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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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이 권력의 하수인이 될 때, 문학이 신문의 역할을 대신 한다. 그때 문학은 불행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문학의 운명이자 축복이다. 예를 들어 5.18이 그렇다.

광주사태는 빨갱이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에 의한 무장폭동이며 이를 계엄군이 총칼로 진압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짓의 유령이 80년대 남한 전역을 떠돌아다녔다. 국가 폭력과 살인의 희생자와 피해자 들이 죄인이었고, 광주학살은 금기어였다.
이렇듯 사실을 전달하고 진실을 탐구해야 하는 신문과 방송이 신군부의 총칼 아래서 반송장처럼 책임을 방기할 때, 유언비어와 거짓 풍문이 진실의 젖가슴을 도려내고 집단살육하고 조직적으로 암매장할 때, 문학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비문학적인 방법으로 가장 문학적이된다.

즉 꽃을 버리고 칼을 든다. 총칼로 무장한 계엄군 앞에서 어찌 아름다운 꽃을 노래하겠는가. ‘화려한 휴가’증을 소지하고 외출 나온 계엄군에게 너희 휴가의 민낯은 ‘민간인 학살’임을 증명하고 '살인정권'에 항거하기 위해 무장할 수밖에 없었던 시민군처럼, 문학은 꽃을 버리고 쇳내 나는 칼을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5.18을 다룬 여러 단편 소설들이나 대표적인 장편소설 “봄날” (임철우, 문학과 지성사, 1998년)처럼, 당시 문학이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태도는 은폐된 진실을 복원하는 리얼리즘적 관점에서의 집필이었다.

“봄날” 이후 5.18 광주의 이야기를 16년 만에 (2014년) 한강이 다시 썼다.
다시 쓰되 달리 썼다. 사실에 기반을 두되 혼의 입을 빌리고 서사 중심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 중심으로 썼다. 똑같이 비유하자면 이제 칼을 버리고 다시 꽃을 들었다.
진실 복원이 아니라 패배한 자들,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도청에 남아서 죽어간 사람들과 살아남아 아지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너무 어리고 연약하고 순수한 꽃들. 그래서 꺾이고 찢기고 시들어버린 꽃들.

한강은 이 갈가리 찢긴 깃발같은 꽃들을 들고 우리의 심장을 벤다. 작심하고 벤다. 막장까지 찔러온다. 부드러운 꽃잎이 벼린 칼날보다 더 예리하고 깊숙이 베고 들어온다.
그 꽃의 이름이 동호고 정대고 은숙이고 선주고 진수이다. 그 꽃의 이름이 2009년 용산이고 2014년 세월호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고립되어 고통 받는 이들이 그 꽃의 또 다른 이름이다.

꽃에 베인 우리는 피 흘리며 신음한다. 그런데 그 피는 붉고 따스하다. 그래서 아직까지 우리가 차갑게 식지 않은 피를 지녔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그래서 감사해하면서 그러나 동시에 분노하면서, 우리는 운다.
한 권의 뛰어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인생을 두 번 산다는 사실에 통감하면서, ‘소년은 온다’를 읽으면서 우리는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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