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난 300일의 마음수업
이창재 지음 / 북라이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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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이창재 / 북라이프 / 279

 

책을 읽으면서 눈물이 나는 경우가 간혹 있었는데 슬픈 소설도 아니고 처량한 이야기도 아닌 이 책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구도의 길이란 무엇이고 인간의 길이란 무엇일까.

영화가 먼저고 책이 나중이다. 경상북도 팔공산 자락의 비구니도량 백흥암과 그 안에서 수행에 정진하는 스님들을 담은 영화 <길 위에서>가 개봉되고, 미처 못다한 이야기를 글로 풀어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둘 다 보지 못했는데 비슷한 성격의 영화로 수도원의 일상을 담아낸 프랑스 영화 <위대한 침묵>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감독이자 작가인 이창재는 구도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젊은 시절 한때 출가를 생각한 적도 있다한다. 삶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여러 가지 추구가 이제야 어떤 형태든 결과물을 낳은듯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랬듯 나역시 그런 고민이 잠시 있었다. 감히 속세를 떠나지는 못했지만 스님들의 일상을, 그것도 비구니스님의 처절하고 철저한 수행의 모습을 책을 통해 엿보면서 대리득도 아닌 대리체험을 맛보고 싶었다.

 

 

 

 

 

현재 조계종의 템플스테이는 참된 나를 찾아 떠나는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그만큼 현대인은 자기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지낸다는 뜻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는 어쩌면 진부한 물음이지만 인류의 이지가 발전해온 이래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 삶에 대한 명제다. 종교적, 특히 불교적 질문처럼 생각되지만 사실 철학적 명제이고 근대의 사상적 지평을 연 데카르트는,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근본적 질문이 불교의 템플스테이에 적용되는 것은 그만큼 현대인들이 자아를 찾기 어려운 생활을 하고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다는 것은 마음이나 몸의 주체를 궁구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생각이나 의지의 주체가 나인듯도 하지만 근간의 연구를 보면 무의식이 실질적 에 근접한 것 같기도 하고 뇌나 몸 자체, 혹은 내몸속의 미생물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불교란 본래 무아(無我), ‘가 없는 종교다. 제행무상 제법무아라 했으니 객체나 실체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종교가 바로 불교다. 구도에 나선 스님들은 이런 진리를 깨닫기위해 일생을 바쳐 탐구한다.

 

 

 

신문에 간혹 나오는 일부 승려들의 이해할수 없는 일탈행동이 불교를 대중과 멀어지게 하고 내게도 크나큰 실망을 주었지만 이 책에 나오는 스님들의 수행생활은 승려의 근본이란게 무엇인지에 대한 확실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첫페이지에 나오는 절의 사진은 문틈으로 비춘 전각의 일부인데 잠시 몸을 드러낸다는 인상을 준다. 안과 밖이 다르지만 문턱을 들어서는 순간 보이고 안다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다음에 나오는 백흥암의 전경은 잘 정돈된 절간의 모습인데 돈이 많은 절인가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읽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사실상 1980년대부터 시작된 백흥암의 살림살이는 당장 내일 먹을 쌀이 없어 걱정했던 과거를 안고있었고 일반 신도를 받지않는 선방의 특성상 지금도 절약과 근검과 운력으로 수행에 매진하는 진짜 절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어찌 무욕 무아의 선원이 되었을까. 신도도 안받고 연등도 안다는 절이라니 대단하고 신선하다. 무소유를 실천하는 진정한 수행도량이다. 일주문을 빛나는 황금으로 장식하고 반짝이는 기와를 얹어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절이 태반이고 교회도 역시 그러한데 이러한 절이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법력이다.

 

 

 

 

 

 

 

 

어째서 스님이 되었을까. 더구나 비구니가.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옛노래를 인용했는데 속세에 두고온 님생각에 여승이 흐느껴운다는 노랫말이다. 과거에는 그런 경우가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런식으로 속업을 잊기위해 스님이 되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스님의 말씀으로는 세파에 찌들어서 오면 초발심을 내기 어렵고 도피성 출가는 스스로 견디기 어려워 짐을 싸고 만다고 한다. 스님들의 출가사유는 다양하지만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번듯한 직장에 잘나가던 여자들이 어느날 갑자기 불현듯 다른 삶, 진리의 욕구에 세속의 인연을 단칼에 끊고 출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해가 되고 그 용기가 대단하다. 그렇게 승려가 되고자 입문했으면 먼저 행자라 불리는 기초 수행과정을 거쳐야 한다. 꽉 짜여진 일과와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행자 수행기간이 1,2년 정도다. 그 과정을 하심(下心)이라 부르는데 마음을 내려놓는다 비운다는 뜻이다. 채우기위해서는 비움이 먼저다. 이 기간을 이기지 못하고 힘들다거나 자존심을 상한다거나 하면 스님이 될수 없다. 고난의 기간이 있어야 스님이 될수 있고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백흥암은 일을 많이 시킨다고 전국에 소문나 아는 사람은 백흥암에 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행자수련기간도 타 사찰보다 길다고한다.

