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여자들 -박문영<그래비티북스>
2019.1.4 ***

새로운 젠더감수성을 일깨우는 한국형 페미니즘 SF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SF'라는 장르와 나에게 소설로는 좀 생소한 '페미니즘'. 과연 이 둘의 결합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단순한 호기심이 일었다. 'SF'만 있거나 '페미니즘'만 있었더라면 아마 손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SF'라는 장르는 왠지 가독성은 있지만 아이들의 상상력만큼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유치할 거 같고 가벼울 거 같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래서 이 소설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가독성 최고의 책이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한 문장, 한 문장에서 느껴지는 섬세한 묘사와 관찰력, 그리고 육감을 사용한 감각적인 묘사들이 빛을 발했다. 문학적 감수성이 여기저기서 팡팡 터졌다. 신선한 묘사들로 읽는 묘미를 더했다.
"성연이 쇠똥구리처럼 그들의 일상을 공굴리고 있었다." -본문 29쪽
"붓기가 남은 입술이 명태처럼 벌어져 있었다." -본문 92쪽
어느 날부터인가 구주시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아내에게 화를 내고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들이 폭력을 행하는 순간에 연기처럼 그자리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실종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정부와 관계부처에서는 왜 이런 사건이 발생하는지 과학조사를 벌이고 과학자들은 여러가지 연구를 시도해보고 원인을 파악하기에 이른다. 원인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불안에 떨며 라면을 사재기 하고 서로를 불신하며 외출을 삼간다. 그리고 어처구니 없는 예방책을 내놓는다.
* 성인 남성 유의사항
1. 손을 씻고 2. 마스크를 하고 3. 외출을 자제해요.
조작된 유인물을 유포한 사람은 결국 체포된다. 이런 불안속에서 남자들은 자신이 목숨을 언제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병원과 의료원, 보건소에 방문했고 주민들은 식료품을 모으고 소화제, 해충 박멸제, 호신용품 따위를 사들였다. 어떤 이들은 항생제를 모으기도 했다. 점점 폭력을 행사하는 남성들이 사라지자 구주에는 착한 남자들과 여자들만이 남게 되어 안전한 도시로 급부상하게 된다. 타지의 여자들은 이곳으로 이사를 오기도 하고 방문을 한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 맞는 말이네요. 역시 남자들이 갈 곳은 하늘." -본문 146쪽
그동안 남성들의 권위주의와 여자를 은근히 무시하며 자신들의 영역 넓히기에만 힘쓴 남성주의의 사회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여자들은 점점 더 큰 목소리를 내며 실종된 남자들을 찾을 필요가 없다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늘 모든 주장에는 반대편이 언제나 존재하는 법. 실종자들을 감싸며 남자들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대치한다.
구주시가 폐쇄되어 사람들의 이동이 금지되었을 때 성연의 남편은 타지로 외근을 간 상태였다. 오랫동안 남편과 떨어져 지내면서 성연은 자신의 대학선배인 희수와 점점 더 가까워지고 남편의 애매모호한 발언으로 감정들이 상하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던 남여 불평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과감없이 밝히고 그것으로 남과 여를 대치상태에 놓이게 한다. 그동안 남성들의 사회에서 여자가 당연히 참고 살아야한다는 상황들이 남자들이 실종되어 없어지자 여자들은 해방감을 느끼며 남편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간절히 바란다. 남자들이 없어지자 비로소 여자들은 마음속 깊이 자유를 느끼게 된 것이다. 피해자였지만 가해자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했던 여자들이 드디어 족쇄를 풀고 자유롭게 홀로 당당히 존재하게 된 것이다.
폭력성을 가지고 있는 남성들이 사라지자 구주시에는 술집, 백반 식당, 중국집 등 영업을 포기하는 상점들이 늘어났다. 술에 취한 남성들의 무리를 더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가슴에 띠를 두른 남자들이 문학관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부서진 옹벽 앞을 지나며 서로의 손을 잡았다. 캠페인 홍보지 몇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1. 매사에 감사합니다. 2. 상대의 입장을 헤아려 보세요. 3. 누구에게나 반갑게 인사해 봐요. 4. 칭찬을 아끼지 마세요. 5. 미소를 지어요. 6. 정직하게 지내요. 7. 지는 게 이기는 것이랍니다.' 아이들이 인쇄물로 종이배를 접었다. 동네에서 마주치는 어른 전부가 괴상하게 친절했다. 그들은 지금 여기와 여름성경학교의 차이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본문 181쪽
"화를 못 참는 자는 더 허약한가. 모두가 허약할 뿐이라면 무엇을 탓할 수 있을까. 고개를 젓던 성연은 이런 나날을, 외부의 개입과 관여를 오랫동안 은밀히 기다려왔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판단은 금방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사라지지 않는 남편을 성가셔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단란한 가정을 조소하는 이들이 있었다. 성연은 자신이 선택한 배우자를, 기능이 다 한 소모품처럼 취급하는 여자들이 잔혹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말은 러시아 해협을 떠도는 유빙보다 차고 무정했다." -본문 247쪽
실종자의 가족들을 옹호하는 성연과 실종자들의 폭력성에 희생당한 여자를 옹호하는 희수는 자신의 관점을 철회하지 않는다.
"왜 그렇게 말했어? 거기서 꼭 그런 소릴 해야 돼?"
"넌 실종이 해방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 뜻은 맞지. 여자들을 억누르고 있던 건 남자들이잖아."
"단순히 남자로 태어났다는 게 실종의 원인일 수 있어?"
"그래. 그 단순한 차이를 차별로 바꾼 게 누군데?"
"그래서 남자들이 불시에 사라지는 게 정말 옳은 거니?"
"그럼 나쁜 거야? 나아진 건지, 아닌지 그것도 분별이 안돼?"
"입장을 정하면 책임이 따라오지. 그래서 결정하라고 하는 걸 알아. 하지만 속도가 다르다면, 판단을 내리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리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끄는 건, 성연아. 속도가 아니라 상태지. 정체성이고."
"저 사람들은 나를 간단히 규정했어. 판단을 확신하는 건 폭력이라고."
"아니, 보류하고 방치하고 침묵하는 게 폭력이야. 실종자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저 사람들에게 모독이란 걸 모르겠어? 남자들이 우리한테 기생하면서도 희생을 강요해왔잖아."
"뭐가 그리 쉬워? 넌 왜 네가 가장 미워했던 사람처럼 굴지?"
"누구? 헤어진 남편? 없어진 아버지? 도망간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