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과정을 보며 나는 종종 헷갈렸다. 내가 그를 응원하는지 아니면 질투하는지. 그에게 찾아온 한 방. 과연 나에게도 그런 게 올까? 어쩌면 나도 모르는 새에 이미 지나가버린 건 아닐까?

더이상 달리는 것으로 부모님의 자랑이 될 수도, 달릴 때의 감각을 온전히 즐길 수도 없었다. 늘 가장 빨랐던 나는 그만큼 세게, 우스꽝스럽게 넘어졌다. 고작 겁에 질려 스스로를 옭아매는 방식으로. 내 뒤에 있던 친구들은 이미 저 앞으로 나아가 멀어져 있었다. 사실, 가장 견딜 수 없던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내가 더이상 트랙 위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

진실은 씁쓰름하고 비릿하면서 동시에 중독적인 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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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너 그거 계속했음 좋겠다. 타투인가 그거・・・・・・ 도망치지 말고.

내 허벅지에 손을 얹은 채, 할머니는 말을 이었다.

그거 할 때 너 참 좋아 보이더라. - P321

내가 질문하면 엄마가 겨우 답을 하고, 그 답에서 의중을 파악해야 하는 이런 대화 패턴이 언제부터 굳어진 걸까. 기점을 찾는 것마저 아득하다. 확실한 건 그렇게 모이고 모인 의문들이내 안에 결석처럼 굳어 이따금 아릿한 통증을 일으킨다는 것. 아플 것을 알면서도 나는 또다시 질문거리를 찾고, 묻는다. - P348

엄마가 깎다 만 사과가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정갈하게 깎인 과실이 내 편에만 놓여 있다. 이럴 때 마음은 참 쉽게도 뒤집힌다. 미워하다가도 불현듯 애틋해지고, 충분하다 여기면서도 한편으로 서운해지는, 모녀관계란 원래 이렇게 변덕스럽고 불완전한 것이 아닌가. - P350

강의 막바지에 수강생 중 하나가 좋은 소설이 무엇인지 묻는다. 나는 이 질문이 늘 어렵다.

주인공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만, 결국은 실패하는 소설.

내 생각은 그렇지만, 이번에도 나의 입장 대신 앤 라모트의 문장을 인용한다.

인물 하나하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연민하는 소설이죠. 설사 악당일지라도요. - P355

괜찮아요. 참 힘드셨겠네요. 이렇게 달고 부드러운 말들이 왜 엄마 앞에선 나오지 않는 걸까. 담당자와의 통화를 끝내고 한동안 생각에 잠긴다. 엄마가 바라던 건 위로였던 걸까. 그래서 그렇게 성을 내고 돌아섰던 걸까. ‘남‘이라는 말까지 해가며. - P360

있잖아. 우리 둘째가 문덕이 나이였을 때 공장서 일하다 오른손 검지랑 중지가 잘렸어, 프레스에 눌려서. 그때 손가락을 찾을 수 없어서 접합도 못했는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걔가 그걸 자기 주머니에서 꺼내더라. 내가 속이 상해서 왜 숨겼냐고 화를 내니까 걔가 그래. 누나, 무서워서 그랬어. 수술하면 그 돈 다 우리가 내야 하는데, 그게 무서워서 그랬어.

언니는 말했다. 그래서 자신은 글을 쓰기로 했다고. 잘려나가고 감추어야만 했던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기 위해. - P381

어쩌면 그들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건 수중에 쥐여지는 단돈 몇푼이 아니라 "너희들이 내킬 땐 언제든 머물다 가도 된다"는, "산도 보고 밭도 보고 사는 얘기도 나누며 숨 돌리고 가도 된다"는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 P408

그들은 "어색하고 투박하지만 열렬히", 그래서 더 좋을 만큼 서서히 궤를 맞춰나간다. 누구 하나 제대로 찍히지 않은 단체사진 속 마스크 너머로 조용히 그러나 일제히 환한 웃음을 짓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지금은 그정도로도 충분하다. - P408