 

 

 

명문대 졸업후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임용 최종면접을 앞두고 이길이 아닌 것 같다며 출가해 백흥암에서 행자생활을 하고 있는 상욱행자는, 맞다 그르다가 아닌 선택의 문제라고 말한다. 진정 원하는 무엇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칠수 있을까? 그러기위해 자신이 가진 전부를 버릴수 있을까?

 

 

 

살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많이 들어본 평범한 어구이건만 이 책에서 보니 정말 가슴에 지긋이 와 닿는 느낌이다.

밥하는 것도 다 수행입니다. 뭘 해야할 때 딴 생각을 하지않고 집중하는 거지요. 밥할때는 밥만 생각하면 돼요. 다른 생각을 하다보면 밥을 태우거나 뜸을 잘 못들이게 돼요. 내가 하고있는 행동, 거기에만 온전히 마음을 쏟으면 됩니다....”이 역시 너무 평범한 말이다. 누구나 다 아는 말인데 실제로 행하기는 어려운 그것, 그것이 도인가...

백흥암의 해우소 청소는 법랍이 높은 스님이 맡는다. 군대로 치면 화장실 청소나 보일러 담당을 말년 병장이 담당하는 격이다. 왜 그런가. 아직 세상과 인연의 고리가 남은 행자나 초보스님이 맡으면 더러운 곳이라는 선입견 즉 분별심이 생긴다는 것이고 또 사용자 입장에서도 큰 스님이 청소하는 곳이므로 깨끗이 쓰고자하는 마음가짐을 가질수 있다는 것이다. 사찰의 오랜 지혜중 하나다.

 

 

 

속세의 친구사이에 해당하는, 도반이라 불리는 스님들과의 우정과 교류에 대한 글도 있고 한번 들어가면 쉽게 나올수 없는 무문관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고시원같은 세평 쪽방에서 하루 한끼밥만 먹고 종일토록 참선수행만 하는 곳. 의지만 신심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생활이다. 300일에 걸쳐 스님들을 따라가며 촬영하고 그 이야기를 남긴 <길 위에서>는 단지 보기만 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인간과 진리에 관한 한편의 체험 보고서다.

 

 

 

“...내가 발을 딛고 서있는 이곳이 바로 수행을 위한 최적의 공간이니 여기서 목적지를 향해 꾸준히 가면 된다... 결국 지금 아닌 언젠가여기가 아닌 어딘가는 없다는 말이다...‘이곳 이 자리 여기서 잘하는 게 제일 중요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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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의 역사 1 - 풍속과 사회
에두아르트 푹스 지음, 이기웅 외 옮김 / 까치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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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의 역사1 풍속과 사회 (개역판)

에두아르드 푹스 / 이기웅 박종만 옮김

까치 / 404

 

오래전에 누군가 내게 이 풍속의 역사 시리즈를 선물했다.(4)

그때는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고 그저 한 유행인 미시사의 하나쯤인 줄로 알았다.

군데군데 삽화가 색정적이어서 마치 선데이서울의 독일판인가 싶기도 했는데

아마도 그림에만 집중하느라 내용을 보지 못했나보다. 시간이 흘러 내앞에 또다시 이 책이 나타났다. 4권중의 제 1권이긴 하지만 반가웠다.

그리고 읽었다. 이런 책인줄 몰랐다.

 

한마디로 이 책을 정리하자면 사회주의 역사가의 눈으로본 성과 성풍속의 사회사다.

저자인 에두아르드 푹스는 캐리커쳐전문가로 유명하다고 한다. 역자인 이기웅은

열화당의 대표인 그 이기웅이다. 맨뒤에 역자후기가 있는데 번역서의 저본으로

야스다 도쿠타로의 일본번역서를 이용했음을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과거에는

대개 서양서를 번역하면서 일본역서를 원전삼아 번역하는 일이 많았다.

