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말로 인간이 얼마나 세상을 왜곡된 형태로 지각하는지 보여주는 증거인걸."
노파는 다시 콩 하나를 끄집어내어 이빨이 없는 입으로 오물거리며 말했다.
"망막에 맺힌 상은 평면이야. 우리가 보는 세상도 평면이지. 입체를 평면으로 보다니 그런 왜곡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우리는 평면에 색깔과 그림자만 적절히 배치해도 원근감과 깊이를 느끼지."

하지만 또 어찌 알겠는가? 그의 하늘에는 다른 것이 떠 있을지. 그들의 귀에는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가 들리며 별들이 공명하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릴지. 지구의 자기장이 흐름을 바꾸는 소리가 들리며 우주선(線)과 자외선이 지표로 쏟아지는 모습이 보일지. 인류가 수만 년의 역사 동안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일상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을지. 그가 보는 내 모습이 물에 비친 내 모습과 완전히 다른 형상을 하며, 그의 귀에는 내가 듣지 못하는 내 목소리가 들릴지.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며 슬픔에 젖는 줄을 그는 또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가 서로 다른 우주에 살고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알지 못하건만. 서로의 그림자를 사랑하건만 그 실체를 알지 못하고,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다른 차원에 걸쳐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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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얼마나 많은 이들이 땅 밑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내었고, 또 얼마나 여러 번 두려움에 도로 덮어버렸을까? 그리고 또 덮은 채로 잊어버렸을까? 우리에겐 기회가 있을까? 나는 이 지혜를 지상으로 전할 수 있을까?

─ 내려가라.

라고.
땅 밑에, ‘모든 것’이, ‘만물과 무한한 시간과 공간’이 있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더 내려갈 수 있다고.

입으로 뱉은 말은 힘을 가진다. 아무리 오래 생각했어도 머릿속에 있는 동안에는 되돌아갈 여지가 있다. 하지만 말한 후에는 모든 것이 변한다.

하지만 무슨 특별한 일이겠는가. 비버도 댐을 쌓고 벌과 개미도 정교한 건축물을 짓는다. 고래와 새는 성부와 후렴구가 있는 노래를 하고 곤충들은 지배계급과 군사계급, 노동계급이 있는 완벽한 집단 사회를 이룬다. 인간의 특이한 행동은 지성에 대한 아무 증거도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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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문제도 뭔가 이유가 있어서 생겨나지 않았을까 한다. 어떤 환경적인 문제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증상을 가진 사람이 이토록 많을 리가 있겠느냐.

그래서 그들은 이런 문장을 선택한 것이다. 5만 년이 지나도, 10만 년이 지나도 진실인 것은 오직 ‘지구의 하늘에 별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뿐이기 때문에.

언젠가 네가 내 생각을 받아들여줄 날이 온다면, 부디 너도 내게 잘 자라고 인사해주렴.

사랑하는 누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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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엔 인류를 중력에서 끌어내고 싶다는 욕구가 추상 미술의 역사 전체를 가로지르는 것 같아. 아주 오래된 신화들에 양분을 제공했던 욕구이기도 하지.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 전설이라든지, 전령신 헤르메스라든지……바로 그거야, 추상이란 건 비물질 속으로, 우리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지상의 무거운 조건 너머로 날아가는 로켓 엔진이랄까. - P466

20세기 초에는 여전히 각자가, 특히 여자들이 자기 역할의 범주를 넘어서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한나 회흐의 이 작품이 알려주는 것도 바로 그거야. 애초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는 건 사실 아무것도 없다는 것. 게다가 균형이 안 맞으면뭐 어때. 우리 모두가 똑같다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똑같은 균형을 지녔다면, 얼마나 슬픈 노릇이겠니! 한나 회흐는 우리에게 그걸 말해주는 거야. 불균형이 필요하다고. 왜냐면 그 또한 자기 자신, 자기만의 독특성을 지닌 존재가 된다는 것이니까. - P478

날 죽이지 못하는 건 날 더 강하게 해준다. - P488

‘아! 삶의 실타래를 되감아 언어의 영화 한 편 만들어볼 수 있다면! 첫 단어, 첫 문장, 죽음, 아름답다, 사랑해나 설상가상이 처음으로 발음된 순간을! 아! 내가 처음으로 의문문을 사용했던 때는 언제였을까?‘ 앙리는 애가 탔다. 또한 삶에서는 감탄문이 평서문보다 먼저 나올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채 분절되지 않은 채 들끓는 상태에서 솟구치는 외침들로부터 모든 게 시작된다. 그의 정신이 번득였다. - P502