서로를 돌봄이나 가르침의 대상이 아닌 ‘비빌 언덕‘으로 여기며 함께 어우러지는 곳. 농촌의 미래가 그렇게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소설을 썼다. 유토피아적 발상이라 볼 수도 있겠으나, 세상이 더 나은 쪽으로 조금씩 변해감을 느끼기에 겨울이 지나 봄이 오는 광경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 같다. - 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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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도로를 거슬러가며 나는 생각했다. 왜 부부를 재종숙부나 숙모가 아닌 재종숙 부군과 부인이라는 기묘한 호칭으로 일컬었는지, 고씨 삼촌과 아버지가 벌인 일들에 왜 내가 더 긴장하고 송구스러워했는지, 왜 우리는 누군가에겐 관대하면서도 누군가에겐 한없이 매정해질 수밖에 없는지를. - P171

빈집과 노인만 남은 마을. 그런 노인조차 죽거나 병들어 서른명도 채 안 남은 마을. 이런 곳에 무얼 보수하고 구축한들 그건 또 얼마나 유효할 수 있을까. 이곳은 불모지다. 풀도 사람도 자라지 못하고 그대로 말라죽는 땅. 할머니가 카메라에 담고 있는, 잎사귀를 늘어뜨린 채 생장을 멈춘 풀들이 그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 P246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머니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도 계속해 짐벌을 잡았다. 평생 찍혀본 적만 있었지—그것도 손에 꼽는다고 했지만—찍어본 적은 없었다고, 잘 찍어서 엄마가 어떻게 사는지, 이곳에서 다들 얼마나 건강히 지내는지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 P247

선생님, 나 한 번만 다시 알려주면 안 될까?

늙으니 머리고 손끝이고 전부 굳었다고 골을 내면서도 할머니는 못하겠단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한숨이 나왔다. 이걸 또 언제 처음부터 다시...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누르고 누르다 나도 모르게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열심히 안 하셔도 돼요.

응? 왜?

할머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올려보았다. 문득 헌진의 말이 떠올랐다. 적당히 하라고. 괜한 데 힘 빼지 말고.

헌진의 말처럼, 나는 정말 애먼 데에 힘을 빼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늘 그랬으니까.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복직에 희망을 걸고, ‘여로가 평안하길 바란다‘는 넉넉한 덕담을 건넬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 다시 도래하길 바라고, 희미해지는 우정이 미약하게나마 지속되길 고대하고…… 아둔하고 무모하게.

애써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요. - P250

처음 목공소 지었을 때는 그저 목재 떼어와서 적당히 자르고 못만 박으면 된다고 생각했거든? 이렇게 나무끼리 맞물릴 수도 있다는 건 여기 어르신들한테 배운 거야. 느슨해 보여도 이렇게 하면 이 면과 저면이 맞닿아서 더 단단히 지탱할 수 있거든. 시간이 지나도 나무가 뒤틀리지 않고, 녹도 슬지 않고 신기하지. - P257

더디고, 때때로 지칠 때도 있지만 그래도.....같이하는 게 더 좋다고, 느리지만 하나하나 일궈가는 즐거움이 있다고.

삼촌은 여기가 좋아.

.....좋아서,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어. - P257

사공 참 쓸데없이 많네.

......왜? 좋지 뭐. 사공이 많으면 배를 산으로도 끌고 간다잖어. - P259

죽은 것처럼 봬도 이렇게 다 살아 있잖아. - P266

뭔데, 뭐가 그리 웃겨. 해조 할머니와 영식삼촌, 관심 없는 척 무심하던 헌진까지도 슬그머니 그쪽으로 모여들었다. 데스크톱을 둘러싼 채 둥글게 모여 선 이들을 보며 점을 쳐보았다. 이 무모함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우리가 여기서 더 나아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그래도..... - P271

다 여름 한철에만 피는 꽃들이다. 그래서 다들 꽃 이름을 몰라.

언제 피고 졌는지도.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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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요? 그렇게 뻔하진 않죠?
영화의 결말은 생각보다 밝았다. 경은 할머니의 입가를 바라보았다. 웃지 않아도 웃는 것 같은 얼굴.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 P60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이후로 경은 숨소리를 자주 의식하게 되었다. 누군가와 가까이 있게 되면 상대가 거슬려할까봐 일부러 숨을 얕게 쉬었고, 혼자 있을 때도 그 습관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렇게 자신을 억누르다보면, 납작해지고 납작해져 결국 사라질 것만 같았지만. - P66

나는 오히려 좋아요. 우리가 나란히 앉아 같은 장면을 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으니까요.