어떤 이는 서양원전과 참고본인 일어판을 함께 소개하기도 했지만 많은 번역자들이 일본어판을 원전삼아 번역했다. 그 이유는 원서번역에 필요한 실력이 부족해서

일수도 있고 번잡해서 일수도 있지만 일본번역서가 원전에 가깝게 훌륭한 번역을

해냈고 일본어가 번역하기에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처럼 솔직하게 일본어판을 대본삼았노라 고백하기란 쉽지않은 일이다.

일어번역자인 야스다 도쿠타로는 이 책의 번역에 35년이 걸렸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열정과 집념이다. 한문 또는 동양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거의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한자자전에 <대한화사전>이라는게 있는데 당시에 우리는 그걸 제교철차라고 불렀다. 모로하시 데쓰지라는 이 사전편찬자의 열정은 과거에 한문공부를

조금이라도 한 사람이면 다 아는 얘기다. 그것 다음에 <사해> <사원>

이야기했다.

이 책의 일본역자도 그런 정열을 불태워 번역을 해냈고 그책을 번역한 책이 까치

풍속의 역사라면 엉터리번역은 아니란 뜻이다.

 

저자는 성풍속이야말로 인간의 역사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라고 한다.

왜 아니겠는가. 성과 사랑은 본능중에서고 가장 강력한 본능이고 쾌락중에서

가장 큰 쾌락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성생활이 시대의 특징을 가장 잘 반영할 뿐만 아니라 시대,민족,계급의 본질이 그속에 가장 잘 나타난다고 한다.   성행동은

도덕관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는데 시대에 따라 변하고 도덕관 역시 항상

새롭게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책을 통해 저자가 밝히려는 것은 과거 모습의 정확한 재구성, 그리고 그안에

담긴 도덕과 성의 계급적 본질이다. 그러면서 이론적 분석이 목표가 아니라

과거사실을 생생하게 밝히는 것이 목표라고 밝힌다. 그래서 이 1권은 네가지의

주제로 분류되었는데

모럴의 기원과 본질, 르네상스의 본질, 색의 시대(절대주의시대), 부르주아의

시대 라는 목차로 구성되었다. 원서는 세권인데 역자들이 각권의 서두에있는

이론적 분석을 모아 따로 한권으로 만들어 그것을 1권으로 편성하여 전체 네권의

구성을 만들었다.

 

저자가 밝히는 성과 도덕의 관계나 성행동의 여러 가지 변화 등은 모두 개인적인

사랑 따위가 아니고 경제적 조건, 경제적 이익에서 나온 결과에 불과하다.

일부일처제는 사유재산제도에서 나온 남자의 지배 여자의 억압의 결과이며

부자연스러운 질서다. 따라서 자연스러운 질서의 복수가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사회구조로서의 간통과 매춘이다. 여자의 복장이나 혼외관계, 매춘과 간통,

연애와 방탕 등 모든 성행동의 기저에는 각 시대를 관통하는 경제조건이

강고하게 존재하고 있다.

 

저자가 중세이전을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는데 이 책은 르네상스 이후를 그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봉건귀족과 신흥부르주아 자본가의 출현, 절대주의 왕정과 부르주아의 관계, 자본주의 성립이후 현대의 문제까지(저자는 1900년대초에 저작을 완성했다) 모든 도덕과 성은 경제문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사회주의자 답게 저자는 이를 토대라고 부른다. 토대는 관념을 지배하므로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연애 감정 또한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는 난잡한 교제가 용인되고

어느 시대는 여자의 다리를 언급하지도 못하는 도덕율의 원천 또한 경제적 토대에서 기인한다.

 

요컨대 경제조직이 변화해감에 따라서 계급이익과 사회적 요구와 더불어

계급구성도 변해가기 때문에 각 시대는 다른 도덕율을 받아들이고 또 다른 도덕의 표준을 요구한다. 바꾸어말하면 사회의 변화는 성모럴의 규칙을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내가 어릴때는 다큰 남녀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기도 힘들었는데 지금은 길거리에서 스스럼 없이 키스하는 젊은 연인들을 보기 어렵지 않다. 이런 도덕관념의 변화가 저절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경제조건이 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절대주의 시대는 왕권이 강화되면서 사회전반적으로 위엄과 화려함이 강조되고

그에따라 위선과 잘난척이 판쳤다. 여자숭배가 유행하여 모든 여자들은 남자에게

쾌락을 주기위해 노력했고 향락이 인생의 가장 큰 목표가 되었다.

