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흔히 고전이라 함은 시간의 세례를 받고 살아남은 책, 따라서 대부분 과거의 책이다. 하지만 과거에 쓰여졌다해서 모두 고전이 되는 법은 아니다. 어떤 책이 고전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쓰여진 당대의 시간을 뛰어넘어 ‘현재적 가치’를 담보하고 있어야 한다. 즉 시대를 초월하여 현재와 소통할 수 있어야 우리는 그 책을 고전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생존 작가에서만 수여하는 노벨문학상의 경우는 어떠할까.
일단 노벨문학상 수상작들이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장 고전이라 칭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대에 쓰여진 수많은 책들 중에서 당대성 (현재적 가치)을 획득했거나 검증받은 책이라는 사실은 반박하기 힘들 것이다. 그 현재적 가치가 가깝거나 혹은 먼 미래에도 여전히 그 가깝거나 먼 미래에도 소통할 수 있다면 그 책은 고전의 반열에 오를 것이고 그렇지 못한 책은 잊혀지리라.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인 <나를 보내지 마>. 이 책은 클론들, 즉 복제인간들의 이야기이다.
화자인 캐시와 그의 친구인 루스와 토미 이 셋의 사랑과 우정 그리고 갈등이 이야기의 축을 이룬다. 그래서 헤일셤과 코티지에 대한 회상을 담은 중반부까지의 이 책은 마치 성장소설처럼 읽힌다. 그리고 자서전적 이야기를 촘촘하게 묶어내는 캐시의 시선과 감정의 결이 너무나 섬세하여 마치 감각적인 산문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어떤 근원자의 복제인간들이고, 간병사라는 역할을 거친 후 궁극적으로는 기증자로서 삶을 마쳐야하는 운명이라는 사실과 직면하게 되면, 이 소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근원적이고 질문을 던지는 매우 철학적인 SF소설로 기억될 수밖에 없으리라.
이 소설의 핵심적인 대목은 3부에서 캐시와 토미가 마담를 찾아갔다가 에일리 선생님과 재회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보인다. 화랑의 의미와 헤일셤이라는 학교의 존재가치 그리고 헤일셤이 폐교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대한 담론들.

복제란 무엇인가. 그것은 제조되는 것, 즉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체’의 제조다. 복제이기 때문에 그 제조된 생명체는 물리적으로 근원자인 인간과 똑같다. 다만 모태수태와 출산을 통해서 탄생한 생명이 아니라 어떤 ‘공장’에서 만들어진 생명이다. 그래서 그것은 관리되어야하는 제품이거나 사육되어야 하는 가축과도 같은 존재이다. 진짜 인간의 장기를 기증하기 위한 수단이며 진짜 인간이 아니므로.
그런데 이들이 육체적으로만 인간의 형상을 띤 것이 아니라 인간과 동일한 영혼마저 지니고 있다면! 성장과정에서 아무리 세뇌를 당하고 교육을 받았어도 근원자의 뇌 속에 잠재된 어떤 기억인자에 영향을 받아서 질문하고 의심하는 능력이 길러진다면! (2005년 작 SF영화 ‘아일랜드’의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이 질문은 복제인간의 정체성을 묻는 동시에 과연 ‘인간’에 대한 정체성을 동시에 묻고 있다.

그리고 진짜 논의되어야 할 대목은 모닝데일 사건이다. 인간의 수명연장이라는 욕망을 위해서, 그리고 불치병의 완치를 위해서 시작된 이식용 장기 배양을 위한 클론 산업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는데, 그것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클론이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인간 스스로 합리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인간은 도덕성에 상처받지 않고 거리낌 없이 장기를 교체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과연 클론은 인간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헤일셤에서 시도한 클론들의 창조적인 활동들, 즉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는 등의 일련의 과정들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헤일셤의 설립자와 선생들은 훌륭한 창작물들을 증거삼아 ‘사육’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서 클론들을 온당하게 성장시킬 수 있다는 운동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운동은 결정적으로 모닝데일 사건을 통해 실패하고 만다.
과학자 모닝데일이 시도했던, 지성이나 운동 능력 등에 있어서 인간보다 우수한 클론을 배양하는 것이 성공한다면, 이 클론들이 사회를 장악할 것이라는 공포가 교육이 대상으로 승격된 클론에서 다시 사육시키는 가축의 단계로 뒷걸음치게 만들었다는 대목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건 지금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인공지능 (AI)와도 맥을 같이하는 지점이다. 알파고의 등장 이후 우리는 AI에 대해 극적으로 상반된 감정이 있다. AI를 통해 인간의 삶이 얼마나 윤택해질 것인가라는 희망적인 기대와 더불어 그 이면에는 고도로 발달된 AI에 의해 오히려 인간이 지배당할 수도 있다는 절망적인 미래에 대한 공포가 분명 있다. (이건 이미 SF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예견한 디스토피아이다.)
하지만 일군의 과학자들은 장담한다. 아무리 AI가 발전하더라고 인공지능에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즉 스스로 생각하는 사유의 능력은 스스로 창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암울한 미래에 대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로.
하지만 클론이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클론은 기계가 아니라 붉은 심장이 뛰고 더운 숨을 쉬는 살아있는 인간이므로. 그리고 그들의 뇌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복제되었지만 진짜 인간의 뇌와 모든 DNA가 동일하므로. 만약 작가가 이 문제를 갈등의 축으로 삼았다면 이 소설은 더욱 암울한 미래, 즉 인간과 클론의 투쟁을 묘사한 서사적인 비극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는 인간보다 더 섬세하고 따뜻한 복제인간 캐시의 목소리를 통해 진짜 인간이란 무엇이며 과연 영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에 초점을 맞춘다.

1930년대 올더스 헉슬리는 서기 2400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멋진 SF소설 <멋진 신세계>를 썼다. 그 소설에서 그는 공장 실험실에서 생명이 잉태되고 (모태출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 시스템에 맞춰서 출생부터 계급이 정해지고, 어떤 종교나 철학적 질문도 없는 완벽하게 행복한 사회를 상상력으로 치밀하게 그려냈다. 불과 80여년의 시간이 흐른 2,010년대 지금 <멋진 신세계>가 예견한 어떤 징후들을 현실에서 발견하면서 우리 모두는 전율하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2005년에 쓰여진 <나를 보내지 마>가 80여년이 흐른 서기 2,100년 쯤 그 시대 독자들에게 읽혀질 때 <멋진 신세계>가 담보하고 있는 ‘현재성’을 여전히 획득한다면 이 책 또한 고전의 목록에 이름을 올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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