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일평생이 그런 식이었죠. 바들바들 떨면서도 제 손을 잡고 걸어갔어요. 어머니는 내가 살면서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어요. 무서워서 떨면서도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 나는 어머니를 닮고 싶었어요.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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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 맞서면서 살 수는 없어, 지연아. 그냥 피하면 돼. 그게 지혜로운 거야."

"난 다 피했어, 엄마. 그래서 이렇게 됐잖아. 내가 무슨 기분인지도 모르게 됐어. 눈물은 줄줄 흐르는데 가슴은 텅 비어서 아무 느낌도없어." - P278

"착하게 살아라, 말 곱게 해라, 울지 마라, 말대답하지 마라, 화내지 마라, 싸우지 마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그런 얘길 들어서 난 내가 화가 나도 슬퍼도 죄책감이 들어. 감정이 소화가 안 되니까 쓰레기 던지듯이 마음에 던져버리는 거야. 그때그때 못 치워서 마음이 쓰레기통이 됐어. 더럽고 냄새나고 치울 수도 없는 쓰레기가 가득 쌓였어." - P278

새비 아주머니의 시선은 증조모의 몸을 지나서, 마음을 지나서, 어쩌면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에까지 다다랐다. 그곳에서, 아직 다섯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증조모는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돌멩이를 안고서 내 동무야, 내 동무야, 말을 걸고 있다. 그런 작은 따뜻함이라도 간절해서, 하지만 사람은 너무 무서워서 증조모는 마당 구석에 쪼그려앉아서 자기 그림자를 보고 있다.

그때 자신이 누구를 부르는지도 모르고 간절히 부르던 사람이 바로 새비 아주머니였다는 사실을 증조모는 그녀의 시선 속에서 이해했다. 너레 내 목소리를 들어주었더랬지. 내가 한 음식을 먹고 맛이 있다고 이야기해주었어. 너는 내를 삼천이라고 불러주었어. 새비 너는 내를 삼천이라 불러줬었어. - P288

나는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나.

나에게, 내 인생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알고 싶지 않아서,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어둠은 거기에 있었다. - P299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자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별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깨에 기대는 사람도,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도. 구름 사이로 햇빛이 한 자락 내려오듯이 내게도 다시 그런 마음이 내려왔다는 생각을 했고, 안도했다. - P299

마음이 벅차서 ‘새야, 잠시 내려오갔어?‘ 말을 붙이면 그 새가 가지를 딛고서 아주 높고도 먼 곳으로 날아간다는 기야. 그러면 잠시 슬픈 마음이 들다가두, 그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더래. 눈물이 날 만큼 기쁘더래. - P302

하지만 왜 분노의 방향은 늘 엄마를 향해 있었을까. 엄마가 그런 굴종을 선택하도록 만든 사람들에게로는 왜 향하지 않았을까. 내가 엄마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다면, 나는 정말 엄마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내 생각처럼 당당할 수 있었을까. 나는 엄마의 자리에 나를 놓아봤고 그 질문에 분명히 답할 수 없었다. - P314

"그래. 언제든 돌아와도 돼." -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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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세상 사람들이 덜 고통받고 더 잘사는 세상을 꿈꾼다는 말을 하면서도 할머니의 발이 얼마나 부어 있는지, 가끔씩 배가 뭉칠 때마다 할머니가 얼마나 큰 두려움을 느끼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말하면서 할머니가 벌어온 돈은 아무렇지 않게 앗아갔다. 그런 그를 볼 때면 할머니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분노가 서린 웃음이었다. - P221

할마이가 돌아가시기 전에 언니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어. 할마이는 언니에게 지나간 사람이라고. 지나간 사람이 언니 발목을 잡을 수 없다고. - P222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할머니는 알았다. 대구에 있는 가족과 할머니를 멀어지게 한 건 시간과 거리만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대구를 떠난 순간부터 할머니와 대구 가족 사이에는 어떤 척력이 작용했다. 아무리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더라도 매일매일 서로에게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힘이 있었다. - P225

"어떻게 살았어요. 할머니? 그런 일을 겪고 어떻게 살 수 있었어요?"

나는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흘렸다.

"언젠가 이 일이 아무것도 아닌 날이 올 거야.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 그럴 거야." - P230

귀리는 차가웠다. 나는 귀리가 사라진 귀리의 몸을 오래도록 쓰다듬었다. 결과가 이럴 줄 알았다면 입원 같은 건 절대 시키지 않았을 텐데, 적어도 어젯밤에는 데려왔을 텐데. 미안해. 나는 소리 내어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 - P230

귀리가 마지막에 외롭기만 했다고 생각하지 마." - P232

시간은 얼어붙은 강물이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정해진 걸까. 귀리가 결국 병원에 입원한 채로 죽은 건 내가 귀리를 만나기 전부터 ‘완료‘된 일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마음이 어느 정도는 편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믿을수가 없었다. - P232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야, 그저 진심어린 사과만을 바랄 뿐이야,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랄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연기라도 좋으니 미안한 시늉이라도 해주면 좋겠다고 애처롭게 바라는 사람과, 그런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상처도 주지 않았으리라고 체념하는 사람과, 다시는 예전처럼 잠들 수 없는 사람과, 왜 저렇게까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내? 라는 말을 듣는 사람과, 결국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벽을 마주한 사람과, 여럿이 모여 즐겁게 떠드는 술자리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음을 쏟아내 모두를 당황하게 하는 사람이 그 나라에 살고 있을 것이다. - P252

-새비 너랑 있는 이 시간이 아깝다.

새비 아주머니는 한동안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갔어. 기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갔어? - P258

‘새비 아주머니는 그날 바다에서 놀았다.‘ 할머니는 그날의 일을 이 한 문장으로 기억했다. 새비 아주머니도, 바다도, 놀다, 라는 말도 그날에 다 들어 있었다. 모두 할머니가 좋아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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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은 그런 환경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겨우 한숨 돌렸을 때, 이제는 좀 살아볼 만한가보다 생각할 때. - P199

돌이켜보면 살면서 후회되는 일은 늘 그런 것이었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함께 웃고 즐거워하고 따뜻함을 나누는 시간을 그대로 누리지 못하고 불안에 떨었던 것 말이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있었으니까. 아무리 불안에 떤다고 해고, 좋은 순간을 그대로 누리지 않으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으니까.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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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이 나더라고.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면 세상에 엄마가 없다는 게 진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계속 맴돌았지. 옛날 사람들 말이 맞아. 딸의 곡성은 저승까지 들린다고…… 그렇게 한 해를 괴롭게 지내다가 네가 놀러왔을 때 얼마나 반갑고 좋았던지 몰라. 세상에는 끝나는 것들만있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너를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겠더라. - P168

지금 너도 남몰래 울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할머니의 말이 내게 꼭 그렇게 들렸다. 끝나는 것들만 생각하지 마. - P168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겪은 사람 앞에서 나의 진실을 떠벌리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엄마의 고통 앞에서 나의 진실은 가치가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엄마의 불행에 나의 불행을 견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거짓말을 했다. 괜찮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잘 자고 잘 먹고 있다고, 문제가 없다고. 나는 언제나 잘 웃는 아이였고, 자라서는 잘 웃는어른이 됐다. 마음속으로 울고 있을 때도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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