 

부르주아 자본주의 시대는 겉으로는 풍기를 단속하고 방정한 품행을 강요했지만

남성우위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았고 곧 상류층이나 하류층을 가리지 않고 돈으로 여자를 사는, 즉 여성의 상품화가 시작되었다.

 

보는이의 관점에 따라 역사는 다르게 서술되겠지만 반대로 참신한 면이 부각될

수도 있다. 저자의 주장대로 여자는 인류역사에서 항상 약자고 남자의 부속물로

취급되었으므로 성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의 장점이라면

많은 양의 자료를 가지고 근대이후 성의 역사를 사실대로 표현하다보니

상류귀족층의 성행태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성행동을 많이 다루어 결국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가 민중이라는 점을 나름대로 설명했다는 것이리라.

 

나머지 2,3,4권은 각 시대별 구체적인 현실을 다룬 내용이라 속물적인 흥미로움도 있겠지만 저자가 말하는 본질이 경제적 토대와 이해관계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왜 어째서 그랬는가를 충분히 알아가며 읽을수 있을 듯 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성풍속의 역사가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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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제주도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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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7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유홍준 / 창비 / 469

 

신혼여행이라면 대개들 처음으로 비행기타고 제주도를 가던 시절이 있었다. 나도 당시에 한다리를 걸치고 제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그때 제주도의 인상은, 좋은 건 별로 없고 온 도민이 육지사람 벗겨먹으려고 하는 모양이다... 그런 느낌 정도. 육지에 대한 형체없는 적대감이 있다고 해야할까. 한동안 다시 가고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니 제주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지식도 없었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을 보는 눈에 여유가 생기자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비로소 제주에 크게 관심이 갔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지난후에 제주를 다시 갔었다. 내동생은 대여섯번을 넘게 다녀온 뒤에야.

 

유홍준의 답사기 7권은 제주의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렌트카를 끌고 누구나 갈수있게 제주허씨를 위한 안내서라는 농담같은 별칭도 붙어있다. 제주도를 위한 여행안내서가 꽤 있고 제주의 문화를 소개하는 책자도 꽤 있겠지만 유홍준교수의 책이 나오면서 일반을 위한 역사문화 안내서로는 가장 적합한 책이 된 것 같다. 대부분 알다시피 제주도에는 볼만한 문화재가 별로 없다. 대신 제주에만 있는 문화와 민속과 자연유산, 그리고 역사가 있다. 탐라이래 육지와 떨어진채 오랜세월 지내왔던 제주의 독특함과 역사적으로 유배지와 특수공물 진상처로 취급되었던 서러움, 그리고 부정할수 없는 제주인의 한 4.3이 모두 이 책에 녹아있다.

 

육지역사라고 해서 특별히 더 잘아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 책을 통해 제주와 관련된 여러 생생한 지식들을 접할수 있었다.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 유교수다. 삼성혈이나 관덕정,성읍마을이나 알았지 산천단이며 와흘 본향당의 여러 신은 들어본 기억이 없다. 신혼여행 당시 그래도 사학과라고 민속박물관에 가서 진성기선생의 책을 한권 사기는 했지만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 생각도 안난다. 다랑쉬오름도 못가봤다. 해녀가 일본에도 있다는 사실은 들어봤지만 조선시대때 남녀가 나체로 조업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한라산 높이가 1950m라는 것은 좀 똑똑한 초등생정도면 아는데 단지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측량했다고만 알았는데 1901년 독일사람 겐테박사가 잰 것이라는 점도 이번에 알게되었다. 돌하르방이 1971년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여러 이름중 통합적으로 선정되었다는 점도.

 

제주의 4.3사건을 대체로 객관적으로 설명한 점이 돋보인다. 처음에는 충혼탑만 보면 피가 끓는다고 표현했던 사람인데 정부기관의 장을 지내고나니 부드러워졌나보다. 4.3은 대통령이 공식사과하고 아직도 보상신청을 받고있는 중이지만 사실을 밝힌다는 점이 참으로 어려운 듯 하다. 사실이라는게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수 있는 것이라면 사실이 곧 진실일수는 없고 그렇게 따지면 진실조차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영화 라쇼몽처럼.

