질없는 삶과 이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자신의 생명줄을 그들의 예언에 순종하듯 맥없이 따르며, 오히려 그 운명에 대단한 사명감을 부여하여 꿋꿋이 죽음을 맞이하는 등장인물들의 태도를 갑갑하게 지켜보아야만 했다. 이는 마치 神들의 손가락이 가벼이 튕기어 나가는 순간, 아가멤논이 이끄는 그리스군과 헥토르가 이끄는 트로이군의 수많은 손과 발이 神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거대하고 웅장한 한 편의 꼭두각시 인형극의 막을 향해 초조한 마음으로 함께 달려온 기분이었다.
수많은 결투와 승리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적장의 갑주 제구를 벗겨 돌아오며, 생명을 담보로 얻었기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능력에의 증거물이라 뿌듯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만족감을, 잔인하고 냉정하게 맺은 죽음 위에 뿌려놓고 오는 그들의 모습에서 더욱 거칠고 강렬한 비극의 꼭두각시 인형극으로 치달음에 전율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인간들 자신들에 의하기 보다는 神의 조종으로 전쟁에 동참하고 있다는 생각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일리아스』의 주역인 아킬레우스 역시 헥토르와 싸워 그를 무찌르고 그의 갑주 제구를 벗겨내는 것이 자신의 생(生)을 단축시키는 것을 알면서도 무용(武勇)을 갖고 당당히 맞서나간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비참함에 神들은 각기 자신들의 소중한 인간들에게 애착을 보이며 그들의 말로에 눈물짓기도 한다. 이처럼 비참한 인간에의 삶임에도 불구하고 神들은 영원불멸의 생존 권리에 만족하지 않고 이들을 부러워했기에 이러한 전쟁을 유도한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짧은 인간의 생명줄이나, 그토록 짧기에 신들이 내린 그들의 운명에 순응하고 자신의 죽음 앞에서 꿋꿋하고 당당한 여유를 부리는 그들만의 아름다움을 말이다. 그들의 삶은 장편의 詩가 되어 우리들의 곁에 여전히 살아갈 것임을 예측했는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인간과 같이 다투고 시기하고 사랑할 줄도 아는 神들에게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베어 나온 인간의 모습이 수북하게 쌓여 감을 神, 자신들도 당황스러워 하면서 말이다. 인간을 다스린다는 神, 그들이 인간을 닮아가고 있으니 이에 더 분노하였는지도 모른다. 물론, 제우스의 막강한 힘과 여러 神들에 의한 전쟁이라고 말하고 있는 면이 없지 않으나 말이다.
『일리아스』, 이 속에는 자연과 인간을 오묘하게 대립시켜 묘사하면서 이들의 전쟁에의 비극을 더욱 더 잔인하게 그려냄에도, 가슴 깊이 퍼져오는 잔잔한 아름다움이 있다. 꼭두각시 인형이 되어 정해진 운명의 줄에 얽매여 있음에도 그들의 임무를 충실히 해내며 흥겹게 뱉어내는 그들의 詩, 그러한 역설적인 노래는 『일리아스』로부터 슬그머니 스며오는 색다른 감동일 것이다. 이러한 그들이 소극장으로 옮겨져 꼭두각시 인형들의 詩, 슬프면서도 웅장한 노래를 부르며, 과연 그들과 神은 주종(主從)관계에 갇힌 것인지, 우리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존재는 무엇인지, 자아(自我)의 부르짖음이 거대한 파동을 만들어 인간(人間)의 존재를 뒤흔들어 인류에 물음표를 던짐에 『일리아스』, 이곳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모습이 거울에 비치듯 눈앞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