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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를 잘한다는 것 - 슈퍼개미에게 직접 배우는 성공 투자 핵심 비법!
배진한 지음 / 이레미디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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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섭스레기같은 책. 이 정도 얄팍한 수준의 책을 소개한 주식 유투버나 책추천사를 쓴 저 위의 관계자들의 양심을 의심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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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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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고전이라 함은 시간의 세례를 받고 살아남은 책, 따라서 대부분 과거의 책이다. 하지만 과거에 쓰여졌다해서 모두 고전이 되는 법은 아니다. 어떤 책이 고전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쓰여진 당대의 시간을 뛰어넘어 ‘현재적 가치’를 담보하고 있어야 한다. 즉 시대를 초월하여 현재와 소통할 수 있어야 우리는 그 책을 고전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생존 작가에서만 수여하는 노벨문학상의 경우는 어떠할까.
일단 노벨문학상 수상작들이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장 고전이라 칭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대에 쓰여진 수많은 책들 중에서 당대성 (현재적 가치)을 획득했거나 검증받은 책이라는 사실은 반박하기 힘들 것이다. 그 현재적 가치가 가깝거나 혹은 먼 미래에도 여전히 그 가깝거나 먼 미래에도 소통할 수 있다면 그 책은 고전의 반열에 오를 것이고 그렇지 못한 책은 잊혀지리라.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인 <나를 보내지 마>. 이 책은 클론들, 즉 복제인간들의 이야기이다.
화자인 캐시와 그의 친구인 루스와 토미 이 셋의 사랑과 우정 그리고 갈등이 이야기의 축을 이룬다. 그래서 헤일셤과 코티지에 대한 회상을 담은 중반부까지의 이 책은 마치 성장소설처럼 읽힌다. 그리고 자서전적 이야기를 촘촘하게 묶어내는 캐시의 시선과 감정의 결이 너무나 섬세하여 마치 감각적인 산문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어떤 근원자의 복제인간들이고, 간병사라는 역할을 거친 후 궁극적으로는 기증자로서 삶을 마쳐야하는 운명이라는 사실과 직면하게 되면, 이 소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근원적이고 질문을 던지는 매우 철학적인 SF소설로 기억될 수밖에 없으리라.
이 소설의 핵심적인 대목은 3부에서 캐시와 토미가 마담를 찾아갔다가 에일리 선생님과 재회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보인다. 화랑의 의미와 헤일셤이라는 학교의 존재가치 그리고 헤일셤이 폐교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대한 담론들.

복제란 무엇인가. 그것은 제조되는 것, 즉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체’의 제조다. 복제이기 때문에 그 제조된 생명체는 물리적으로 근원자인 인간과 똑같다. 다만 모태수태와 출산을 통해서 탄생한 생명이 아니라 어떤 ‘공장’에서 만들어진 생명이다. 그래서 그것은 관리되어야하는 제품이거나 사육되어야 하는 가축과도 같은 존재이다. 진짜 인간의 장기를 기증하기 위한 수단이며 진짜 인간이 아니므로.
그런데 이들이 육체적으로만 인간의 형상을 띤 것이 아니라 인간과 동일한 영혼마저 지니고 있다면! 성장과정에서 아무리 세뇌를 당하고 교육을 받았어도 근원자의 뇌 속에 잠재된 어떤 기억인자에 영향을 받아서 질문하고 의심하는 능력이 길러진다면! (2005년 작 SF영화 ‘아일랜드’의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이 질문은 복제인간의 정체성을 묻는 동시에 과연 ‘인간’에 대한 정체성을 동시에 묻고 있다.

