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결함을 모든 건반에조금씩 떠안겨 일반인의 귀에는 어긋남이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절충하는 방식이 바로 평균율이다. 열두 개의 건반이 결함을 조금씩 나눠 가졌기 때문에 각각의 화음은 순정률만큼 완벽하진 않지만, 모든 음이 무난히 좋게 들린다. - P194

조율의 근간은 정확한 산술이지만 이 불확실성을 수용할 때에야 비로소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 P194

문득, 수민은 자신이 이런 순간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술의 과정에 존재하는 사소한 실책의 순간들을 말이다. 원고의 유려한 문장들 사이에서 ‘배게‘라고 적힌 단어를 발견해 ‘베개‘라고 고쳐 넣을 때, 혹은 지금처럼 엄한 선생님 앞에서 이실직고하는 학생 같은 어리숙한 표정의 피아니스트를 만났을 때, 수민은 자신이 이들 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좋았다. - P201

마치 어떤 문은 애쓰지 않아도, 살짝 미는 것만으로도 가볍게 열린다는 사실을 알려주듯이. 수민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너그러운 세계가, 고치고 또 고쳐 쓰는 것이 소중한 과정으로 여겨지는 오래되고도 낯선 세계가 아주 가까이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듯이. - P202

삶을 지속하는 힘은 거창한 미래에 대한 기대 따위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힘은 스스로가 아주 평범한 존재라는 것에서, 그리고 그 평범한 모두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몫의 눈더미를 덤덤히 치우는 중이라는 엄연한 진실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소설을쓰며 생각했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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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머지않아 그 모든게 추억이 되었다. - P141

소나타든 협주곡이든 관현악곡이든 대체로 모든 곡들은 결국 주제부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반복의 핵심은 반복되는 멜로디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에 놓인 기나긴 음악적 여정에 있다는 점에서, 그 결과 동일한 두 멜로디가 전혀 다른 해석을 지니게 된다는 점에서 수민은 음악의 형식이 인생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믿었다. - P156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이 지나간 지금, 수민은 이제 자신 앞에 놓인 구덩이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안에 던져 넣어야할 것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수민은 그중 가장 먼저 버리게 될 것을 생각했다.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구덩이를 보며 그것이 구덩이가 아니라 울창한 숲 한가운데 기적처럼 드리운 빛의 자리라고 믿었던 과거의 자신이었다. - P160

그해 바다를 생각하면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슬픔은 어디서 이렇게 끝없이 밀려오나.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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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민은 비로소 깨달았다. 어린 시절 자신이 끔찍이 싫어했던 불행의 냄새가 사실은 생존의 냄새였다는 걸 말이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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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민은 반복되는 좌절을 통해 삶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기대를 저버리는 일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기대감은 탁월한 적응력을 지닌 자생식물처럼 가슴 한편에서 끈질기게 싹을 틔웠다. - P55

우리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떠올리면 다른 문제들도 덩달아 별일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오늘처럼 반갑게 눈이 내리는 순간에도 생각났다. 그 글귀가 들뜨지 말라고, 헛되이 기대하지도 말라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엄정한 과학적 진실은 좋음으로도 나쁨으로도 귀결되지 않는다. 수민에겐 그 점이 의지가 되었다. - P58

수민은 오늘 아침 밥알처럼 부풀었던 마음의 정체가 다름 아닌 슬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수민이 오랫동안 공들여 구성한 세계가 무너지고 난 자리에 생겨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슬픔은 기대나 희망의 반대말도, 포기나 좌절의 표현도 아니었다. 단지 슬픔 그 자체로 수민 안에 태어나 마음속 어둠을 밝히는 무언가였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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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만 보고 있으면 소리가 들리겠습니까? 울림은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잘 들리는 법입니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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