 

이런 부분은 문학에서 그 이쪽과 저쪽의 이야기를 때론 처연하게 때론 한가롭게 풀어나가야 하는데 오랜동안을 일방적인 이야기만 들어온 터니 반대쪽 이야기가 진실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를 공부하며 느낀 것은 어디 한쪽이 일방적으로 옳은 경우가 있었던가 하는 점이니 좌파든 우파든 서로 목소리가 줄어들 턱이 없는 것이다. 사실 서로 줄어들어야 맞는 것인데... 대표적인 진보인사의 하나인 유홍준교수 자신이 분명히 밝혔듯이 4.3의 출발은 좌익의 정부에 대한 무력 도발이었다. 그런데 당시는 정부가 미군정이었으니 이걸 어떻게 봐야할지. 더 따지면 역시 이념으로 돌아가겠지만 오해가 증오를 낳고 증오가 폭력을 낳은 악순환이 결국 무고한 양민학살로 이어진 결과가 되었다.

 

몇십년만에 다시찾은 지난번 제주여행은 풍광위주의 여행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혼자 다시 간다면 이책에서 소개해준 문화포인트에 조금 더 가까이 다녀볼수 있을 것도 같다. 아마도, 답사기따라 제주여행, 이런 타이틀을 내건 제주여전문여행사가 있지 않을까.

 

제주와 관련있는 역사인물이 너무 많은데 이름난 조선조 문인들만도 김상헌, 정온, 송시열, 이형상, 김정희, 임제 등등 여럿이다. 제주도에는 구석기유적지도 있으니 마치 강화도처럼 제주 역시 고대부터 현대까지 모든 역사를 품고있는 섬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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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읽는 방법 - 텍스트를 어떻게 읽고 해석할 것인가
퀜틴 스키너 지음, 황정아.김용수 옮김 / 돌베개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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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읽는 방법

Visions of Politics Volume 1. Regarding Method

켄틴 스키너 / 돌베개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을수 없다. 나는 한국사를 전공했지만 역사이론에도 관심많아서

역사철학, 지성사, 서양사상 등에도 많은 양은 아니지만 꾸준히 독서를 해왔다그런데

이 책 <역사를 읽는 방법>은 내게는 벅찬 책이었다. 내용이 딱히 어렵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이해할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는 저작이라 본다. 서양근현대사에 약간의 지식이 있거나 서양철학에 어느정도의 소양이 있다면 도전할만 하다. 애초 역사에 관한 내용인줄 알고

달려들었지만 역사라기 보다는 소개글 그대로 텍스트 읽기와 해석에 관한책이다.

더불어 이 책을 수월하게 이해하려면 철학적, 언어학적 지식이 필요할 듯 하고 무엇보다

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를 알고 있다면 편하게 읽을수 있겠다.

 

그래서 서평을 쓰고 싶었지만   이건 독후감도 못되는 글이 되고 말았다 

가장 난해했던 점은 문장의 서술에 대한 것이다. 이책의 번역자가 허투루 번역을 했다든가

번역자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문번역자와 전공자 사이에서 이책은 누구에게

맡겼으면 더 쉬운 번역이 될수 있을까 한참을 생각했다.

 

예를들면

이 시도는, 익숙하기 때문에 역사가에게는 본질적으로 과거에 적용될수 없다는 점이

은폐되는 패러다임들의 무의식적인 적용이 윤리적,정치적,종교적,혹은 그 외의 유사한

사유방식에 대한 현재의 역사적 연구를 어디까지 오염시키고 있는지 밝히는 과정이 될 것이다.”

 

행위자의 행동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이 행위자에게는 가능하지 않았던 묘사와 분류기준의

이용에 의존한다는 것이 드러나고도 게속해서 납득할만한 것으로 성립할 가능성은 배제한다.”

 

이렇게 중문과 복문이 섞인 문장이 많은데 조금만 흐름을 놓쳐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분석과

정리를 통하지 않고는 이해가 어려웠다. 그래서 집중을 못하고 끙끙대고 있노라 쉽사리

책속으로 빠져들지 못했다. 아무튼 내가 대강 이해한 내용으로 독후감을 써본다면:

 

 

이 책은 세권으로 이루어진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들> 시리즈중 첫 번째인 <Regrding Method><역사를 읽는 방법>으로 번역한 것이다. 책의 구성은 서문과 10개의 장으로 되었으며 몇몇

장은 처음 출판된 것이지만 대개는 이미 발표된 논고들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방법을 논하는데 기존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관점을 주장하고 있다. 저자가

서문에 밝힌 대로라면 텍스트를 지적인 맥락과 담론의 틀 속에 위치시켜 저자가 실제로 어떤

일을 행한 것인지알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스키너는 화행, 통약불가능, 발화수반

행위등등 언어학적 개념들을 주로 사용한다. 개별 챕터에서는 동서고금이 아닌 서양 근현대의

주요 저작들과 인물을 동원해서 역사해석이나 텍스트 독해의 오류를 하나하나 집어낸다.