그리고 진짜 논의되어야 할 대목은 모닝데일 사건이다. 인간의 수명연장이라는 욕망을 위해서, 그리고 불치병의 완치를 위해서 시작된 이식용 장기 배양을 위한 클론 산업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는데, 그것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클론이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인간 스스로 합리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인간은 도덕성에 상처받지 않고 거리낌 없이 장기를 교체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과연 클론은 인간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헤일셤에서 시도한 클론들의 창조적인 활동들, 즉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는 등의 일련의 과정들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헤일셤의 설립자와 선생들은 훌륭한 창작물들을 증거삼아 ‘사육’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서 클론들을 온당하게 성장시킬 수 있다는 운동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운동은 결정적으로 모닝데일 사건을 통해 실패하고 만다.
과학자 모닝데일이 시도했던, 지성이나 운동 능력 등에 있어서 인간보다 우수한 클론을 배양하는 것이 성공한다면, 이 클론들이 사회를 장악할 것이라는 공포가 교육이 대상으로 승격된 클론에서 다시 사육시키는 가축의 단계로 뒷걸음치게 만들었다는 대목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건 지금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인공지능 (AI)와도 맥을 같이하는 지점이다. 알파고의 등장 이후 우리는 AI에 대해 극적으로 상반된 감정이 있다. AI를 통해 인간의 삶이 얼마나 윤택해질 것인가라는 희망적인 기대와 더불어 그 이면에는 고도로 발달된 AI에 의해 오히려 인간이 지배당할 수도 있다는 절망적인 미래에 대한 공포가 분명 있다. (이건 이미 SF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예견한 디스토피아이다.)
하지만 일군의 과학자들은 장담한다. 아무리 AI가 발전하더라고 인공지능에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즉 스스로 생각하는 사유의 능력은 스스로 창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암울한 미래에 대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로.
하지만 클론이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클론은 기계가 아니라 붉은 심장이 뛰고 더운 숨을 쉬는 살아있는 인간이므로. 그리고 그들의 뇌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복제되었지만 진짜 인간의 뇌와 모든 DNA가 동일하므로. 만약 작가가 이 문제를 갈등의 축으로 삼았다면 이 소설은 더욱 암울한 미래, 즉 인간과 클론의 투쟁을 묘사한 서사적인 비극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는 인간보다 더 섬세하고 따뜻한 복제인간 캐시의 목소리를 통해 진짜 인간이란 무엇이며 과연 영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에 초점을 맞춘다.

1930년대 올더스 헉슬리는 서기 2400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멋진 SF소설 <멋진 신세계>를 썼다. 그 소설에서 그는 공장 실험실에서 생명이 잉태되고 (모태출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 시스템에 맞춰서 출생부터 계급이 정해지고, 어떤 종교나 철학적 질문도 없는 완벽하게 행복한 사회를 상상력으로 치밀하게 그려냈다. 불과 80여년의 시간이 흐른 2,010년대 지금 <멋진 신세계>가 예견한 어떤 징후들을 현실에서 발견하면서 우리 모두는 전율하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2005년에 쓰여진 <나를 보내지 마>가 80여년이 흐른 서기 2,100년 쯤 그 시대 독자들에게 읽혀질 때 <멋진 신세계>가 담보하고 있는 ‘현재성’을 여전히 획득한다면 이 책 또한 고전의 목록에 이름을 올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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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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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에게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대해 묻는다면, 안나의 저 유명한 첫 대목, 즉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한 이유로 행복한 데 반해서, 불행한 가정은 다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문장으로 썰을 풀다가, ‘그런데 사실 유부녀인 안나가 총각 장교인 브론스키와 불륜을 저지르다가 끝내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치정극라 할 수 있지. 그 세계적 명성에 비해 난 별로 좋은 줄 모르겠더라’ 고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 할 것만 같다.
만약 상대 역시 안나를 읽은 사람이라면 결혼제도과 사랑의 부조화에 기인하는 갈등 그리고 사랑의 본질에 관해서 좀 더 깊은 대화는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또 누군가가 최인훈의 ‘광장’을 언급한다면, 한국전쟁 후 남과 북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3세계로 망명하던 중 끝내 바다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한 인간 ‘이명준’의 이름을 새삼 떠올리면서, 역사의 무게 아래서 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정치적 입장에 대한 얘기를 할 테지.
왜냐하면 당대 현실은 여전히 모순으로 가득 차 있을게고, 그 속에서 한 개인이 ‘밀실’로 숨어들어 갈 것이냐 아니면 ‘광장’으로 나올 것이냐의 질문은 여전히 실존적인 화두일 테니.

