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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 사이언스 - 프랑켄슈타인에서 AI까지, 과학과 대중문화의 매혹적 만남 ㅣ 서가명강 시리즈 2
홍성욱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월
평점 :
크로스 사이언스(프랑켄슈타인에서 AI까지, 과학과 대중문화의 매혹적인 만남) -홍성욱
이 책은 서울대학교의 생명과학부 교수인 저자가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한 '과학기술과 대중문화'를 바탕으로 쓴 것이다. 오래전에 학생의 신분을 벗어난 일반인들이 오랜만에 대학교 명강의를 책으로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책에서 다루는 사례로서 영화와 책들이 소개되는데,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그것들을 접하고 보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프랑켄슈타인>,<퀴리부인>,<뒤를 돌아보면서>,<1984>,<멋진 신세계>,<유토피아>,<새로운 아틀란티스>,<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같은 소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메트로폴리스>,<엑스마키나>,<블레이드 러너>,<가타카>,<공각기동대> 같은 영화, <코스모스>이다.
우리나라는 문과와 이과를 나누어서 한쪽만을 잘하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순수문학인 인문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많은 연구와 투자가 이과쪽에 몰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과학이 우리가 접하는 문화 속에 아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어 과학과 인문학, 사실과 가치를 나누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과학과 수학에만 편중되어 있는 이과생의 두뇌를 책과 영화에서 그려진 과학의 가치와 실상을 찾아보고 그곳에서 우리의 인생과 삶을 보다 더 잘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1부 대중문화와 과학의 크로스 - 미친과학자, 슈퍼우먼 과학자, 오만한 과학자
과학자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괴팍하고 괴짜에다가 자기 연구에만 몰입하는 남자를 떠올린다. 여전히 여자과학자에 대한 편견은 남아있다. 하지만 노벨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는 여성 과학자인 퀴리 부인이다. 여성과학자의 전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인문학적 해석을 끊임없이 해야한다.
"내가 읽는 이 전기의 원형을 만든 작가는 누구인가? 왜 그 작가는 위인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와 내러티브를 만들어냈는가? 왜 이런 내러티브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는가? 이런 이야기에서 왜곡되거나 과장된 부분은 없는가? 여기에서 사실과 달리 작가에 의해 삽입된 부분, 아니면 빠진 부분은 없는가? 그런 부분들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등등.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면서 전기를 읽는 작업은 인문학적인 해석의 힘을 이용해서 중층적으로 전기를 읽는 독법이다." -본문 81쪽
17세기에 해부학자들은 남녀와 차이가 생식기관을 제외하고는 별 차이가 없고 여성의 몸매에 굴곡이 있는 것은 지방의 차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18세기 중반 이래로 해부학자들은 여성의 골격이 더 약하고 골반이 더 넓으며 두개골이 더 작다는 것을 알아냈다. 남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두개골은 여성의 낮은 지능을 상징했고 여자의 뼈가 약하다는 것은 육체적 나약함으로 결론지었다. 이런 정형화된 이미지는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 속에서 설득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 당시 영아사망률이 높아져서 인구가 감소하고 있었다. 인구의 감소가 국력의 쇠퇴로 갈 수 있다고 우려되어 사람들은 여성이 자녀양육에 힘쓰는 일만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보았다. 또한 여자가 남자와 같이 정치, 상업, 교육, 과학 등의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가족은 물론 사회 전체에 해롭다고 간주했다. 남녀의 골격 구조의 차이를 강조하여 남녀가 본질적으로 다르고 여성이 남성에 비해 지적으로도 열등하다는 것을 합리화시키는 데 해부학은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한 학문으로 성장하였다.
인간이 지적으로 성숙함에 따라 인간의 오만함 또한 하늘을 찔렀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서 동물은 고통을 느낄 수 없다고 보고 동물의 육체는 본능적이며 영혼없이 움직이는 복잡한 기계, 복잡한 자동인형에 불과하다고 인식했다. 하지만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기에 복잡한 자동기계인 동물과 구별될 수 있고 기계는 절대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유창한 언어로 소통할 수 있고, 동물들은 특정한 한가지 행동을 잘하지만 인간은 전반적으로 광범위하고 다양한 행동을 잘한다고 했다. 즉, 인간은 뛸 수도 있고, 높은 곳을 잘 올라가고, 헤엄도 치는 존재라는 것이다.
