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 내 집은 공간에 있지 않다고. 내집은 사람에게 있다고. 그리고 그 사람은 당신이라고. 당신이 내 집이고 내 고향이라고……. - P106

그런 데서 살다 보면 무엇이든 정붙이지 않는 버릇을 들여야 했던 것 같아. 무엇을 잃든 아쉬워하지 않는 데에 길들여지면서. 내 기억만이 그들의 유적이었지. - P105

사람들은 너무 불행해진 나머지 누구든 쉽게 괴롭혀도 되는 세상을 바라는 것 같아. - P143

왜 그런 말 있잖아.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한 그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말. 누군가를 기억하면 그 사람은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는 이야기 말이야.

만약 정보가 인격일 수 있다면,
내 기억 속의 당신도 인격일 수 있는 거야. - P150

그러니까 내가 살아 있는 한 당신은 살아 있는 거야.
그래서 나는 계속 살고자 해. 당신을 살게 하기 위해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당신을 살게 하기 위해서.
당신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명이자 흔적이 바로 나니까. 내가 당신의 유적이니까.
고마워, 내 사랑. - P151

"거기서 나와. 과거에 붙들려 있지 마. 당신은 나와 함께 있잖아. 나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야지. 같이 시간을 흘러가야지."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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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다 보면 빛의 속도로 나를 스쳐 가는 것은 온 우주고, 지구며, 내 집과 친구들이고, 나는 여기에 서 있다는 기분이 들어. 그래서 내 시간도 서는 거라고. - P15

그러니까 당신이 나를 살린 거야. 당신이 지금 어느 시대에 있든, 이미 죽었든, 살았든, 무한의 별 무리를 여행하고 있든. - P59

나는 나이를 먹었어. 하루에 하루씩, 한 달에 한 달씩, 한 해에 한 살씩, 시간을 몸에 쌓으며 살았어. 그러니까 나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야. 10년 전보다 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어. 몇백 년 전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되었어. 내일은 하루만큼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될 거야. 내년에는 또 한 해만큼 그렇게 될 거야 - P62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을 위해 쓴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글쓰기가 부드러워지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쓰는 것은, 또 한 사람을 생각하며 사는 것은 사람의 삶을 얼마나 바꾸게 될까 생각합니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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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일평생이 그런 식이었죠. 바들바들 떨면서도 제 손을 잡고 걸어갔어요. 어머니는 내가 살면서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어요. 무서워서 떨면서도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 나는 어머니를 닮고 싶었어요.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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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 맞서면서 살 수는 없어, 지연아. 그냥 피하면 돼. 그게 지혜로운 거야."

"난 다 피했어, 엄마. 그래서 이렇게 됐잖아. 내가 무슨 기분인지도 모르게 됐어. 눈물은 줄줄 흐르는데 가슴은 텅 비어서 아무 느낌도없어." - P278

"착하게 살아라, 말 곱게 해라, 울지 마라, 말대답하지 마라, 화내지 마라, 싸우지 마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그런 얘길 들어서 난 내가 화가 나도 슬퍼도 죄책감이 들어. 감정이 소화가 안 되니까 쓰레기 던지듯이 마음에 던져버리는 거야. 그때그때 못 치워서 마음이 쓰레기통이 됐어. 더럽고 냄새나고 치울 수도 없는 쓰레기가 가득 쌓였어." - P278

새비 아주머니의 시선은 증조모의 몸을 지나서, 마음을 지나서, 어쩌면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에까지 다다랐다. 그곳에서, 아직 다섯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증조모는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돌멩이를 안고서 내 동무야, 내 동무야, 말을 걸고 있다. 그런 작은 따뜻함이라도 간절해서, 하지만 사람은 너무 무서워서 증조모는 마당 구석에 쪼그려앉아서 자기 그림자를 보고 있다.

그때 자신이 누구를 부르는지도 모르고 간절히 부르던 사람이 바로 새비 아주머니였다는 사실을 증조모는 그녀의 시선 속에서 이해했다. 너레 내 목소리를 들어주었더랬지. 내가 한 음식을 먹고 맛이 있다고 이야기해주었어. 너는 내를 삼천이라고 불러주었어. 새비 너는 내를 삼천이라 불러줬었어. - P288

나는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나.

