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5월
평점 :
품절


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문학동네>
2018.11.27 ***** 



 소설가는 어떤 삶을 살까? 어디서 소설의 영감을 얻는 걸까? 이렇게 재미있고 참신한 이야깃거리들과 영화보다 찬란하고 웅장한 이미지를 어디서부터 가지고 오는 걸까? 요새 글을 쓴다는 것에 관심이 많이 가자 그들이 삶이 궁금해졌다. '소설가의 각오' 라는 제목부터 벌써 묵직함이 느껴진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각오를 해야만 하는 걸까?
 마루야마 겐지는 낯선 이름이었다. 일본의 유명한 작가들의 이름은 얼추 들어봤는데 이 작가의 이름은 굉장히 낯설다. 그는 순수문학을 하는 작가이다. 일본의 사소설과 가벼운 소설들을 경멸한다. 그의 말투는 자못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칼처럼 매섭다.
 글은 그 사람의 성격, 인성을 반영한다. 그의 글에서 나는 왠지 꼬장꼬장한 괴짜 할아버지가 열을 올리며 글을 쓰는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의 주관과 삶의 가치관이 확고하여 어떠한 틈도 허락하지 않는 정직하게 순수하게 한 우물만 파는 사람말이다.
 그의 소설가 데뷔는 자못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평소에 책 한권 읽지 않다가 국어교사인 아버지의 서재에서 우연히 발견한 '백경'이란 단 한 권의 책을 읽고 삶이 바뀌었다. 그것의 영향으로 배를 타는 선원을 키우는 고등학교로 가서 모스부호로 정보를 전하는 통신을 배웠다. 그 후로 회사 전신과에서 근무하다가 우연히 처음 쓴 소설이 아쿠타카와 상을 수상하였고 그 길로 소설가로 들어섰다. 정말 소설같은 이야기다. 그는 책이라고는 담을 쌓고 살았지만 고등학교 시절 내내 그는 영화에 빠져서 영화를 보고 이렇게 찍었으면 이 부분은 이렇게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나름의 평론을 재미로 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영화와 소설은 이야기를 만드는 도구는 다르지만 이야기라는 본질은 같다. 그렇기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 보았던 영화가 그에게는 소설의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싶다.
 얼떨결에 소설가에 입문한 그는 소설가라는 테두리 밖에서 있다가 갑자기 안에 들어왔기에 아무래도 그 모임에 속해있는 사람들의 부패, 악습이 더 잘 보였던 거 같다. 어줍잖은 글로 선배나 편집자들을 줏대없이 따르고 돈에 눈이 멀어서 진정한 문학을 탐하지 않는 속물들에 질려버린다.
 그는 고등학교를 진학함에 있어서도 자신의 주관을 뚜렷이 세우고 자신의 가치관을 따라 생각하고 생활한다. 절대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것에 타협하지 않으며 자신의 정한 원칙과 가치는 칼캍이 지킨다. 그것이 항상 최고 높은 곳에 위치한다. 그 당시 그는 십대였는데 어떻게 저런 가치관을 확고하게 성립할 수 있었을까?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부모와 시대로부터 폭력적인 피를 이어받지 못했다. 포식의 시대와 행복한 가정을 당연시하는 환경에서 자란 탓에 애당초 거역을 모른다.  눈앞의 이익만을 좇아 신나게 놀고 안이한 상냥함을 유일한 안식처로 삼는, 뭐라 말할 수 없이 기분나쁜 인종이 되었다. 조금만 노력하면 수중에 넣을 수 있는, 현실적이라면 너무도 현실적인 꿈밖에 추구하지 않는 여자의 삶 그대로다.                    -본문 142쪽
 한창 젊은 시절에 자신의 온 정열을 바쳐 노력을 하다니, 정말 한심스런 일이다. 이 일에 실패하면 끝장이라면서, 긴장된 나날을 보내는 것은 젊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행위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중략) 이 세상이 요지부동인 것처럼 보여도 실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둠에 지배되고 있음을 알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사나이는 변화의 소지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중략) 자신을 옭아매지 않는 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본문 155쪽