그에게 미국이란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미국이었지. 저 작품을 보렴. 폴록에겐 리듬이 있고, 박자가 있어. 거의 춤을 춘달까. 그는 술을 통해서 자신을 벗어나 정신이 나간 상태를 맛보았단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에는 샤머니즘적인 성격이 있어. 폴록에 따르면, 정신은 여행을 해야 해. 다른 차원을, 다른 영역을 발견해야 하고 자연 속에, 동물 속에, 물질 속에 녹아들어야 해. 그토록 소리 높여 주장했던 사람들 말대로 폴록의 예술이 전형적으로 미국적이라면, 미국 원주민에게서 그 원천과 표현법을 찾아야 할 거야. - P507

삶에서 나아간다는 건, 그처럼 예고 없이 맞닥뜨리는 상처들, 잘 드러나지 않는 만큼 존재의 더 깊은 심연에 트라우마를 입히는 상처들을 헤집어 밝히는 고약한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 P511

"영점에서 다시 시작하자, 영점에서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자......모든 걸 다시 세우기 위해, 영점에서 다시 시작하자."

"왜냐면 무엇도 난파되지 않고 무엇도 그저 잿더미로 돌아가지 않기에. 그리고 대지가 열매에 이르는 것을 볼 줄 아는 이는 모두 잃는다 한들 실패로 동요하는 법이 없기에." - P538

누구에게든 어린 시절이란 무수한 오해, 불만, 트라우마로 이뤄져있기 때문이지. 그런 경험들이 꼭 특별나게 드라마틱하거나 폭력적이란 법은 없어. 대부분의 경우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 하지만 잘 감지되지 않는 만큼 더 무섭지. 말할 수 없다는 금기가 그것들을 감싸고 있으니까. 루이즈 부르주아는 네 나이 때 자기 집에서 고통스러운 뭔가와 맞닥뜨렸어. 그 자체는 전혀 심각할 것 없는 일이었지만, 치유되지 않는 상흔을 남기기엔 충분히 힘든 뭔가였지. - P557

암흑 속에서도 세계의 심연들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존재는 대낮의 빛 아래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 - P568

"하비, 그러니까 지금 하비의 말은 이별이란 것이, 그게・・・・・・ 그러니까......"
"...... 새로운 삶, 붙잡아야 할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는 거야, 모나야. ‘출발 départ‘이라는 말이 떠남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렴. 출발이란 하나의 끝, 동시에 하나의 시작이야. - P570

삶에서 남는 건 물건들, 무진장 많은 물건인데, 그 물건들 각각에도 삶이 있지. 그것들은 너무 닳고, 부서지고, 조각나서 때로는 이름조차 사라진 자잘한 물건들이야. 중학생용 잉크병 하나, 네잎클로버 하나에서도 얼마든지 우주 전체를 꿈꿀 수 있어. - P580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직관을 통해 모나는 아무리 작은 물질 단위라도 거기에 존재가 담겨 있음을, 그것이 무한한 존재로 넘쳐난다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작은 물질 단위라도 그 위로 지나간 모든 시선, 그것이 불러일으킨 모든 감각, 그것을 스쳐간 모든 공기, 그것을 둘러쌌던 모든 음파, 그것이 거쳐온 변신과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지속이 그 안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물질 단위가 하나의 의미망 속에서 서로 소통하고 있었다. 너무나 막대하고 풍요로워서 잘 들리지 않는 의미망, 따라서 속삭임이었다.... - P580

할아버지가 모나를 위해 엄선한 아름다움을 통해 자기 삶을 아카이빙할 수 있도록, 그 보물들을 머릿속에 아카이빙할 수 있도록, 어느 날 실명 상태가 다시 덮치더라도 그 보물들만은 색깔과 기쁨의 수장고에 영원히 남아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 P585

사실 유년기의 가르침이란 바로 이것, 상실이었다. 유년기 자체의 상실부터가 그렇다. 유년기를 잃어버리면서 유년기가 무엇이었는지 배우고, 그러면서 모든 것을 항시적으로 잃을 것임을 배운다. 잃는다는 것이 살아 있다는 감각의 강렬한 존재감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임을 배운다. 흔히 성장이란 획득한 것을 쌓아가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경험, 지식, 물질의 획득. 하지만 그건 허상이다. 성장은 상실이다. 살아간다는 것, 그건 삶의 상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살아간다는 건 매초 매분 삶에게 작별을 고할 줄 알게 되는 일이다. - P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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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모를 생각할때 사람들은 언제나 더 복잡해지는 방향으로만 가. 이행이나 변신은 더하기를 통해 이뤄진다고 생각하지, 빼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몬드리안은 우리에게 그 반대를 가르쳐주는 거야. 단순화하라. - P409

