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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평점 :
죽고 난 다음에 시작되는 특별한 심판
천생연분을 몰라본 죄, 재능을 낭비한 죄……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까?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는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나도 《개미》를 시작으로 그의 작품에 매료되어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한 사람이 되었다. 십여년간 그의 신작을 빠짐없이 읽었고 한번도 실망하지 않아서 일까, 이번에는 희곡이라는데 과연?하는 기대감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심판》의 배경은 법정이다. 단, 현실 세계의 법정이 아닌 사후 세계의 법정. 희곡이라는 점에 충실하게 무대를 묘사한다.책상 세개, 대천사 조각상, 현실 세계를 보여주는 스크린. 등장인물은 방금 사망한 피고 아나톨 피숑, 변호인은 그의 수호천사였던 카롤린, 검사 베르트랑, 그리고 재판관 가브리엘. 무대에 불이 켜지고 아나톨의 생애를 심판하는 그들. 그 심판에 따라 아나톨의 영혼은 다시 태어나는 <삶의 형>을 받거나 사후 세계에 남을 수 있다.
자신은 <좋은 학생, 좋은 시민, 좋은 남편, 좋은 가장, 좋은 카톨릭 신자, 좋은 직업인>이었다고 말하는 아나톨의 주장에 맞서 검사 베르트랑이 논거하는 그의 죄. 다섯 살 때 사탕을 주지 않는다고 친구를 때렸던 죄. 천생배필을 배우자로 고르지 않고 못생긴 아내를 참으며 평생을 살아온 죄, 아이들에게 지나친 자유를 주어 방임했던 죄. 무엇보다 아나톨이 판사로 일하면서 많은 사건을 해결하느라 충분한 검토없이 날림 판결로 또, 외부에서의 압력으로 잘못된 판단을 한 죄, 분명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었는데 배우가 아닌 판사로 안정적인 직업을 택한 죄 등. 일반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사후에 받는 심판과 사뭇 다른 죄목에 웃음이 났다. 단순히 황당한 재미만이 아니라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그 안에서 사회적 문제나 편견을 풍자한다. '결혼은 남자가 자신의 핏줄을 인정하게 만들어 사생아와 고아의 수를 줄이려고 만들어진 제도'라는 작가의 이야기가 아주 나이스(?) 하다.
그 외에도 삶을 요리로 치자면 유전 25%, 카르마 25%, 자유의지 50%가 재료로 들어간다고 설명하며 카르마 25%로 전생의 영혼이 다음 생에 재능을 넣어준다는 이야기, 태어나기 전에 부모를 선택하기 때문에 그들을 정말로 원망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 또, 마지막에 아나톨이 아제미앙 교수를 만난다는 설정 등 읽는 내내 베르베르의 남다른 상상력을 느낄 수 있다.
내용을 더 스포하지 말고 다 읽은 소감으로 정리하자면, 굉장히 몰입해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희곡이다.
몇 시간 두뇌 휴식이 필요한 분들께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