나에게, 내 인생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알고 싶지 않아서,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어둠은 거기에 있었다. - P299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자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별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깨에 기대는 사람도,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도. 구름 사이로 햇빛이 한 자락 내려오듯이 내게도 다시 그런 마음이 내려왔다는 생각을 했고, 안도했다. - P299

마음이 벅차서 ‘새야, 잠시 내려오갔어?‘ 말을 붙이면 그 새가 가지를 딛고서 아주 높고도 먼 곳으로 날아간다는 기야. 그러면 잠시 슬픈 마음이 들다가두, 그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더래. 눈물이 날 만큼 기쁘더래. - P302

하지만 왜 분노의 방향은 늘 엄마를 향해 있었을까. 엄마가 그런 굴종을 선택하도록 만든 사람들에게로는 왜 향하지 않았을까. 내가 엄마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다면, 나는 정말 엄마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내 생각처럼 당당할 수 있었을까. 나는 엄마의 자리에 나를 놓아봤고 그 질문에 분명히 답할 수 없었다. - P314

"그래. 언제든 돌아와도 돼." -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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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세상 사람들이 덜 고통받고 더 잘사는 세상을 꿈꾼다는 말을 하면서도 할머니의 발이 얼마나 부어 있는지, 가끔씩 배가 뭉칠 때마다 할머니가 얼마나 큰 두려움을 느끼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말하면서 할머니가 벌어온 돈은 아무렇지 않게 앗아갔다. 그런 그를 볼 때면 할머니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분노가 서린 웃음이었다. - P221

할마이가 돌아가시기 전에 언니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어. 할마이는 언니에게 지나간 사람이라고. 지나간 사람이 언니 발목을 잡을 수 없다고. - P222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할머니는 알았다. 대구에 있는 가족과 할머니를 멀어지게 한 건 시간과 거리만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대구를 떠난 순간부터 할머니와 대구 가족 사이에는 어떤 척력이 작용했다. 아무리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더라도 매일매일 서로에게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힘이 있었다. - P225

"어떻게 살았어요. 할머니? 그런 일을 겪고 어떻게 살 수 있었어요?"

나는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흘렸다.

"언젠가 이 일이 아무것도 아닌 날이 올 거야.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 그럴 거야." - P230

귀리는 차가웠다. 나는 귀리가 사라진 귀리의 몸을 오래도록 쓰다듬었다. 결과가 이럴 줄 알았다면 입원 같은 건 절대 시키지 않았을 텐데, 적어도 어젯밤에는 데려왔을 텐데. 미안해. 나는 소리 내어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 - P230

귀리가 마지막에 외롭기만 했다고 생각하지 마." - P232

시간은 얼어붙은 강물이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정해진 걸까. 귀리가 결국 병원에 입원한 채로 죽은 건 내가 귀리를 만나기 전부터 ‘완료‘된 일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마음이 어느 정도는 편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믿을수가 없었다. - P232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야, 그저 진심어린 사과만을 바랄 뿐이야,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랄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연기라도 좋으니 미안한 시늉이라도 해주면 좋겠다고 애처롭게 바라는 사람과, 그런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상처도 주지 않았으리라고 체념하는 사람과, 다시는 예전처럼 잠들 수 없는 사람과, 왜 저렇게까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내? 라는 말을 듣는 사람과, 결국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벽을 마주한 사람과, 여럿이 모여 즐겁게 떠드는 술자리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음을 쏟아내 모두를 당황하게 하는 사람이 그 나라에 살고 있을 것이다. - P252

-새비 너랑 있는 이 시간이 아깝다.

새비 아주머니는 한동안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갔어. 기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갔어? - P258

‘새비 아주머니는 그날 바다에서 놀았다.‘ 할머니는 그날의 일을 이 한 문장으로 기억했다. 새비 아주머니도, 바다도, 놀다, 라는 말도 그날에 다 들어 있었다. 모두 할머니가 좋아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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