1장에서는 전체적인 논지와 각각의 장에 나오는 개념들을 소개한다.

 

역사학의 기본적 개념이자 명제인 사실(facts)의 개념과 실제성의 여부논쟁은 우리에게도 너무

익숙한 실증사학의 태두 랑케를 연상시킨다. 우리는 실증주의와 실증사학을 혼동하고 있지만

철학으로서의 실증주의는 조금 다르다. 그런데 여기서 사실을 지시하는 것은 언어이므로 언어에 있어서, 의미가 아닌 주장의 진실성을 찾자는 학파도 있다. 여기서 스키너가 강조하는 것이

화행(speech act)이다. 언어를 사용할때는 항상 무엇인가 행동한다는 뜻이라고 한다따라서

언술은 곧 행동이라 말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을 중시하고 장기지속의 개념을 사용한다. 뒤에가면

이 책에서 개념에 대한 개념을 논하므로 함부로 개념이란 용어를 쓰기도 꺼려지지만 어쨌든

장기지속이란 프랑스 아날학파의 이론이므로 스키너의 주장을 알려면 광범한 기본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수 없다.

 

그는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 제프리 엘턴의 경우를 예로들어 역사가와 사실(객관적 사실)

관계를 밝힌다.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현실적이고 유용한 질문으로 생각되는 역사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세계에 도움을 줄수 있는가에 대해 엘턴은 어떤 답변을 했을까. 답은

 그런식의 열망을 완전히 버리고 포기하라.”. 내 생각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대개

정형화되어있다. 우리나라라면 당연히, 역사학은 현재를 위해 복무한다. 역사를 보면 현재와

미래를 알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미래예측이나 역사적 결정론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정점이다. 그런데 엘턴이 추구하는 역사의 답은 과거는 현재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정도 이다. 스키너가 보기에 역사학자들은 대개 같은 생각을 하고있나보다.

우리만 다른가?

 

스키너는 해석의 문제를 중시한다. 마키아벨리 <로마사논고>의 예를 들면서 공화정의 자유와

왕정 하의 자유를 동시에 말하는 모순된 논지에 대해 다수학자들은 마키아벨리가 혼란에

빠졌다고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스키너에 따르면 repubblica라는 어휘는 법이 공익을

보장한다는 뜻으로 군주정하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국정운영의 사례라고 한다. 그러므로

로마 초기 왕정에서 repubblica의 사례가 틀림없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역사해석의 문제인가? 이건 사학도가 제일 먼저 배우는 사료비판의 기본 아닌가?

라틴어의 용례나 어원만 조사해도 알수 있는 사실이 아닐까?

 

관념사 이해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일어난다. 대부분 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고전텍스트에 대해서는 그 논의에 초점을 두고 영속적인 사안이 가리키는 바를 조사하는게

핵심이다. 만일 그것이 나온 사회적 조건이나 지적 맥락을 살펴보는 곁길로 빠진다면 고전이

가진 지혜를 놓치고 가치를 잃게될 것이다.”

대체 말이되는 주장인가? 혹시 고전에 대한 독서와 연구는 달라야한다는 주장일까? 무엇이 되었든 논지를 헤아릴때는 조건과 맥락을 따지는게 당연한 순서 아닌가. 이건 비단 스키너의 비판을

기다리지 않고도 사학도 차원에서 반박할수 있는 사안으로 보인다.

 

잉글랜드 관습법이 때로 성문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에드워드 쿡의 보넘판결에 대한 견해에서

근대 미국의 연구자들은 (몇백년후에나 등장하는)위헌법률심사권의 원칙이 여기서 나온다고

보았고 전문가들도 크게 반대하지는 않는 분위기라고 한다. 이걸 텍스트 방법론의 문제로 보아야 하는지. 이건 연구자의 수준이나 오독에 관한 내용이라해야 더 적절하게 보인다. 아니면 신념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일관성의 신화라는 부분에서,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읽고 또 읽어

홉스는 이런 일관성이 있다는, 자신이 찾는 견해를 발견해내는 학자들의 예를 들었는데 이런

경우가 우리나라에도 없지 않다.