이목씨는 말했다. 사람들이 극장을 찾는 이유 중에는 타인과 같은 포인트에서 폭소하고 글썽이는 교류의 순간을 소중한 기억으로 여기기 때문도 있다고, 자신도 그렇다고, 그러니 여기서는 크게 숨을 쉬고 웃고 울어도 된다고. - P67

그 시절 그녀는 입버릇처럼 괜찮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피부가 찢어져도 괜찮습니다. 이가 부러져도 괜찮습니다. 죽다 가까스로 살아난 순간에도 괜찮습니다.

.....저 시기의 나는 참 위태로웠어요. 다시 저때로 돌아간다면……나는 결코 내 마음을 속이지 않을 거예요. 속 편히 웃고 울고 싸우고. 견디지 않을 거예요. - P68

더이상은 못하겠다는 경에게 언니와 아버지는 그렇게 꾸준히 자신들의 희원을 주입했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 기를 죽이는 말이 아니었는데도 그 말을 들을 때면 기가죽었다. - P71

너도 남들만큼은 살아야지.

남들만큼은 살아야 한다. 그 말을 경은 오래도록 곱씹었다. 경은 아버지와 언니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사람이었다. 여러 말들이 속에서 맴돌았지만 어느 것 하나 뱉을 수 없었다. 언니의 전화를 받기 전부터 경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아무 말도 못할 거라는 것을, 또 누군가를 혐오하게 될 것을, 그리고 그건 언니나 아버지가 아닌, 뭐 하나 제 의지대로 못하는 자신이리라는 것을. - P72

그건 사랑이 아니라 월권이에요.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예요. 아버지가 하는 말들이.....제 영혼을 갈기갈기 찢고 있으니까요.

그날 경이 한 말의 일부는 이목씨와 함께 본 어느 영화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아버지의 표정이 점차 굳어가고 뒤틀리는 것을 지켜보며, 차오르는 공포와 불안을 견디며 경은 영화에서 본 대사들을 짜깁기해 더듬더듬 뱉었다. 초연을 올리는 배우처럼 서툴지만, 담대하게. 비록 지금은 영화 속 대사를 차용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대사만으로 충분할 날도 올 거라 여기며. - P85

그런 이목씨 뒤에서 경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내가 이곳에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천천히. 그들이 그렇게 함께 같은 장면을 바라보는 동안, 영화 속 키튼은 길을 걸어 남쪽으로, 더 밝은 쪽으로 나아갔다. - P87

저기, 나는요, <붉은 눈 흰 피>의 오프닝을 열 번이나 봤어요. 같은 영화를 열 번이나 보니까 보이더라고요. 주인공 뒤에서 구르고 끌려가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이요.

그냥...... 나 같은 사람도 있다구요. - P91

이목씨는 말했다. 어둠을 걷으면 또다른 어둠이 있을 거라 여기며 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어둠을 걷으면 그 안에는 빛이 분명 있다고. - P91

나는 이제 살아내지 않고, 살아가고 싶어요. 견디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 P92

자네 고향에도?

아버지가 물었다.

예, 열차에서 돌아가신 분들 묘 다 우리가 시웠습니다.


강제이주 때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이들의 묘를 살아남은 이들이 카자흐스탄에 손수 만들었다고, 그걸 ‘헛묘‘라 부른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고 부군은 말했다. 부군의 이야기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 우리도 우리끼리 견뎠어. 미움도 괴롬도 다 우리끼리 나누고 삭였어.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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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면 얘기해도 돼. 우리가 다 들어줄게. 우린 이해해.

너의 불행을 기꺼이 견딜 수 있다는 우월감, 나만 딱하게 사는것이 아니라는 안도감. 나를 위해 기꺼이 울어주던 이들에게서 그런 마음을 엿볼 때마다 나는 외로워졌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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