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세상 사람들이 덜 고통받고 더 잘사는 세상을 꿈꾼다는 말을 하면서도 할머니의 발이 얼마나 부어 있는지, 가끔씩 배가 뭉칠 때마다 할머니가 얼마나 큰 두려움을 느끼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말하면서 할머니가 벌어온 돈은 아무렇지 않게 앗아갔다. 그런 그를 볼 때면 할머니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분노가 서린 웃음이었다. - P221

할마이가 돌아가시기 전에 언니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어. 할마이는 언니에게 지나간 사람이라고. 지나간 사람이 언니 발목을 잡을 수 없다고. - P222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할머니는 알았다. 대구에 있는 가족과 할머니를 멀어지게 한 건 시간과 거리만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대구를 떠난 순간부터 할머니와 대구 가족 사이에는 어떤 척력이 작용했다. 아무리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더라도 매일매일 서로에게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힘이 있었다. - P225

"어떻게 살았어요. 할머니? 그런 일을 겪고 어떻게 살 수 있었어요?"

나는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흘렸다.

"언젠가 이 일이 아무것도 아닌 날이 올 거야.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 그럴 거야." - P230

귀리는 차가웠다. 나는 귀리가 사라진 귀리의 몸을 오래도록 쓰다듬었다. 결과가 이럴 줄 알았다면 입원 같은 건 절대 시키지 않았을 텐데, 적어도 어젯밤에는 데려왔을 텐데. 미안해. 나는 소리 내어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 - P230

귀리가 마지막에 외롭기만 했다고 생각하지 마." - P232

시간은 얼어붙은 강물이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정해진 걸까. 귀리가 결국 병원에 입원한 채로 죽은 건 내가 귀리를 만나기 전부터 ‘완료‘된 일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마음이 어느 정도는 편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믿을수가 없었다. - P232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야, 그저 진심어린 사과만을 바랄 뿐이야,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랄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연기라도 좋으니 미안한 시늉이라도 해주면 좋겠다고 애처롭게 바라는 사람과, 그런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상처도 주지 않았으리라고 체념하는 사람과, 다시는 예전처럼 잠들 수 없는 사람과, 왜 저렇게까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내? 라는 말을 듣는 사람과, 결국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벽을 마주한 사람과, 여럿이 모여 즐겁게 떠드는 술자리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음을 쏟아내 모두를 당황하게 하는 사람이 그 나라에 살고 있을 것이다. - P252

-새비 너랑 있는 이 시간이 아깝다.

새비 아주머니는 한동안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갔어. 기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갔어? - P258

‘새비 아주머니는 그날 바다에서 놀았다.‘ 할머니는 그날의 일을 이 한 문장으로 기억했다. 새비 아주머니도, 바다도, 놀다, 라는 말도 그날에 다 들어 있었다. 모두 할머니가 좋아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 P25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