고전의 저자에 대해 자신이 찾는 주제나 개념을 덧씌워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는 의외로 많이

발견된다. 나는 언젠가 이사야 벌린의 책을 신청하는 인터넷 댓글에서 이사야 벌린을 신자유주의의 대부라고 쓴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마치 율곡 이이가 실학의 대부라고 한것과 똑같다. 이는

다시 이책에서 스키너가 비판하는 플라톤을 전체주의자로 보는 학자들과 같은 것이다.

 

스키너는 이렇게말한다. “텍스트를 이해하려면 말해진 것의 의미에 대한 설명만이 아니라 해당

저자가 그런 말을 함으로써 담아낸 의미에 대한 설명도 제시할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홉스와

벨의 텍스트는 이해했다고 믿을수 있을때까지 거듭거듭 읽는다고 해서 절대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제시한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즉 사람들이 말하는 것 뿐 아니라 그렇게 말함으로써 행하는 것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들이 말한 것의 의미를 파악할뿐 아니라 그렇게 말함으로써

의도한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이렇게 정리되어 표현된다.

따라서 그런 텍스트를 연구할 때 직면해야할 문제는 특정 독자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쓸 당시에 저자가 그와 같은 발언들을 내놓음으로써 실제로 어떤 것을 전달하려고 의도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건 마치 <조의제문>이나 <춘추>를 들어 말하는 듯 하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정말 의제를

조문하려 쓴글이겠는가. 춘추필법은 예컨대 이런식으로 쓴다. “ 전두환과 최규하는 1979,1980

사이에 많은 사람을 죽였다.”  최규하를 포함시키는 것이 춘추필법의 의미다.  이 역시 사학도

들에게는 너무 당연한 연구태도 아닐까?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텍스트의 정확한 해석이고 이를 위해서는 말의 의미뿐 아니라 말속에

담긴 행동 즉 화행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는 또 발화수반과 의도의 발견으로 나타난다.

사례를 통해보면, 겨울 연못에서 스케이트타는 사람에게 경찰관이  그쪽의 얼음은 매우

얇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우리는 이 단어들의 의미는 물론 말하면서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를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그 화행은 얼음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경고다. 발화결과로 나타난

경찰관의 의도는 무엇인가? 바로 이점이 스키너가 공들여 써내려간 책의 주제다.

의도를 알기위해 텍스트의 맥락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10장에서는 개념의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개념은 계속 변해왔으므로 동일한 대상을

말하는 두사람이라도 변화된 개념을 일치시키지 않으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 나무만 보느라 숲은 볼 생각도 못했다. 나무도 제대로 못봤는데 어찌 숲을 보았을까.

다만 스키너의 이런 주장이 내게는 새롭게 다가오지 않고 평이하게 들릴 뿐이다. 어쩌면 이책이

역사가 아니라 정치사상에 대한 것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잘 모르는 내용을 억지로 읽어나간

기분이다.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책일텐데. 맥락을 찾고 저자의 의도를 알면

보물단지일수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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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화가들 - 조선시대 궁중회화 3 돌베개 왕실문화총서 6
박정혜 외 지음 / 돌베개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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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화가들

한국학중앙연구원/박정혜 황정연 윤진영 강민기

돌베개 / 407

 

정신문화연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연구와 함께 도서간행사업도 활발하게 벌이고 있는데 2011년부터 왕실문화총서 시리즈의 하나로 조선시대궁중회화 연작을 간행하고 있다. 이번 <왕의 화가들><왕과 국가의 회화> <조선궁궐의 그림>에 이은 세 번째 책으로 연작의 완성본이다. 책은 407쪽 이지만 본문은 360쪽이고 많은 양의 주석과 전거가 덧붙여져 있다. 1권의 왕, 2권의 궁궐에 이어 화가를 조명했으니 그림을 통해본 조선왕조가 아니라 조선왕조의 그림이야기고 그 3권은 도화서 화원을 다룬 책이다.

 

이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단연 상당량의 컬러도판이다. 이 사진들을 보고있노라니 작년 리움의 <조선화원전>과 올여름 포스코미술관 <천재화인열전>이 생각났다. 이 책을 먼저 보고 전시회를 봤으면 좀더 이해가 쉬웠을텐데.

