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옥이 너는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천하다고 생각하니?
할머니가 고개를 젓자 아저씨는 진짜 천함은 인간을 그런 식으로 천하다고 말하는 바로 그 입에 있다고 했다. - P111

그렇게 죽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희자 아바이가 말했어. 조선 사람이고 일본 사람이고 중국 사람이고 간에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사람은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다고. 사람이 저지른 일이야. 사람이 저지른 일이야. - P123

희자 어마이, 내레 더이상 기도를 못하겠어. 천주님, 그때 뭐하고 계셨어. 어린아이들, 죄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찢겨 죽어가는 동안 뭐하고 계셨더랬어.
....... 전지전능한 천주님이 왜 손을 놓고 계신 기야. 나는 슬퍼만 하는 천주님께 속죄하고 싶지 않아. 천주님 앞에서 내 탓이오, 내탓이오, 말하고 싶지 않아. 천주님이 정말 계신다면 그때 뭐하고 계셨느냐고 따지고 들고 싶어. 예전처럼 무릎 꿇고 천주님, 천주님 감사합니다. 말하고 싶지 않아. 기래, 나를 살려주셨지. 기래서 감사하다고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 목숨은 뭐가 되나. - P124

삼천아, 내 너한테 허풍을 떨었다. 희자 아바이가 곁에 있는 시간이 짧아도 괜찮다고 했지. 아예 다시 보지도 못하고 헤어지는 것보다 낫다면서. 그런데 아니야. 희자 아바이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는 거이 내가 할 짓이 아니구나. 지옥이 있대두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거야, 삼천아 내가 허풍을 떨어도 심하게 떨었어. 난 이걸 버틸 수가 없다. 버틸 수가 없어.

삼천아, 희자 아바이를 기억해줘. 그게 희자 아바이 유언이다. 희자 아바이를 기억해줘, 삼천아. - P125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에게는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게." - P134

"넌 이보다 잘 살 수 있는 애였어. 똑똑하고 밝고, 너 같은 애가 내 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어."

"지금 내가 사는 모습이 그렇게 엄마 마음에 안 차?" - P135

자식은 엄마가 전시할 기념품이 아니야.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소리치면서도, 엄마의 바람이 단지 사람들에게 딸을 전시하고 싶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아팠다. - P136

예전처럼 며칠씩 서로 말도 붙이지 않을 정도로 신경전을 벌일 만한 일이 우리에게는 더이상 없었다. 큰불이 나기 전에 꺼버렸고, 상대에게 작은 불씨를 던졌다는 것에 문득 무안해지기도 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그건 우리가 그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가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우리는 눈빛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이상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정말 끝이 날까봐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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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지나가는 길에 맞았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내 남편이 이유도 모르는 병으로 죽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혼자 슬퍼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부정 탄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런 식으로, 일어난 일을 평가하지 말고 저항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게 사는 법이라고. - P55

그녀에게는 희망이라는 싹이 있었다. 그건 아무리 뽑아내도 잡초처럼 퍼져나가서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희망을 지배할 수 없었다. 희망이 끌고 가면 그곳이 가시덤불이라도 그저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 P56

아이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아이가 작은 몸과 마음으로 눈치를 살피느라 마음껏 울어보지도 못하는 게 아닐지 근심했다. 그녀의 사랑은 그 근심에서 자랐다.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웃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이 아이를 마음으로 귀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어미의 본능적 사랑 같은 것은 아닐지 몰라도. - P74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 P82

내가 누리는 특권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나는 침묵해야 했다. 내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라며 느꼈던 외로움에 대해서, …… 이해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는 감정에는 눈길을 주지 않아야 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으니까.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그 껍데기들을 다 치우고 나니 그제야 내가 보였다. - P85

나는 항상 나를 몰아세우던 목소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나만큼 나를 잔인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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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개새끼라고 하나. 개가 사람한테 너무 잘해줘서 그런 거 아닌가. 아무 조건도 없이 잘해주니까, 때려도 피하지 않고 꼬리를 흔드니까, 복종하니까, 좋아하니까 그걸 도리어 우습게 보고 경멸하는 게 아닐까. 그런 게 사람 아닐까. 나는 그 생각을 하며 개새끼라는 단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나 자신이 개새끼 같았다. - P13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 P14

재촉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잖아. 아무도 겨울 밭을 억지로 갈진 않잖아.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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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인간으로서 추구할 수 있는 모든 가치는, 추구할수록 고갈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영역에까지 퍼져나간다고 생각한다. - P263

나는 할머니의 말대로 글을 술술 잘 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 말에 아니라고 답하지는 않았다. 할머니와 나의 삶이 멀어지면서 할머니가 내게 할 수 있는 말이 한정되어 있다는 걸 알아서였다. 그때보다 적게 말하면서도 할머니는 내게 그때와 같은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글쓰기가 나의 거의 모든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런 내 삶을 응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그 마음을 애써 그러쥐고 있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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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망각과 왜곡에 의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가해자들에게는 여지를 주는 방식으로, 피해자들에게는 무력감과 차별을 안기는 방식으로. - P213

전쟁범죄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 그러한 노력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행동이었다. 전쟁범죄를 묻어두고 잘잘못을 따지지 않았다면, 전쟁범죄 가담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면, 아우슈비츠는 SS 대원의 말대로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는‘ 상처받은 사람들의 주장만으로 여겨졌을 테니까. 그런 식으로 나치의 범죄는 그들의 손을 떠난 뒤에도 철저하게 완성되었을 것이다. - P217

신음조차 낼 수 없는 침묵・・・・・・ 그는 그 침묵 속에서 나치가 인간을 파괴했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 상태는 아우슈비츠를 벗어나 자유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장면을 읽으며 나는 화학자였던 프리모 레비가 작가로 다시 태어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기억하기를 선택했다. 기억하고 말함으로써 침묵을 깨뜨리기로. - P221

‘무의미한 고통‘의 목표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갖가지 방식으로 인간에게 고통을 안김으로써 최종적으로는 인간의 존엄을 박탈하려는 시도였다. - P221

나는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 사회의 인간성에 대한 척도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곧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라고 말이다. - P237

기억한다는 건 희생자 한 명 한 명의 삶에 대해 계속해서 듣는 일이다. 그 목소리를 판단하거나 규정하거나 멋대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듣는 것. - P244

그 시간 동안 우리가 경험한 것은 목숨이, 삶이 사라진 자리에 응당 진실과 사죄가 놓이는 모습이 아니었다. 책임지지 않기 위해서, 고통을 나누고 싶지 않아서, 보고 싶지 않아서, 들어줄 인내심이 없어서, 혹은 깊은 고통을 겪은 사람들을 무참하게 대하는 사회적인 관성으로 저지른 폭력이었다. 인간을 인간답게 대우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비인간성을 우리는 똑똑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 P245

너의 고통은 나의 삶과 무관하다고 가르치는 세상 속에서도 그렇지 못한, 그럴 수 없는 사람들과 어떤 언어로도 분명히 설명될 수 없는 사랑이 존재했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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