그런데 이제 누군가 나에게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보았느냐고 묻는다면, 그리고 그 상대 역시 카잔차키스의 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나는 당장 그의 손목을 잡고 식당으로 끌고 갈 것만 같다. 그리고 벌겋게 달아오른 숯불에 살점이 두툼한 돼지고기를 먹음직스럽게 구워가며 맑은 소주를 권하면서 이렇게 쏘아붙일 테다. “책나부랭이 얘기는 집어치우고 오늘은 게걸스럽게 잔뜩 먹고 진탕 마시자. 그리고 네가 살아온 얘기를 들려주렴. 너를 내게 읽혀달란 말이다. 오늘 나도 나를 읽어주마.”
자, 다시 안나의 첫 문장을 패러디 하자면 이렇다. “모든 시시한 소설은 비슷비슷한 이유로 시시한데 반해 모든 뛰어난 소설은 제 각각의 이유로 뛰어나다.”
누구는 조르바를 자유라고 읽고, 혹자는 방탕이라 읽고, 또 누구는 술과 육욕만을 탐내는 무식쟁이 난봉꾼, 그리고 누구는 카르페디엠의 상징적 인물로 읽으리. 그것 또한 모두 각각의 독자들의 자유.

게으른 책벌레이자 얼치기 펜대운전수에 가까운 나에게 조르바는 나를 호통 치거나 격려하는 삼촌뻘의 사내 쯤 되려나. 그런데 이 농탕한 사내의 집게손가락이 잘린 왼손에는 도끼가 들려져있는 게지. 바로 카프카의 도끼 (Axt).
인생의 어떤 대목에서 어쩔 줄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는 나한테 도끼를 든 조르바가 호탕하게 웃으며 놀려대겠지. “어이 조카뻘 친구, 펜대 운전할 시간에 인생의 신비를 즐기게나. 때로는 전쟁, 때로는 계집, 때로는 술, 때로는 산투리로 인생을 살게나. 좌충우돌 실수투성이, 그게 인생이지. 자네 몸에 지니고 다니는 그 알량한 저울은 집어 던지고 말일세.”

하지만 나는 알지. 내가 끝끝내 저울을 폐기처분 할 수 없을 것이며 절대 손에서 책을 떨어뜨려놓지 못할 것임을. 이것이 또한 아이러니.
내가 카잔차키스의 책을 통하지 않고서 어찌 그대 조르바를 만날 수 있었으리.
어쨋든 내가 지닌 저울추의 무게와 책의 냄새는 조르바를 알고 난 후 조금은 분명 달라졌음을 의심하지는 못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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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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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이 권력의 하수인이 될 때, 문학이 신문의 역할을 대신 한다. 그때 문학은 불행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문학의 운명이자 축복이다. 예를 들어 5.18이 그렇다.

광주사태는 빨갱이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에 의한 무장폭동이며 이를 계엄군이 총칼로 진압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짓의 유령이 80년대 남한 전역을 떠돌아다녔다. 국가 폭력과 살인의 희생자와 피해자 들이 죄인이었고, 광주학살은 금기어였다.
이렇듯 사실을 전달하고 진실을 탐구해야 하는 신문과 방송이 신군부의 총칼 아래서 반송장처럼 책임을 방기할 때, 유언비어와 거짓 풍문이 진실의 젖가슴을 도려내고 집단살육하고 조직적으로 암매장할 때, 문학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비문학적인 방법으로 가장 문학적이된다.

