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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이끌리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 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은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여인일 뿐이라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라고 믿어왔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 보니,로 시작해서 어쩌다 보니,로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쩌다 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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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보선의 두 번째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 중에서 '인중을 긁적거리며' 일부.

 

심보선은 영혼을 탐색하는 시인이라 부를만하다.  시어로서는 폐기처분 되어버린 듯한 '영혼'이라는 '말'에 영혼을 불어넣어서 새로운 의미로 부활시키려고 애쓴다.  본 시집 첫 번째 시 '말들'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영혼을 가졌다는 증거는 셀 수 없이 많다./오늘은 그중 하나만 보여주마./그리고 내일 또 하나./그렇게 하루에 하나씩.'

( 우리가 영혼을 가졌다고?  정말? 믿기 힘든데? 하지만 시인은 증거가 셀 수 없이 많단다. 사실 영혼은, 우리가 그걸 믿는 순간 '있는' 어떤 것이다. 영혼은 믿는 자에게는 단 하나의 증거가 없어도 있는 것이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무수한 증거가 있어도 없는 것이다. 심보선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

 

김훈의 소설 "개"는 이렇게 시작한다. ' 내 이름은 보리, 진돗개 수놈이다. 태어나보니, 나는 개였고 수놈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기는 소나 닭이나 물고기다 사람도 다 마찬가지다. 태어나보니 돼지이고, 태어나보니 사람이고, 태어나보니 암놈이거나 수놈인 것이다.'

 

김훈이 존재의 탄생을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어쩔 수 없는 일'로 진단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이 세상과 사태를 엄정하게 긍정케 한다면, 심보선은 그 '어쩔 수 없음'이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면서 세상을 긍정케한다. 그런데 심보선의 긍정은 사랑과 연대의 긍정이다. 내 주름은 타인의 슬픔 탓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훈은 홀로 서야하는 긍정이다.  "칼의 노래"가 세상에 대한 한 인간의 고독한 맞섬이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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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山에서

 

- 오규원 ( "王子가 아닌 한 아이에게" )

 

詩에는 무슨 근사한 얘기가 있다고 믿는

낡은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詩에는

아무 것도 없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生밖에.

 

믿고 싶어 못 버리는 사람들의

무슨 근사한 이야기의 幻想밖에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意志와 理想 속에 자라며 흔들리듯

그대의 사랑도 믿음도 나의 詐欺도 詐欺의 확실함도

확실한 그만큼 확실하지 않고

근사한 풀밭에는 잡초가 자란다.

 

확실하지 않음이나 사랑하는 게 어떤가.

詩에는 아무 것도 없다. 詩에는

남아 있는 우리의 生밖에.

남아 있는 우리의 生은 우리와 늘 만난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믿고 싶지 않겠지만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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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초판이 출판된 시집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에 수록된 첫 시다. 그러니 오규원 (1941년생)이 젊은 삼십대에 쓴 시일게다. 2013년, 아직도 낡은 생각이 지구를 감싸고 있다. 믿고 싶어 못 버리는 환상은 2078년에도 여전할 것이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생의 속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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