 

책은 4부로 구성되었다. 1부 조선시대화원과 궁중회화, 2부 왕의 초상을 그린 화가들, 3부 제국의 황실화가들 화가에서 시대인으로, 4부 궁중회화에 담긴 길상의 시대.

얼핏 목차를보았을 때 화원을 다룬 책인데 4부의 궁중회화 길상은 부조화스런 느낌이 있었는데 서문에 원래의 4부가 아니지만 궁중화가와 길상표현은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포함시켰다는 설명이 있다.

 

조선시대의 그림은 화원화와 문인화로 나눌수있는데 선비들이 그리는 문인화가 규격을 벗어난 자유로운 예술이라면 화원화는 일단 기록을 위한 주문그림이라고 하겠다. 마치 오늘날 사진의 기능을 하고있었던 셈이다. 어진이라 부르는 왕의 초상화, 진행기록화나 행사도, 건축물의 밑그림에서 조감도까지, 병영도와 지도 등 군사용 그림, 경관이나 생활상 등등 국왕의 눈 구실을 해준 것이 화원화가들이다. 또 이외에 감상용 그림이나 진상용 예술품을 그리기도 하였다. 우리가 근래에 많이 들어본 의궤란 주요 행사의 전과정을 그림으로 남겨둔 것이다.

 

그러므로 한두번이상 이름을 들어본 화원들이 많이 등장한다. 김득신 김홍도 이인문 변상벽 이상좌 등등. 고려의 도화원이 조선에 들어와 도화서가 되고 정조때 차비대령화원을 거쳐 대한제국기에 규장원 소속으로 바뀌었다가 없어지는 미술담당관청의 약사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를 다루고있어서 전시기를 조망하지는 않았는데 불과 얼마전에 나온 미술사학자 안휘준선생의 신간에서 통일신라의 솔거(황룡사 노송도로 유명한)는 귀화한 중국인도 아니고 승려도 아닌, 통일신라의 도화서격인 전채서 소속 화원이었다는 사실을 논증했다.

도화서 화원은 관리이기는 하지만 기능공인 탓에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어진을 그린 화원이라도 6품이상 오르기 힘들었다. 간혹 국왕이 마음에 들어해서 3품직으로 올려줄라치면 벌떼같은 상소와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중앙의 도화서 화원 외에 지방으로 파견간 화사군관제도 있었고 도화서 소속이 아닌 방외화사도 있었으며 지역에서 활동한 직업적 지방화사도 존재했다고 한다.

 

화원은 실력이 뛰어난 화가도 많이 있었지만 행사에 동원되어 그린 화원화는

공적인 특성상 개성적인 화풍을 드러낼수 없고 기존의 패턴을 따라 반복한 것이 특징이어서 시각적으로 화려하게만 보일수 있다. 그러나 그속에 숨겨진 작업공정과 회화적인 가치, 화원이 흘린 땀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간과된 경향이 있다. 적게는 3~4, 많게는 수십명이 참여하여 하나의 작품을 함께 완성한 단결성, 색채와 문양에 있어 정제된 물감과 먹선을 사용한 집중력 등이 집결된 노력의 결실이라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왕의 얼굴을 그리는 어진화사가 되는 것은 화가에게 큰 영광이었고 그만큼 선발도 어려웟다고 한다. 화원이 결정되면 세 파트로 나눠 얼굴등 주요부위를 그리는 주관화사, 옷과 배경을 그리는 동참화사, 보조작업을 하는 수종화사로 어진화사를 구성했다고 한다. 어려서 부친을 잃고 생각지 않게 왕이 된 성종은 부왕(의경세자)의 얼굴을 그려준 화원 최경을 고위직에 임명하여 언관과 마찰을 빚었다고도 한다.

 

근대에 들어와 사진이 도입되면서 화원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화원들은 근대화단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았다. 그런중에 서양문물을 접하고 외교활동을 하거나 사진술을 배워 사진관을 연 화원들도 있었다.

 

이책은 가볍게 보는 책이라기 보다는 관심있는 사람들이 참고 또는 소장용으로 구입하면 좋겠다. 글의 체제나 구성, 서술이 전형적인 논문투라 대중용 역사문화 개설서로는 조금 미진해보인다. 또 역사를 전공한 분들이 아니라서인지 한일합방 등의 용어는 거슬린다. 그러나 오랜 공동연구 끝에 궁중화에 대한 거질의 연구성과를 내놓은 네분의 저자에게 독자로서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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