 제목을 '소설가의 각오'보다는 '젊은이의 각오'라도 좋을 만큼 그는 젊은이들이 어떻게 삶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많이 보여준다. 취직이 안되어서 힘든 젊은이와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는 청소년들이 보면 좋겠다 싶다. 날카로운 뼈있는 말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몸이 그렇게 되자 정신도 이상해졌다. 생각은 점점 나약한 쪽으로 흐르고, 자신을 부정하는 언어들만 잇달아 떠올라, 흔히 있는, 내가 경별하는 소설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언어에 매달려 언어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삶이 되고 만 것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소설가의 고뇌의 원천은 일상생활의 태도에 있지 않을까. 그렇게 무질서한 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인간이든 기존 소설가와 비슷한 타입이 되지 않을까.                   -본문 195쪽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부모가 한마디 잔소리라도 할라치면, 나는 오히려 큰소리를 치며 반격을 했다. 여자와 부모가 하는 소리에 일일이 상대를 해보야 득될 게 없다. 그들은 늘 자신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를 주면 둘을 달라 하고, 둘을 주면 셋을 바란다.       -본문 204쪽
 그는 여자와 여자같은 남자들을 경멸하고 싫어한다. 왜 그렇게 됐을까? 지금 저자는 70대 할아버지니까 여자에 대한 불공정한 시각을 갖고 있을 수도 있겠다 싶지만 젊은이때부터 저런 확고한 생각이 있었다. 시대적인 문제인가? 가정교육의 문제인가? 여자에 대한 혐오는 엄마에게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처음으로 만나는 여자는 엄마이기에. 물론 나의 추측이지만 그의 여자에 대한 혐오는 일관성있게 지켜진다. 저자가 너무나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말을 해서 그런걸까? 대부분의 남자들이 사실은 여자에 대한 원시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의 체면과 이미지를 위해 입밖으로 꺼내놓지 않은건가?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저자는 정말 공식적으로 인쇄화되어있는 길이 길이 남을 공간에 여자, 여자같은 생각을 가진 남자, 평론가들에게 대해서 적나라하게 혐오하는 말을 서슴없이 남긴다.
 과거의 내가 그랬으니 미래의 나도 그럴 것이라는 발상으로는 그런 감동을 절대 자기화할 수 없다. 나는 미지의 존재이며 앞으로도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순간, 인생은 빛을 발하고 충만해지는 것이며, 또한 영원해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펼쳐나가는 강인함이 필요하다. 마음의 명령 따위에 일일이 따를 수가 없다.   -본문 208쪽
 출세를 하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대학의 조교수들이 문학평론가라는 간판에 매달려 강단에서나 벌일 법한 저 음습한 줄다리기를 고스란히 문학판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끊임없이 살피고 상하좌우 관계를 의식하는 주제에 어떻게 평론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들이 어떻게 문학 속의 감동을 발견할 것인가. 타인의 삶을 평가하기 전에 스스로의 자세를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본문 225쪽
 유시민 작가가 이런 말을 방송에서 했다. 요즘에는 평론이 죄다 좋은 말 뿐이라고. 비평이 없어서 정말 안타깝다고 했다. 다양한 비평은 다양한 생각을 이끌어내고 다양한 시각을 보여줄 수 있다. 그리고 그로인해 작가들은 더욱 더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는 것이다.

