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밤이 오고 마차가 도착하리라. 나에게 주어진 산들바람을 즐기고, 그렇게 즐길 수 있도록 주어진 내 영혼을 즐길 뿐 더이상 묻지도 찾지도 않는다. - P14

인생과 같은 거리에 살되 주소는 다른 예술. 나를 삶에서 해방시켜주지만 산다는 것 자체에서 해방시켜주지는 못하고, 인생과 마찬가지로 지루하기 짝이 없으며, 단지 다른 장소에 있을 뿐인 예술. - P24

나는 형형색색의 실타래를 풀듯이 나를 풀어내거나, 아이들이 손가락에 실을 걸치고 주고받는 실뜨기놀이를 하듯 나 자신의 형상을 만든다. 다만 내 엄지손가락을 움직이며 실의 고리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할 뿐이다. - P27

내가 쓰는 글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의 글 덕분에 상처받은 슬픈 영혼이 잠시 시름을 잊을 수도 있으리라. 그것으로 충분하고, 혹시 충분하지 않다 해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 인생사 모든 것이 다 그러하듯. - P29

원하진 않았지만 내가 타고난 감수성의 혼란스러운 밑바닥에 있는 것들의 총체가 바로 나라는 존재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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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게 다 사라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은 매 순간이 ‘첫‘이다. 안나와 경선에게도 첫 순간은 수없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첫‘에 대한 기억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최근‘과 ‘우리의 다음‘이 되기도 한다. - P357

높기도 하지만 동시에 멀기도 한 곳들. 그곳에는 안나가 뛰어들어야만 했고 뛰어내리는 것을 받아들여야했던 순간들이 남겨져 있을 것이다. 그때 안나의 곁에 있었던 존재는 안나가 날아야 할 허공이었을까. 하지만 안나는 뛰어내릴 수 없었다. 자신의 생에서 한 번도 어딘가를 향해 뛰어내려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 P372

한 사람의 몸안에는 수많은 장소와 시간이 들어 있다. 몸은 기쁨과 고통과 욕망과 상실의 부화장이고 사랑의 꿈과 왜곡을 간직한 도서관, 마지막 삶이 거처할 최후의 집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재로 사라진다. 개체의 시간을 끝내고 무한에 섞여드는 여정이다. - P373

제가 말하는 용감하다는 단어는 그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끊임없는 초월이라는 의미입니다. - P373

우리는 하나의 삶을 여러 번 반복하며 사는 건지도 모른다. 현재가 최근이지만 가장 오래된 날이듯이. 언젠가의 나에게는 첫 순간이 되듯이. - 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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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꿈꾸고 상상할 게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쯤 기분이 가벼워지고, 그 가벼움으로 약간 더 걸을 수 있게 된다. - P316

어쨌거나 오래 만난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조금씩 간격이 멀어지면서 마치 수채화 속 원경처럼 서로를 흐리고 부드러운 윤곽으로 보게 된다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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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저런 모순과 오류를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고 또 받아들이는 걸까. 다른 아이들은 쉽게 수긍하는 어른들의 규율이 나는 왜 이해가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좀 이상한 것일까. 그런 식의 답답함과 혼란을 남들과는 다른 이상한 사람과 이상한 이야기들이 잔뜩 나오는 책에서 해소할 수 있었다. - P243

"그래. 누군가가 기억하면 그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 거지." - P247

매혹은 사라지고 사랑은 개조되며, 삶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은 죽음을 찾아간다. - P255

"우리의 첫, 아스팔트라. 내 인생 최초의 포장도로네" - P268

삶이란 그처럼 의미가 다른 여러 개의 시간이 겹쳐져 흘러가는 게 아닐까. 몸의 일상은 현실의 시간대에서 변해가지만, 언젠가 포착한 적 있었던 꿈과 이상의 시간은 그 나름의 도착지를 향해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 마지막까지 품고 있는 시원이나 본향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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