즉 꽃을 버리고 칼을 든다. 총칼로 무장한 계엄군 앞에서 어찌 아름다운 꽃을 노래하겠는가. ‘화려한 휴가’증을 소지하고 외출 나온 계엄군에게 너희 휴가의 민낯은 ‘민간인 학살’임을 증명하고 '살인정권'에 항거하기 위해 무장할 수밖에 없었던 시민군처럼, 문학은 꽃을 버리고 쇳내 나는 칼을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5.18을 다룬 여러 단편 소설들이나 대표적인 장편소설 “봄날” (임철우, 문학과 지성사, 1998년)처럼, 당시 문학이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태도는 은폐된 진실을 복원하는 리얼리즘적 관점에서의 집필이었다.

“봄날” 이후 5.18 광주의 이야기를 16년 만에 (2014년) 한강이 다시 썼다.
다시 쓰되 달리 썼다. 사실에 기반을 두되 혼의 입을 빌리고 서사 중심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 중심으로 썼다. 똑같이 비유하자면 이제 칼을 버리고 다시 꽃을 들었다.
진실 복원이 아니라 패배한 자들,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도청에 남아서 죽어간 사람들과 살아남아 아지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너무 어리고 연약하고 순수한 꽃들. 그래서 꺾이고 찢기고 시들어버린 꽃들.

한강은 이 갈가리 찢긴 깃발같은 꽃들을 들고 우리의 심장을 벤다. 작심하고 벤다. 막장까지 찔러온다. 부드러운 꽃잎이 벼린 칼날보다 더 예리하고 깊숙이 베고 들어온다.
그 꽃의 이름이 동호고 정대고 은숙이고 선주고 진수이다. 그 꽃의 이름이 2009년 용산이고 2014년 세월호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고립되어 고통 받는 이들이 그 꽃의 또 다른 이름이다.

꽃에 베인 우리는 피 흘리며 신음한다. 그런데 그 피는 붉고 따스하다. 그래서 아직까지 우리가 차갑게 식지 않은 피를 지녔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그래서 감사해하면서 그러나 동시에 분노하면서, 우리는 운다.
한 권의 뛰어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인생을 두 번 산다는 사실에 통감하면서, ‘소년은 온다’를 읽으면서 우리는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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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이끌리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 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은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여인일 뿐이라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라고 믿어왔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 보니,로 시작해서 어쩌다 보니,로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쩌다 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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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보선의 두 번째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 중에서 '인중을 긁적거리며' 일부.

 

심보선은 영혼을 탐색하는 시인이라 부를만하다.  시어로서는 폐기처분 되어버린 듯한 '영혼'이라는 '말'에 영혼을 불어넣어서 새로운 의미로 부활시키려고 애쓴다.  본 시집 첫 번째 시 '말들'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영혼을 가졌다는 증거는 셀 수 없이 많다./오늘은 그중 하나만 보여주마./그리고 내일 또 하나./그렇게 하루에 하나씩.'

( 우리가 영혼을 가졌다고?  정말? 믿기 힘든데? 하지만 시인은 증거가 셀 수 없이 많단다. 사실 영혼은, 우리가 그걸 믿는 순간 '있는' 어떤 것이다. 영혼은 믿는 자에게는 단 하나의 증거가 없어도 있는 것이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무수한 증거가 있어도 없는 것이다. 심보선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

 

김훈의 소설 "개"는 이렇게 시작한다. ' 내 이름은 보리, 진돗개 수놈이다. 태어나보니, 나는 개였고 수놈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기는 소나 닭이나 물고기다 사람도 다 마찬가지다. 태어나보니 돼지이고, 태어나보니 사람이고, 태어나보니 암놈이거나 수놈인 것이다.'

 

김훈이 존재의 탄생을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어쩔 수 없는 일'로 진단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이 세상과 사태를 엄정하게 긍정케 한다면, 심보선은 그 '어쩔 수 없음'이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면서 세상을 긍정케한다. 그런데 심보선의 긍정은 사랑과 연대의 긍정이다. 내 주름은 타인의 슬픔 탓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훈은 홀로 서야하는 긍정이다.  "칼의 노래"가 세상에 대한 한 인간의 고독한 맞섬이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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