칸딘스키뿐만 아니라 그 세대의 많은 예술가에게서는 언뜻 보기에 서로 반대되는 두영향이 결합되어 나타났다. 한편으로 그들은 자연발생적인 원류, 민중적이고 원시적인, 가끔은 투박하기까지 한 문화들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세기 초의 기술적 발견과 혁신이 가져다주는 모든 것에 열광했다. - P420

칸딘스키의 말은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모든 것이 성스러울 수 있다는 뜻이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면, 그 형태, 색채, 윤곽에서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주의를 기울이면 분명 신성을 감지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지. 러시아 변방의 오지 시골에서 만들어진 보잘것없는 물건에서도, 한 줄기 빛에서도, 그저 한마리 새의 노래에서도. 그러므로 각자가 품고 있는 내면의 불꽃을 일깨우기 위해 무슨사원 같은 곳에 갈 필요가 더이상 없는 거야. 불티는 도처에 있어. - P422

어떤 순간부터, 혹은 어떤 문턱을 넘어야 하나의 사물이 작품이 되는가? 뒤샹은 답을 내놓지 않고 질문을 제기한다(아니 더 정확하게는 질문을 느끼게 한다). 미적이거나 도덕적인 치장이 전혀 없는, 지극히 미니멀한 제스처를 통해서.


하나의 물건은 어떤 시점부터 예술 작품이 된다고 간주할 수 있는가? 그것이 자연의 뭔가를 모방해야 하는가? 아니면 반대로, 자연과 구별되어야 하는가? 서명이 있기만 하면 되는가? 아니면, 화랑에 놓여야 하는가? 모종의 작업이 가해졌어야 하는가? 그 경우, 누가 그걸 평가하는가? 어떤 기준에 따라? 병꽃이나 소변기나 직접적인 방식으로는 아름답지도 흥미롭지도 않지만, 뒤샹에게서 그것들은 귀류법적 논거로 쓰인 거야...... - P430

전시실을 떠나면서 모나는 아빠가 겪은 알코올 중독의 비루한 상징물인 그 고슴도치 병꽂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어슴푸레해진 가게에서 아빠에 대한 사랑을 전하려고 그 물건을 하트 모양 열쇠고리들로 장식했던 날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나는 그때 조형 작품을 만들어냈던 거네......‘ 이렇게 결론지은 모나는 마르셀 뒤샹이 그 나름의 방식으로 마술사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걸 예술 작품으로 변신시킬 놀라운 가능성을 제공했으니 말이다. 뒤샹이 삶과 예술의 경계를 뒤섞으면서 만들어낸 혼란에 모나는 전율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라기에는 너무 근사한 것이었다…… - P433

말레비치가 표현하는 건 가장 미세하고 가장 내밀한 약동과 리듬인데, 바로 그것들이 나아가 우주 전체의 행진을 지휘하는 거야. 방향, 중력과 무게의 관계, 유동성, 공간의 횡단, 원자들과 행성들의 회전 전부를 말이야. 말레비치가 표현하는 건 행동의 최소 단계, 행동의 배아, 행동 최초의 진동, 모든 가능태가 존재하기 시작하면서 전개되는 출발점이야. 그것은 곧 완전한 자유로 나아가자는 부름이지. - P438

눈이 녹으면 그 흰색은 어디로 사라질까. 화산이 꺼지면 그 붉은색은, 맨드라미가 시들면 그 진홍색은, 머리카락이 세면 그 갈색은, 날이 저물면 하늘의 푸른색은? 혹시 색깔들의 천국이 있을까? 거기에서 색깔들은 노래를 하고, 천둥소리를 내고, 폭발하고, 서로 떼밀며 뒤섞일 게 분명해. 그런 다음 날아오르겠지. 그런 다음 돌아오고, 한없이. - P445

"음, 보세요, 하비. 이제 곧 가을이 오면 나뭇잎의 노란색이 오렌지색이 될 거예요. 그런데 저걸, 저 노란색을 제가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면요. 어쩌면 저게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게 될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그색깔들의 천국은 어쩌면 내 머릿속일 거예요!"

"제가 시력을 잃게 된다면, 머릿속에 색깔들의 천국이 있으면 좋겠어요......" - P445

그리고 선생님들이란 한편으로 커다란 사랑의 대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들은 언젠가 그들의 학생 노릇을 그만둬야 하죠. 조지아 오키프는 그걸 깨달았을 거예요, 장담해요..... - P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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