18세기 말엽의 의사 페트루스 캠퍼는 인간과 동물들을 조사하다가 재미있는 현상을 하나 발견한다. 이마에서 코를 연결하는 선과 입술에서 귀를 연결하는 선, 이 두 선이 안면각을 이루게 되는데, 캠퍼는 인간에서 하등동물로 갈수록 이 각도가 작아져서 뽀족해진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흑인들은 그 각도가 작다는 것을 발견한다. 원숭이에서 개로 갈수록 각도가 더 작아진다. 열등한 동물일수록 입이 뽀족하게 나오면서 안면각이 작아진다고 확신하게 된다. 미각과 후각을 담당하는 입과 코가 나오면 반대로 머리는 작아져서 이마가 뒤로 들어간다. 거꾸로 머리가 커지고 주둥이가 덜 튀어나온 고등 동물일수록 안면각이 90도에 가깝게 커진다. 하등 동물일수록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않은 채 먹는 것만 탐하는 존재이며, 고등할수록 먹는 것에 대한 탐욕이 줄고, 머리 쓰는 일이 많아지면서 안면각이 커진다. 이것을 토대로 안면각이 큰 유럽인이 아프리카인보다 더 진보된 종이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인종차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천성','자연','피','유전자','본성'은 대부분 과학의 외피를 쓴 사이비과학이다. 사이비과학의 정반대는 신중한 과학일 텐데, 신중한 과학은 인종의 자연적 차이, 인간성과 지능의 유전적 차이, 고정된 성차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우리는 새로운 차별에 대해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새로운 차별은 항상 더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고, 더 은밀하게 우리의 허영심을 비집고 들어오기에 그렇다." -본문 117쪽
2부 세상과 과학의 크로스 - 미래는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과학기술의 발전이 과연 인간에게 이로울까? 과학의 발전은 유토피아로 가는길인가, 아니면 디스토피아로 가는 길인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프랜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 에드워드 벨라미의 <뒤를 돌아보면서>, 조지 오웰의 <1984>, 브루스 슈나이어의 <당신은 데이터의 주인이 아니다>, 허버트 웰스의 <타임머신>,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으면서 우리는 진정한 유토피아는 어떤 모습이며 과연 실현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디스토피아는 과연 어떤 모습이고 인간이 사는 데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곰곰히 생각해 보게 한다. 19세기의 기술진보로 증기기관차, 새로운 전신 시스템, 신문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회전 윤전기 등이 나오면서 사회는 급속도로 산업화가 되고 빈부격차가 심해진다. 물질적인 풍요는 유토피아와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사람들을 기계로 전락시키고 인간의 존엄성이 상실되는 디스토피아에 가까웠다. 에드워드 벨라미의 <뒤를 돌아보면서>에서는 모든 시민이 평등한 의무를 다한 뒤 평등한 분배와 복지를 제공받는 유토피아를 그린다. 국가에서 3년동안 일을 시켜서 그 사람의 적성을 알아내어 알맞은 직업군에 보낸다. 전문직이건 노동직이건 보수와 대우의 차이가 없다. 이 책에서의 유토피아는 비폭력적인 국유화와 산업군에 의해 건설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가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국가라는 것 자체가 상당히 거대한 기계와 비슷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기계'를 작동시키는 사람들이 큰 권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국민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기 위해서 국가는 국민의 삶에 간섭하고 감시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해서 아주 거대한 메가머신이라는 기계가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자신도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때가 많은데 그것을 기계가 과연 알 수 있을까?
메가머신은 개인들의 필요와 정보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개인정보는 누가 지켜줄 것인가? <당신은 데이터의 주인이 아니다>의 저자, 브루스 슈나이어는 이런말을 했다. "어떤 서비스가 무료라면 당신은 고객이 아니다. 당신은 제품에 불과하다."
과연 빅브라더가 모든 것을 감시하고 개인의 생각과 감정까지 제한하는 <1984>와 기술의 발달로 임신과 출산이 없어지고 아기들은 인큐베이터에서 길러지며 사람의 우울한 감정은 약물로 다 해결하는 평화와 행복만 존재하는 <멋진 신세계> 중에 무엇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가까운가?
