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때요? 그렇게 뻔하진 않죠? 영화의 결말은 생각보다 밝았다. 경은 할머니의 입가를 바라보았다. 웃지 않아도 웃는 것 같은 얼굴.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 P60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이후로 경은 숨소리를 자주 의식하게 되었다. 누군가와 가까이 있게 되면 상대가 거슬려할까봐 일부러 숨을 얕게 쉬었고, 혼자 있을 때도 그 습관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렇게 자신을 억누르다보면, 납작해지고 납작해져 결국 사라질 것만 같았지만. - P66
나는 오히려 좋아요. 우리가 나란히 앉아 같은 장면을 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으니까요.
이목씨는 말했다. 사람들이 극장을 찾는 이유 중에는 타인과 같은 포인트에서 폭소하고 글썽이는 교류의 순간을 소중한 기억으로 여기기 때문도 있다고, 자신도 그렇다고, 그러니 여기서는 크게 숨을 쉬고 웃고 울어도 된다고. - P67
그 시절 그녀는 입버릇처럼 괜찮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피부가 찢어져도 괜찮습니다. 이가 부러져도 괜찮습니다. 죽다 가까스로 살아난 순간에도 괜찮습니다.
.....저 시기의 나는 참 위태로웠어요. 다시 저때로 돌아간다면……나는 결코 내 마음을 속이지 않을 거예요. 속 편히 웃고 울고 싸우고. 견디지 않을 거예요. - P68
더이상은 못하겠다는 경에게 언니와 아버지는 그렇게 꾸준히 자신들의 희원을 주입했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 기를 죽이는 말이 아니었는데도 그 말을 들을 때면 기가죽었다. - P71
너도 남들만큼은 살아야지.
남들만큼은 살아야 한다. 그 말을 경은 오래도록 곱씹었다. 경은 아버지와 언니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사람이었다. 여러 말들이 속에서 맴돌았지만 어느 것 하나 뱉을 수 없었다. 언니의 전화를 받기 전부터 경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아무 말도 못할 거라는 것을, 또 누군가를 혐오하게 될 것을, 그리고 그건 언니나 아버지가 아닌, 뭐 하나 제 의지대로 못하는 자신이리라는 것을. - P72
그건 사랑이 아니라 월권이에요.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예요. 아버지가 하는 말들이.....제 영혼을 갈기갈기 찢고 있으니까요.
그날 경이 한 말의 일부는 이목씨와 함께 본 어느 영화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아버지의 표정이 점차 굳어가고 뒤틀리는 것을 지켜보며, 차오르는 공포와 불안을 견디며 경은 영화에서 본 대사들을 짜깁기해 더듬더듬 뱉었다. 초연을 올리는 배우처럼 서툴지만, 담대하게. 비록 지금은 영화 속 대사를 차용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대사만으로 충분할 날도 올 거라 여기며. - P85
그런 이목씨 뒤에서 경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내가 이곳에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천천히. 그들이 그렇게 함께 같은 장면을 바라보는 동안, 영화 속 키튼은 길을 걸어 남쪽으로, 더 밝은 쪽으로 나아갔다. - P87
저기, 나는요, <붉은 눈 흰 피>의 오프닝을 열 번이나 봤어요. 같은 영화를 열 번이나 보니까 보이더라고요. 주인공 뒤에서 구르고 끌려가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이요.
그냥...... 나 같은 사람도 있다구요. - P91
이목씨는 말했다. 어둠을 걷으면 또다른 어둠이 있을 거라 여기며 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어둠을 걷으면 그 안에는 빛이 분명 있다고. - P91
나는 이제 살아내지 않고, 살아가고 싶어요. 견디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 P92
자네 고향에도?
아버지가 물었다.
예, 열차에서 돌아가신 분들 묘 다 우리가 시웠습니다.
강제이주 때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이들의 묘를 살아남은 이들이 카자흐스탄에 손수 만들었다고, 그걸 ‘헛묘‘라 부른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고 부군은 말했다. 부군의 이야기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 우리도 우리끼리 견뎠어. 미움도 괴롬도 다 우리끼리 나누고 삭였어. - P1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