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햇빛에 비친 은빛 베일과 그늘진 곳의 삼베 같은 거미줄을 보며 결혼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누군가는 저렇게 빛나는 베일을 쓰고 결혼을 하고 누군가는 저토록 날긋한 삼베를 수의처럼 덮고 죽는지도 모르지. 아니, 어쩌면 그 여자는...... 결혼할 때조차 저 삼베 거미줄을 쓰고 했는지도 모르지. 어쩌면 나도......
내가 그 수박을 먹은 기억은 없다. 그 비싼 수박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쭈박, 쭈박, 하고 울면서 내가 원한 건 무엇이었을까. 어처구니없는 걸 요구해서 상대를 끝내 시험에 들게 해 그걸 얻어내고 말겠다는, 결국 이겨먹고 말겠다는 그 악착한 마음은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선물을 헌신짝 버리듯 쉽게 잊고 그 선물을 준 사람마저 이겨먹었으니까, 먹어버리듯 이겼으니까 까맣게 잊고 마는 그 잔혹한 무심함은.
생명의 어두운 결정체들이 점점이 박히고 누런 고치들이 매달려 흔들리는 검은 그물은 그녀 자신이 내뿜었지만 이미 그녀 자신을 가두는 거대한 망이 된다. 이윽고 그녀 스스로 고치가 되고 캄캄한 밤이 그녀를 덮는다.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사람은 나와 춤추면서 넌 거미가 아니라고, 너는 지금 스스로에게 덫을 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작고 딱딱한 결정체로 만족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는 더 풍성하고 생동적인 삶을 욕망할 수 있다고, 이 그물에서 도망치라고 말해주었을까. 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그 뜻을 알아채고 울었을까. 수박 앞에서가 아니라 일기 상자 앞에서, 두 겹의 차원이 동일한 무늬로 만나는 날 숲속 식당에 가자는 편지를 읽고 내가 울 수도 있었을까.
어둠이 내리고 잿빛 삼베 거미줄이 내 위에 수의처럼 덮여도 나는 더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기억이 나를 타인처럼, 관객처럼 만든 게 아니라 비로소 나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는 걸 아니까.
자신의 선택과 의지와 충동을 긍정하고 그것을 밀고 나가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까? 함부로 던져진 질문들과 함께 우리에게 끼얹어진 불안이나 모욕이 우리의 힘을 빼앗고 위축시키는 장면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발명해낼 수 있을까?
준희와 정원이 발견하고 다듬어 만들어낸 ‘사슴벌레식 문답‘이란, 수군거리며 주눅들게 만드는 질문의 덫에 걸려들지 않는 방법,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고 긍정하고 실천하며 밀어 붙이는 방법, 쓰고 싶은 소설을 쓰고 하고 싶은 연극을 하고 강철로 단련되어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실용적인 방법이지 않을까.
마리아에 대한 성당 사람들의 평가와 성당 사람들과 자신에 대한 베르타의 평가가 계속해서 다시 쓰여졌던 것처럼 우리들도 저 〈태극기〉 를 둘러싼 전혀 고귀하지를 않은 음조들을 다른 가락으로 바꿔 불러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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