 요즘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이십대는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시절로 보인다. 이십대란, 혼자서 많은 일을 해내기 위한 힘을 체득해야 하는 귀중한 시기이다. 이시기에 득도 해도 안 되는 어중간한 친구를 잔뜩 갖고 있어봐야, 그저 외로움이나 달랠 수 있을 뿐이다. 지리멸렬한 만남을 거듭한다면 자립과 독립으로부터 멀어지고 말 따름이다. 한 사람의 어엿한 남자가 될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본문 236쪽
 나의 20대를 돌이켜보면 저자의 말이 납득이 간다. 외로움과 맞닥뜨려보지 못했기에 그것의 존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일부러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속에 숨어 있었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휩쓸려 이리저리 떠밀려 다녔던 거 같다. 그 당시에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것을 마주했다면 인생이 달라졌지 않았을까 후회해본다.

 나는 심심풀이로 책을 읽는 것이 싫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오토바이를 타고 바람처럼 질주하는 편이 좋다. 그쪽이 훨씬 재미도 있고, 훨씬 감동적이다. 젊은 사람은 활자의 세계에 탐닉하는 것보다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자신의 눈으로, 귀로, 온몸으로 현실이 무엇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젊은 시절부터 주위에 언어의 성을 높이 쌓아놓고 그 환상의 테두리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서려 하지 않으면서, 세상에 대하여 코멘트를 일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본문 246쪽
 청춘이란 달콤한 향기에 취해 천국 같은 나날을 보내는 젊은이들도 많다. 그들이라고 전혀 고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강을 건너려 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평생 건너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건너지 않으면 불필요한 고뇌가 항상 따라다닌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고뇌의 횟수와 내용을 오히려 나날이 불어난다. 젊음에 부여된 그칠줄 모르는 체력과 한결같은 기력은 놀기에 전념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강을 끝까지 건너라고 있는 것이다.                                 -본문 251쪽
 처음에 저자의 말투가 너무 고압적이고 공격적이어서 반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글들을 읽다보니 좀 걱정이 되었다. 평론가나 편집장들을 이렇게 호되게 혼을 내면 어떻게 그들을 볼 수 있을까. 작가도 사람이니 사회적인 인맥이 있을텐데 말이다. 그리고 그 걱정은 다시 작가의 확고한 믿음으로 바뀌었다. 자신이 떳떳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하면 저렇게 남을 질타할 수 없다. 확고한 자기 주관이 세워져 있고 자신이 그 뜻을 토대로 삶을 살아가고 정직할 수 있다면 저런 쓴소리도 당당히 할 수 있다. 또한 작가는 일을 통해서 만나는 사람과는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렇기에 저런 날카로운 비판도 얼굴 붉힐 일 없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 나는 벌써, 아무런 궁리도 하지 않고 이미지를 줄줄이 엮어 나가고, 설명적인 대화나 흔해빠진 심리와 정경을 묘사하는 것, 멋대로 끼워맞춘 우연이나 억지로 스토리를 늘리는 것 같은 구태의연한 방식에 매달려 있다가는 소설쓰기가 매우 힘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 카메라가 아니고 펜을 사용하는지, 왜 영상이 아니고 언어를 사용하는 것인지부터 다시 점검하여, 전적으로 언어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장점을 활용하여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노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소설은 가까운 장래에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라는 판단이 선 것이다.                    -본문 260쪽
 느닷없이 소설을 쓰기로 결정한 그 무렵, 나는 틀림없는 스물두살이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자본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펜과 종이, 사전과 시간, 그리고 좋은 소설을 쓰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어떻게든 결론이 날 직종이었다. 그 점이 다른 예술과는 다른 매력이었다. 물론 재능이라고 불리는 힘도 필요하다. 그러나 요즘에는 결함이 있는 인격을 관리하여 소설로 향하게 하는, 모순된 또하나의 재능을 갖고 있어야 돌파구를 찾지 못해 자살하고 마는 비극을 맞지 않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문 274쪽