"이 두 소설 모두에서 과거가 부정된다. 지난 역사에 대해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미래를 기획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일임에도 과거를 아는 가능성이 아예 차단되어 있다." -본문 185쪽
"우리에겐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나와 내가 속한 사회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그중 실천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실천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풍성한 언어를 지키고 언어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본문 186쪽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1984>나 <멋진 신세계>에서 묘사된 세상보다 훨씬 괜찮은 세상이라고 위안할 것이다. 걱정도 좋고, 위안도 좋지만, 한 번쯤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 우리에게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본문 187쪽
3부 인간과 과학의 크로스 - 로봇과 인간은 공존할 수 있을까
외모적으로 뛰어나거나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우월한 유전자'라고 칭한다. 그들을 보는 보통사람들은 자신
들의 평범한 유전자를 생각하면서 아무리 노력을 해봤자 우리같은 평민은 따라갈 수 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거나 아니면 모든 것을 선천적인 능력으로 돌려버리고 책임을 회피하는 변명거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유전학 같은 생명과학의 발달이 우리가 유전자를 많이 조작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아주 제한되어 있다. 심지어 과학자들 중에서는 유전자 자체가 실재하는 게 아니라, 그것은 다만 우리가 유전 현상을 잘 이해하기 위해 만든 모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본문 215쪽
"유전자가 우리 미래를 결정하는 게 아니듯, 우리 사회의 미래 역시 유전자 결정론이 지배하는 미래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결국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본문 218쪽
사이보그를 인간이라고 보는가? 기계라고 보는가? 심장박동기를 단 사람도 사이보그이다. 몸 안에 작은 기계라도 달고 있는 사람들이 해당된다. 프랑스의 엔지니어 자크 보캉송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해내는 기계들을 만들어서 보여준다. 그림 그리는 인형, 피아노 치는 인형, 글 쓰는 인형이다.
타자가 친 공을 정확하게 예측해서 뛰는 야구선수는 없다. 공의 움직임을 쫒아가서 잡는 것인데 이것은 어뢰가 목표를 쫒아가는 것과 똑같다. 이로써 인간의 의도와 목적을 가진 움직임이 기계장치와 별다를 게 없다.
"인간과 초지능의 중요한 차이는, 초지능은 인간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 사랑, 명예, 우정, 행복 등을 조금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들은 인간이 진화하면서 획득한 것이다. 인간이라는 종은 수백만 년 동안 진화하면서 타인과의 협력이 중요하고 공감이 중요하며, 공감을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고, 살아남으려면 자식을 낳아야 하며, 자식을 낳으려면 짝을 찾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몸소 깨달았다." -본문 270쪽
4부 인문학과 과학의 크로스 - 과학의 시대, 생각의 경계가 무너진다.
"과학과 인문, 예술, 사실과 가치의 융합은 지금 우리에게 매우 절실한 일이다. 인류의 삶이 비참한데 나의 삶이 풍요로울 수 없고, 지구상의 다른 동식물들의 삶이 피폐한데 인류만이 태평성대를 구가할 수는 없는 법이다. 과학과 인문학의 결합은 나를 둘러싼 조건들을 이해하고 보다 적극적인 삶을 살기 위해 필수적인 일이다." -본문 282쪽
기술이 발전하면서 전차가 생겨났다. 전차는 단지 교통수단이 생긴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전차가 사대문을 드나들면서 성안과 성밖의 지리적인 경계를 허물었고 성문을 여닫는 전통적인 시간관념도 무너뜨렸다. 그리고 전차는 같은 공간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양반과 상놈을 같이 태움으로써 신분적 경계도 조금 허물어뜨렸다. 전차 안에서 마주보고 앉은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고 남들이 보는 자신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실이나 가치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은 우리의 일상과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사실과 가치는 그 연결이 느슨하거나 팽팽한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 속에서, 마치 동맥과 정맥이 모세혈관을 통해 연결되어 있듯이 미세한 연결망들을 통해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사실만의 세상에서 살아가지 않듯이, 가치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지도 않다." -본문 323쪽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에 소설은 상상력을 동반하지만 과학은 발견에 기반을 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학도 무엇인가를 만드는 활동이기 때문에 과학에서도 상상력이 매우 중요하다. 갈릴레이의 물리학은 자연에 있는 법칙을 그냥 반영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규칙이나 법칙이 나타날 수 있는 공간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창조해내었다. 과학자와 예술가는 결국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과학과 인문, 예술의 융합, 즉 사실과 가치를 넘나드는 일은 삶을 총체적으로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다. 지구가 오염되어 가고 동,식물이 죽어가는데 우리의 삶이 평온할 수 있을까? 과학과 인문학의 결합은 나를 둘러싼 조건들을 이해하고 이런 조건들 속에서 어떻게 이겨내고 극복하며 적극적인 삶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해 꼭 필요한 일이다.
"우리의 미래는 우주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성찰하는가에 달려있다." -본문 347쪽
이 책은 과학이라는 팻말을 걸고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그 속에는 우리가 삶 속에서 과학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들이 곳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과학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던 오해들을 풀어준다. 과학이라는 사실만에 집중하지 말고 그것들이 우리 삶에서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또한 우리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우리는 정확하게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과학이라는 이름아래 나오는 것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영향을 끼치는지 알게 되고 그것들을 인간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4차 산업혁명의 기로에 선 지금, 우리가 과학과 인문, 예술의 결합에 주목해야 할 때에 읽어보면 좋은 책이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선영아, 사랑해" https://blog.naver.com/imanagei/22146287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