 22살. 그 나이에 저런 깨달음이 있을수가... 범상치않다. 그는 이미 애늙이처럼 삶을 통찰하고 있던 것이다. 나는 저자가 일찍이 외로움을 직면하고 고독을 즐기는 젊은이기에 저런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집필이란 머릿속에 있는 애매모호한 이미지를 언어로 전환하는 작업이니만큼 도구인 언어는 언젠가는 반드시 녹이 슬게 마련입니다. 이미지를 백 퍼센트 언어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죠. 불가능한 일이지만 가능한 한 백 퍼센트에 근접시키기 위해 애써야만 합니다. 그 문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자신이 과연 몇 퍼센트 정도를 문자화하고 있는지,  그 인식 여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 작가가 많은 것 같습니다. 고작 이삼십 퍼센트를 문자화해놓고 백 퍼센트를 달성했다고 믿으면서 원고를 편집자에게 넘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본문 299쪽
 내게 유일한 관심사는 소설 언어라는 가장 인간적인 도구를 마음껏 구사한 소설을 통하여,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이란 생물의 핵심에 얼마만큼 육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소설을 써서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원고료와 인세, 그리고 그 어떤 사악한 힘에도 오염되어 있지 않은 독자의 감상이다. 그 점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만약 불행하게도 내 마음에 조그마한 욕심이 생긴다면 나는 이미 소설을 쓸 자격이 없는 것이다.         -본문 318쪽
 대부분의 편집자들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빨리 원고를 받을까 하는 생각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거짓말이라도 서슴지 않는다. 그 거짓말을 간파하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오해하고, 자기 작품을 바로 보지 못하게 된다.      -본문 326쪽
 창작이란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쓰지 않은 소설을 지향하며 정신의 깊은 곳을 비집고 들어가는 행위이다. 당연히 바닥모를 불안감이 따라다닌다. 누군가에게 매달리고 싶고 누군가와 어울리고 싶은 기분도 든다. 그러나 그러면 끝장이다.            -본문 326쪽
 회사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무엇인가를 창조하지만, 소설은 오로지 혼자 만들어내는 것이다. '고의 자세'는 젊은 작가를 스스로 단련시키면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마음이 깊이를 그윽하게 해줄 것이다. 바늘처럼 가늘었던 감성을 창처럼 굳건하게 길러줄 것이다. 그리고 차츰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는 눈을 갖게 해줄 것이다.                  -본문 327쪽
 만약 소설을 쓰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우선 의지하려는 마음을 버리라고.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문학 또한 얼마만큼 개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에 따라 성패가 결정난다. 불안이나 고독에서 슬픔과 분노가 태어난다. 그 벽을 돌파한 곳에 나 자신의 혼이 있다. 거기에 표현할 가치가 있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까 불안과 고독이야말로 창조하는 자들의 보물이다.                    -본문 333쪽
 요즘에는 너도 나도 인터넷상으로 자신의 생각들을 글로 남긴다. 글을 쓴다는 것이 이제는 누군간의 독보적인 소유가 아니라 만인이 애정하는 것이 되었다. 자신의 글에 누군가가 호응해주거나 좋다고 공감을 누르면 마음이 뿌듯해진다. 그것이 마약처럼 더 좋은 글귀와 공감가는 글을 쓰려고 한다. 누구나가 손쉽게 글을 남기니 창작의 고통이니 고뇌니 하는 말들이 다 옛날 말처럼 느껴진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가 책을 출판하는 이 시대에 저자의 말은 큰 울림을 남겼다. 외로움과 고독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창작을 할 때의 고통과 고뇌가 아닌가 싶다. 사람들 속에 너무 오랫동안 있으면 잠시 혼자 있고 싶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혼자있는 시간이 어느정도 되면 다시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서 그들과 대화하고 소통하고 싶다. 사람과 소통하지 않고 자신만의 동굴에 갖혀 있는 것 만으로도 창작의 환경이 되는 것이다. 소설을 쓰고자 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분들에게 꼭 필요한, 자신의 의지가 약해질 때마다 처방받는 약으로 약통속에 고이 모셔두어야 하는 책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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